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김태형 기자]
코로나19와 기후변화에 더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식량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주요 곡물 수출국들이 식량을 무기화하고, 자국의 식량 공급 보호를 위해 수출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면서 세계 곡물 가격이 요동치고 있다. 실제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곡물가격지수는 지난 5월 173.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지난 8월 145.6까지 하락세를 거듭했지만, 지난달에는 152.3포인트로 전월 대비 3% 상승했다.
흑해 곡물 수출 협정의 지속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전망도 밝지 않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의 흑해 곡물 수출길을 막았다가 국제연합의 중재로 지난 8월 다시 열었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자국 함대를 드론으로 공격했다는 이유를 들며 협정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가 나흘 만인 지난 2일 다시 협정에 복귀한 바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세계 곡물 가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이 두 나라가 대표적인 곡창지대이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 9월 발간한 ‘주요 농자재 가격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세계 곡물 점유율은 밀 30%, 보리 34%, 해바라기유 63%에 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식량주권 확보 필요성은 날로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과 곡물자급률은 꾸준히 감소해왔다. 2021년 기준 식량자급률은 46%, 곡물자급률은 20%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쌀 자급률을 제외하면 곡물 대부분은 수입에 의존하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7위의 곡물 수입국이지만, 쌀의 높은 자급률로 인한 착시현상 때문에 곡물 수급안정에 대한 인식은 높지 못한 실정이라는 게 국회예산정책처의 분석이다. 최근에는 쌀값이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77년 이후 45년 만에 최대폭으로 떨어지면서 농민들은 국내 쌀 생산기반마저 무너질까 우려하고 있다.
떨어진 쌀값과 달리 코로나19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인건비를 비롯한 면세유·비료·농자재값 등 농사를 짓는데 드는 생산비는 폭등했다. 전국쌀생산자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쌀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200평 기준 67만9,759원으로 전년 대비 22% 증가했다. 최근에는 난방용 면세등유와 농사용 전기요금이 크게 오르고, 정부가 마늘·양파 저율관세할당(TRQ) 물량을 늘리면서 농민들의 수심이 더 깊어지고 있다.
농산물 시장개방 흐름도 농민들을 옥죄고 있다. 지난 2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발효에 이어 정부는 거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불리는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계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는 CPTPP에 가입하면 국내 농업에 큰 피해가 우려된다는 지적에도 정부가 구체적인 피해 산출과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식량주권 사수·CPTPP 가입저지 범국민운동본부'를 꾸렸다.
이미 농민들은 지난해 수확기 이후 수차례 상경 집회를 열고 논을 갈아엎으면서 정부를 향해 생존권 보장을 촉구해왔다. 그 결과 지난달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쌀값’을 화두에 올리는 일부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쌀을 격리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여야 간 정쟁으로 이어지면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던 농민들은 또다시 아스팔트에 모였다.
어느 때보다 식량 위기감이 커지는 가운데, 농민 1만5,000명은 국가에 ‘식량주권’ 확보를 위한 책임을 물었다. ‘내년에도 농사짓고 싶다’며 정부를 향해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농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