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일손부족’과 ‘장애인의 보람된 일자리’ 고민이 만난다면?

장애인기본권 연재기획④ 해외 장애인 참여농업 사례

  • 입력 2023.10.22 18:00
  • 수정 2023.10.22 19:34
  • 기자명 강선일·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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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권순창 기자]

농촌에서 살아가는 장애당사자 주민의 이동권, 자기 생활방식을 결정할 권리, 사회참여를 위한 농(農)적 방안, 장애인 먹거리기본권 등을 한 번에 아우를 주제를 찾기는 애매하다. 분명한 건 이 문제 모두 장애인기본권에 직결되는 문제이며, 농업·농촌·먹거리 담론과 연결되는 문제라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는 고민 아래, <한국농정>은 장애인기본권 관련 기획을 진행한다.

일본의 농복연계 제도

최근 국내에선 해외의 장애인 참여형 농업·복지 연계제도 중 하나로 일본의 ‘농복연계 제도’가 종종 소개되고 있다. 농복연계 제도는 장애인의 농업 참여를 늘림으로써 농업도 지속가능하게 하고 ‘장애인의 자신감과 보람’도 창출시키는 게 목적인 제도다. 농복연계 제도는 일본 농림수산성·후생노동성의 협업으로 운영된다.

농복연계 사업은 △복지사업자가 직접 농장을 만들어 장애인 참여 사회적농업을 진행하는 ‘복지농장형’ △복지사업소 이용 장애인이 농가에 출근해 농작업을 수행하는 ‘시설 외 취업 유형’ △복지사업자가 농업경영체로부터 외주를 받아 시설 내에서 가벼운 형태의 농작업을 실시하는 ‘시설 내 하청 유형’ △농업경영체가 장애인을 직접 고용하는 ‘고용형’ △기업이 장애인 법정고용률 달성을 위해 특례 자회사를 설립해 농사에 참여하는 ‘기업 특례 자회사형’ 등 다양한 유형으로 나뉜다. 최근엔 △ 농업경영체·복지사업소가 연계해 새로운 상품을 개발·판매하는 ‘공동상품 개발형’ △복지사업소 급식 및 식품가공원료를 농업경영체가 공급하는 ‘소비확대 연계형’ 등 농업 직접 참여 방식 이외의 새로운 유형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농산어촌 진흥을 위한 예산 중 ‘농복연계 대책비’ 예산을 2022년 기준 97억5,200만엔(한화 약 878억원)을 편성했는데, 이 예산은 △장애인의 농림수산업 관련 기술 습득 △유니버설 농원(다양한 세대·계층이 농사에 참여토록 만들고자 조성된 농장) 개설 △장애인 작업 배려를 위한 생산·가공·판매시설 정비 등에 활용된다.

지난 2월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보고서 <정신장애인 사회적농업 실천방안 연구 - 일본 농복연계와 희망일터 적용을 중심으로>에 소개된 일부 농복연계 사례를 살펴보자. 홋카이도의 Non-GMO 유정란 생산농장 ‘아그리콜라 팜’은 지역 복지사업소에서 직접 운영하는 양계사업장이다. 이곳에서 고용한 장애당사자 17명의 주요 작업은 닭 모이 주기, 물·사료 배합기 조작, 달걀 수집, 배달 등 양계작업 전반이다. 매일 출하하는 계란의 포장도 장애인 노동자가 맡는다. 노동자 업무 수행을 위해 복지사업소 전문인력이 지도 역할을 수행하나, 그렇다고 업무시간 내내 옆에서 지켜보거나 간섭하진 않는다. 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충분한 시간’에 걸쳐 완료하는 것을 지향하며, 시간 내 작업 완료가 어려운 경우에 한해 추가적 업무 지도를 제공한다.

홋카이도의 유기농 토마토 농장 ‘오츠카 팜’에선 지역 복지사업소와의 제휴로 지역 내 장애인을 고용해 방울토마토 수확·포장 작업을 맡긴다. 이곳에선 가능한 한 장애인 노동자가 비장애인 직원 및 다른 인력과 접촉하지 않도록 하는데, 이는 장애인 노동자 다수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어 낯선 사람과의 접촉을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신 다양한 작물의 수확 방법을 매뉴얼화해 유튜브에 영상으로 올리고, 노동자가 영상을 시청함으로써 수확 방법을 알게끔 한다.

