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독일 수도인 베를린 시내 곳곳엔 1930~1940년대 나치 독일의 만행을 반성하는 기념 시설들이 있다. 그중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있는데, 베를린 중심부 필하모니 공연장 인근에 만들어진 추모비다. 이름하여 ‘T4 –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 희생자 추모비’다.
T4 작전(Aktion T4)은 나치 독일이 추진한 장애인 말살계획이다. 아돌프 히틀러 등 나치 지도부 입장에서 장애인은 ‘쓸데없이 음식만 축내는 것들(나치 측이 공식적으로 쓴 표현)’이었다. 장애인 및 정신질환자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에 해를 끼친다’는 나치의 기조 아래, 최소 7만명 이상의 장애인 또는 그 밖의 ‘사회 부적격자’들이 안락사 등의 방식으로 학살당했다. 필하모니 공연장 인근에 마련된 추모비는 이와 같은 나치의 만행을 절대 잊지 말고, 이 세계에서 장애인에 대한 혐오·차별을 끝내자는 염원을 담아 만들어졌다.
100년 가까이 된 옛날, 그것도 저 멀리 독일의 이야기가 뜬금없이 느껴질 테다. 그러나 저 ‘T4’라는 끔찍한 단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론장에서 다시 이야기되고 있다. 이동권 문제 등 장애인 기본권 확보를 위해 분투 중인 장애인 인권운동 단체들은 ‘한국판 T4’를 끝장내자는 취지 아래 2021년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 ‘한국판 T4 철폐 농성장’을 꾸렸다.
국가가 작정하고 장애인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진 건 아니건만 왜 ‘한국판 T4’를 이야기하는 걸까. 대한민국 정부의 장애인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장애인을 작정하고 학살한 나치 독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교통·교육·문화·노동 등에 관한 모든 사회적 기반은 철저히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 그 기반 중 장애인이 설 자리는 없었고, 장애당사자는 없는 사람 취급당했다. 장애인이 국가 차원에서 호명되는 순간은 단 한 순간이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인 ‘취약계층’으로 호명되는 순간이다.
대한민국 수도의 시장부터가, 집권 여당의 당 대표부터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매도하며 장애인에 대한 범사회적 차별·혐오를 조장하는 행위 역시, 근본 관점은 “장애인 하나 돌보는 데 6만 제국마르크(나치 독일 화폐단위)가 투입된다”던 나치 독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옛날의 나치 독일이 ‘우수한 아리안 민족만 살아야 하는 나라’였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우수한 비장애인만 살아야 하는 나라’인 셈이다.
지난 24일은 한국판 T4 철폐 농성장이 만들어진 지 800일 되는 날이었다. 장애인 인권운동을 벌여온 장애당사자들은 이 땅에서 한국판 T4 작전을 끝장내고 장애인 기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 장애당사자들은 장애인 시민권의 출발점인 이동권 실현을 위해 서울 지하철을 누빈 데 이어, 지난 17일부턴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 순회 이동권 실현투쟁을 전개 중이다. 서울을 넘어서, 농촌을 포함한 ‘지역’ 장애당사자들의 이동권 실현투쟁도 본격화하는 것이다.
<한국농정>은 올해 기획으로 장애인 문제와 ‘농(農)’의 연결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장애인 기본권의 첫 출발인 이동권 이야기, 농촌에 사는 장애당사자의 이야기, 농민으로서 살고자 하는 장애당사자가 누려야 할 기본권 등을 다각도로 다룬다. ‘한국판 T4 작전’의 강제종료를 위해, 우리 사회 모두가 장애인 기본권의 실현 방안을 함께 고민하고 논의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