혐오와 차별을 넘어 농촌에서도 ‘장애인 기본권’을

  • 입력 2023.05.28 18:00
  • 수정 2023.05.29 07:04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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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1984년 8월, 지뢰사고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은 이형일씨가 지난 23일 경기 파주시 군내면 들녘에서 모내기에 나선 가운데 이앙기에 모판을 싣고 있다. 이씨는 “의족 때문에 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이앙기나 트랙터 등을 논둑에 일렬로 세워야만 일을 진행할 수 있다”며 “오랜 세월 내 손과 발이 되어준 아내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고 고마워했다.한승호 기자
1984년 8월, 지뢰사고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은 이형일씨가 지난 23일 경기 파주시 군내면 들녘에서 모내기에 나선 가운데 이앙기에 모판을 싣고 있다. 이씨는 “의족 때문에 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이앙기나 트랙터 등을 논둑에 일렬로 세워야만 일을 진행할 수 있다”며 “오랜 세월 내 손과 발이 되어준 아내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고 고마워했다.한승호 기자

독일 수도인 베를린 시내 곳곳엔 1930~1940년대 나치 독일의 만행을 반성하는 기념 시설들이 있다. 그중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있는데, 베를린 중심부 필하모니 공연장 인근에 만들어진 추모비다. 이름하여 ‘T4 –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 희생자 추모비’다.

T4 작전(Aktion T4)은 나치 독일이 추진한 장애인 말살계획이다. 아돌프 히틀러 등 나치 지도부 입장에서 장애인은 ‘쓸데없이 음식만 축내는 것들(나치 측이 공식적으로 쓴 표현)’이었다. 장애인 및 정신질환자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에 해를 끼친다’는 나치의 기조 아래, 최소 7만명 이상의 장애인 또는 그 밖의 ‘사회 부적격자’들이 안락사 등의 방식으로 학살당했다. 필하모니 공연장 인근에 마련된 추모비는 이와 같은 나치의 만행을 절대 잊지 말고, 이 세계에서 장애인에 대한 혐오·차별을 끝내자는 염원을 담아 만들어졌다.

100년 가까이 된 옛날, 그것도 저 멀리 독일의 이야기가 뜬금없이 느껴질 테다. 그러나 저 ‘T4’라는 끔찍한 단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론장에서 다시 이야기되고 있다. 이동권 문제 등 장애인 기본권 확보를 위해 분투 중인 장애인 인권운동 단체들은 ‘한국판 T4’를 끝장내자는 취지 아래 2021년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 ‘한국판 T4 철폐 농성장’을 꾸렸다.

국가가 작정하고 장애인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진 건 아니건만 왜 ‘한국판 T4’를 이야기하는 걸까. 대한민국 정부의 장애인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장애인을 작정하고 학살한 나치 독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교통·교육·문화·노동 등에 관한 모든 사회적 기반은 철저히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 그 기반 중 장애인이 설 자리는 없었고, 장애당사자는 없는 사람 취급당했다. 장애인이 국가 차원에서 호명되는 순간은 단 한 순간이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인 ‘취약계층’으로 호명되는 순간이다.

대한민국 수도의 시장부터가, 집권 여당의 당 대표부터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매도하며 장애인에 대한 범사회적 차별·혐오를 조장하는 행위 역시, 근본 관점은 “장애인 하나 돌보는 데 6만 제국마르크(나치 독일 화폐단위)가 투입된다”던 나치 독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옛날의 나치 독일이 ‘우수한 아리안 민족만 살아야 하는 나라’였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우수한 비장애인만 살아야 하는 나라’인 셈이다.

지난 24일은 한국판 T4 철폐 농성장이 만들어진 지 800일 되는 날이었다. 장애인 인권운동을 벌여온 장애당사자들은 이 땅에서 한국판 T4 작전을 끝장내고 장애인 기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 장애당사자들은 장애인 시민권의 출발점인 이동권 실현을 위해 서울 지하철을 누빈 데 이어, 지난 17일부턴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 순회 이동권 실현투쟁을 전개 중이다. 서울을 넘어서, 농촌을 포함한 ‘지역’ 장애당사자들의 이동권 실현투쟁도 본격화하는 것이다.

<한국농정>은 올해 기획으로 장애인 문제와 ‘농(農)’의 연결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장애인 기본권의 첫 출발인 이동권 이야기, 농촌에 사는 장애당사자의 이야기, 농민으로서 살고자 하는 장애당사자가 누려야 할 기본권 등을 다각도로 다룬다. ‘한국판 T4 작전’의 강제종료를 위해, 우리 사회 모두가 장애인 기본권의 실현 방안을 함께 고민하고 논의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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