지역에서의 자립적 농복연계 사례 만든 `일맥회'

일본 와카야마현 사회복지법인 ‘일맥회’가 운영하는 사회적농장 ‘모기타테’의 지역산 토마토 가공 케첩을 홍보하는 지역생협 전단지. 토마토 생산 및 케첩 가공은 모기타테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이 진행했다. 노나카 야스히로 일맥회 사무국차장 제공
일본 와카야마현 사회복지법인 ‘일맥회’가 운영하는 사회적농장 ‘모기타테’의 지역산 토마토 가공 케첩을 홍보하는 지역생협 전단지. 토마토 생산 및 케첩 가공은 모기타테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이 진행했다. 노나카 야스히로 일맥회 사무국차장 제공

일본 농촌현장의 대표적 농복연계 사례로서, 와카야마현 키노가와시 사회복지법인 ‘일맥회(일명 무기노사토)’의 사례를 살펴보자.

키노가와 지역 농가들은 고령화로 인한 일손부족 문제를 겪어왔다. 고령의 농민이 토마토 등의 작물을 생산뿐 아니라 가공까지 해서 팔자니 힘에 부쳤고, 그 과정에서 농민은 가공할 업체를 못 찾은 ‘못난이 농산물’을 자기 돈 들여 폐기해야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가공업체는 농산물을 대량으로만 받기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장애인운동을 벌여온 일맥회는 이상의 상황을 목도한 뒤, 2023년 현재 일본 정부가 진행하는 것과 별개로 2000년경부터 자체적으로 지역 내 ‘농복연계 사업’을 시작했다.

노나카 야스히로 사회복지법인 일맥회(일본 와카야마현 키노가와시 소재) 사무국차장
노나카 야스히로 사회복지법인 일맥회(일본 와카야마현 키노가와시 소재) 사무국차장

최근 방한한 노나카 야스히로 일맥회 사무국차장은 지난 15일 기자와의 만남에서 “장애인의 기존 일자리는 대부분 단순 부품 조립 등 노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일자리였다”며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인간답고 보람 있는 일을 찾다가 농업을 접하면서, 지역에서 폐기될 위기의 농산물을 장애인이 소규모로 가공하는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로 했다. 농가의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장애인의 일자리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농복연계 사업을 시작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농복연계 과정에서 장애인은 농사에도 참여한다. 키노가와에선 농촌 고령화로 ‘경작 포기 농지’가 늘어나 잡초가 2~3미터씩 자라는 밭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제초작업을 진행한 뒤 다시 밭으로 만들어 장애인이 농작업을 하게 했다. 제일 많이 재배하는 작물은 양파·토마토다. 농사와 관련해 노나카 차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파·토마토는 일단 가공품의 판로(지역 내 소스공장, 생협 등)가 확보돼 있고, 타 작목 대비 기르기 쉬운 편이라 많이 재배한다. (고용된 장애당사자들은) 농산물 가공기술은 가공 전문가들로부터 배웠고, 농사방법은 지역농협인 ‘키노가와농협’ 조합원 농민들로부터 배웠다. 농사는 어떻게 짓냐고? ‘(농작업을) 이것부터 저것까지 다해라’가 아니라, 장애인과 농사 지도원(지역 농민, 사회복지사 등)이 다 같이 작업한다. 힘을 모아서 하나의 작업을 끝낸 뒤 다음 작업으로 넘어간다. 땅 갈기도, 씨뿌리기도, 수확도 여럿이 힘을 모아서 한다.”

일맥회의 농복연계 사업은 키노가와농협과의 협력하에 이뤄진다. 일맥회와 키노가와농협은 사회적기업(소셜팜 모기타테. 모기타테는 일본어로 ‘갓 수확함’이란 뜻)을 만들어 장애인을 고용함으로써 농산물 생산·가공작업을 진행함과 함께, 농협 직매장에서 장애인이 지역산 농산물로 만든 토마토 케첩·주스 등을 판매해 왔다. 팔리지 않은 농산물·가공품은 일맥회가 운영하는 그룹홈(장애인이 자립할 때까지 공동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소규모 보호시설) 8군데와 장애인학교 및 작업장 등의 급식,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사회생활을 회피하며 은둔하려는 시민을 뜻함)들이 운영하는 ‘하지메 카페’에서의 급식 등에 활용한다.

