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학습자들의 새로운 삶, 농업으로 모색하기

  • 입력 2023.09.24 18:00
  • 수정 2023.09.25 15:45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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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 16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스튜디오 흙' 농장에서 진행된 느린 학습자 농업체험 프로그램 `흙을 찾아서, 나를 찾아서' 중 농민 이상배씨가 한 어린이의 포도 수확을 돕고 있다.
지난 16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스튜디오 흙' 농장에서 진행된 느린 학습자 농업체험 프로그램 `흙을 찾아서, 나를 찾아서' 중 농민 이상배씨가 한 어린이의 포도 수확을 돕고 있다.

“여기 농장에 있는 거 다 별이에요?”

“그럼! 다 별이야.”

“그럼 여기는 우주겠네요?”

농장에 있는 농작물들을 ‘별’이냐고 묻는 한 어린이의 질문에 농민은 웃으며 답했고, “여기는 우주겠네요”라는 어린이의 답변을 듣고서 “시인이 여기 있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의 유기농 포도 농장인 ‘스튜디오 흙’. 이곳에서 농사짓는 이상배씨는 지난 16일 화성지역 ‘느린 학습자’ 어린이·청소년 및 그 가족 10여팀을 농장에 초대했다. 이상배씨는 아이들에게 벼·포도 등 농작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설명하고, 과수원 포도 수확 등 농작업도 직접 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이상배씨는 농장에서 재배한 포도를 보여주며, 포도알을 밤하늘의 별에 비유했다. 아이들은 천천히, 그러면서도 알기 쉽게 농사와 먹거리를 설명하는 이씨의 설명을 경청했고, 궁금한 점은 그때그때 질문했다. 서두에 언급한 “여기 농장에 있는 거 다 별이에요?”라는 한 아이의 질문도 그 과정에서 나왔다.

아직 전무한 ‘느린 학습자’ 지원정책

이날 스튜디오 흙 농업체험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느린 학습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의미할까? ‘느린 학습자’는 공식적으론 ‘경계선 지능인’이라 불린다. 미국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DSM-IV)에서 규정하는 데 따르면, 표준화 지능검사 기준 지능지수(IQ) 71~84를 경계선 지능이라 부른다.

IQ 70 이하는 현 제도상 발달장애인으로 규정되나, 경계선 지능인은 장애인 범주에 속하진 않는다. 그러나 경계선 지능인은 장애인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차별을 받아왔다. 학습한 내용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학습부진아’, 심지어는 ‘사회 부적응자’ 등의 낙인을 찍어왔다.

최소한 발달장애인은 제도상 장애인 관련 지원이나마 받을 수 있지만, 경계성 지능인은 ‘비장애인’이기에 관련 지원 정책도 없다. 일단 허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지난 3월 △국가·지자체의 경계선 지능인 사회통합 촉진 및 복지향상 노력 △경계성 지능인의 자립 및 고용·직업재활 지원 조치 강구 등을 규정하는「경계선지능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아직은 국회에 계류 중인 상태다.

사회적농업의 또 다른 주역, 느린 학습자

사회적농업 실천주체 중 일부는 느린 학습자 참여형 농업 방안을 모색 중이다. 대표적 사례가 경기도 고양시 ‘뜨렌비팜’ 농장에서 사탕수수 등 열대작물을 재배하는 정현석 ㈜사탕수수 대표 사례다. 정현석 대표는 매주 1~2회씩 고양 및 경기도 각지의 느린 학습자들이 참여하는 농업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1년 약 60회 교육 진행). 한 회기당 참가인원은 10명 미만이다. 천천히, 의미 있게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정 대표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느린 학습자들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남아있고, 우리 사회 속 느린 학습자들의 자립기반 또한 불충분한 현실”이라며 “열대작물 생산·가공 관련 교육을 통해, 타 작물 대비 생산농가가 적은 열대작물 영역에서 느린 학습자들이 자립기반을 마련하는 데 조금은 더 용이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늘어나는 열대작물 소비량의 대부분을 수입 농산물로 충당하는데, 기왕 열대작물을 이용한다면 우리 땅에서 느린 학습자가 생산하거나 가공한 먹거리를 먹는 게 좋지 않겠나. 이러한 가치소비가 늘어난다면 열대작물 생산·가공을 통한 느린 학습자의 자립도 불가능하진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상배씨는 화성에서 화성느린학습자부모자조모임 '늘품' 등의 조직과 함께, 1회성에 그치지 않고 1년 내내 진행하는 ‘느린 학습자 농업참여 프로그램’을 설계 중이다. 이상배씨는 “농지는 단순히 농사짓는 공간일 뿐 아니라 종합 예술공간이자 교육공간”이라며 “이러한 공간에서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흙을 만지고, 농사를 체험하면서 새로운 삶을 배우고, 스스로가 자존감을 찾게 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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