강내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겸임교수
강내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겸임교수

국내외 사회적농업 실천사례 및 발전방안을 연구해 온 강내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겸임교수는 “일맥회는 초창기 ‘장애인 작업장 운동’ 등 장애인기본권 운동을 진행했지만, 점차 장애인의 부모님, 고령 농민, 히키코모리 등 지역사회 내 모든 사람의 필요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며 “일맥회 사례는 일본 정부의 농복연계 지원을 받기 전부터 정부 보조금과 별개로 지역에서 자립적으로 농복연계를 실천해 온 사례다. ‘보조금 지원사업에 의존해 사업을 만든 사례’와 ‘독자적으로 진행해 온 사업에 보조금을 활용하는 사례’는 성과와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 일맥회 사례는 전형적인 후자의 사례”라고 분석했다.

농업·복지 영역의 문제 함께 해결하자

지난 15일 강원도 춘천시의 모처에서 강내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겸임교수(왼쪽)와 노나카 야스히로 사회복지법인 일맥회 사무국차장이 일맥회의 농복연계 사업 사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노나카 차장은 강원도에서 열린 심포지엄 참가 차 최근 방한했다.
지난 15일 강원도 춘천시의 모처에서 강내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겸임교수(왼쪽)와 노나카 야스히로 사회복지법인 일맥회 사무국차장이 일맥회의 농복연계 사업 사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노나카 차장은 강원도에서 열린 심포지엄 참가 차 최근 방한했다.

현재 일본 정부의 농복연계 사업에 참여하는 농업경영체·복지사업자들이 전부 일맥회처럼 사업을 진행하는 건 아니다.

한 농복연계 사업소에선 장애인 1인당 월 20일 출근 시 16만엔의 사업비가 국가로부터 지급되는데, 그중 5만엔만 장애당사자에게 인건비로 지급되고 나머지 11만엔은 해당 사업소가 독차지하는 사례도 있었다. 농작업 등을 위해 전문성 있는 직원을 여럿 배치해야 하건만, 아무런 전문성도 없는 감시·감독 직원만 배치한 채 자신들의 수익만 우선시하는 ‘기업형 작업소’도 늘어나는 형국이다. 노나카 차장은 “농복연계란 이름 아래 (사업이) ‘장애인 저임금 노동착취’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장애인이니까 더 싸게 고용하자’는 식으로 말이다”라고 지적했다.

구조적 문제도 있다. 현재 일본의 장애인복지제도 자체에도 ‘시장원리’가 도입돼, 장애인을 훈련시키고 일반 취업을 목표로 하는 것이 장애인복지의 정의처럼 여겨지고, ‘얼마나 일반 취업시장에 (장애인을) 잘 적응시키느냐’가 복지시설의 평가 기준이 되는 상황이라는 게 노나카 차장의 설명이다.

농복연계 제도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강내영 교수는 “농업과 복지라는 양대 영역이 각자 가진 과제를 서로가 연결된 가운데 함께 해결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농복연계가 의미 있게 이뤄지겠지만, 무조건 ‘보조금 주니까 같이 해보자’는 식으로 진행해선 오래 못 간다”며 “농업분야의 문제(고령화, 경작지 포기, 일손 부족 등)와 장애당사자들의 문제(일자리 확보문제, ‘보람 없고 사람을 소진시키는 일자리’가 가득한 문제 등)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양대 영역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관계가 될 시 진정한 농복연계가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지난 8월 한일돌봄농업세미나를 주최했던 서정훈 농업회사법인 콩세알 대표는 “일본의 농복연계는 특히 장애인 일자리 측면에서 특화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도 제도 참고 시 조심할 부분을 언급했다.

서정훈 대표는 “농업노동력의 반대급부로만 접근하면 지극히 제한적인 사람들만 함께할 수 있다. 장애인들이 주체적인 생활인으로 자리 잡는 걸 목표로 하되,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찾아주면서 자유롭게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춰 어떤 사람은 일자리, 어떤 사람은 농촌환경 그 자체, 어떤 사람은 관계 형성이나 자존감 향상, 이런 식으로 다양한 여건을 제공하는 사회적농업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라고 주장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취재․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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