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중학교 때부터 농사짓기로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농고에 들어갔죠. 고등학교 졸업 후 군복무까지 마친 뒤 이곳 철원에 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철원에서 32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용빈 철원군농민회장 이야기이다. 김용빈 회장이 나고 자란 곳은 경기도 남양주 마석이다. “마석은 개발 붐이 일기 시작해서 장기적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농사지을 만한 곳을 찾아 이사를 하기로 했죠.”김씨가 군에 있는 동안 김씨의 아버지가 여기저기 농사지을 곳을 물색했다고 한다. “아버지 고향이
[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한반도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남북 농민들도 2000년 6.15 공동선언을 환희 속에서 맞이했다. 6.15 공동
2019년 우리나라 농업총생산액은 50조4,280억원으로 추정되며, 농산물을 생산하는 재배업의 경우는 30조7,050억원으로 추정된다. 과거와 달리 농산물의 생산은 대부분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농산물 생산자 가격이 생산비를 보장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해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배추 가격이 전년대비 53.1%나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무와 양파 등 많은 채소 품목들의 가격도 연이어 폭락했다. 이로 인해 농업인과 산지유통인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본지가 창간한 2000년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의 여파가 휘몰아치고 FTA라는 새로운 폭탄이 태동한 시기였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으로 구별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유동자본이란 계속적인 교환을 통해서만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본이고, 고정자본이란 소유주를 바꾸지 않고 수입이나 이윤을 가져다주는 물건이다. 유동자본의 예는 상인의 화물이나 화폐가 대표적이고, 고정자본의 예는 토지, 기계, 생산도구이다. 유동자본은 지출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하고, 고정자본은 보유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한다.농업자본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으로 나뉘는데, 고기를 팔기위해 사육하는 소는 유동자본이고, 일소(역축, 役畜)는 고정자본이다. 젖소가 생산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경북 성주가 예전에는 4대 사고(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 중 한 곳으로 성주목이 있었을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큰 도시였어요. 성 안에 군청이 있고 성 밖과 경계인 경산리에 우리집이 있었고요.” 6.25 당시 정한길 가톨릭농민회 회장의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경찰을 한 기억은 없고 농사짓던 모습만 기억난다고 한다. 당시 경찰을 했다고 하면 시골에서 ‘있는’ 집안이다. “초등학교 때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도련님, 하고 세숫물 떠다 주던 기억이 나요. 가마솥에
[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한국 농업의 현실은 2001년에도 암울했다. 2001년 1월 4일 발간된 본지 신년호 1면 ‘죽어가는 농업을 살립시다’
총선이 눈앞에 다가왔다. 또다시 예년과 같이 농민들은 농촌을 위해 그래도 무언가 할 수 있을 때라고 소박한 희망을 품고, TV나 언론 지상에서 보던 얼굴을 모처럼 보게 된다. 농촌을 위한 현란한 여러 약속도 조만간 농가 곳곳에 제시될 것이고.그러나 그런 희망에 차고 굳건한 약속은 지금까지 제대로 지켜진 바 없다. 선거철에 등장했던 약속은 늘 그렇듯 실현되지 않고, 다음 선거에서 조금 형태를 달리해 상투적으로 반복되어 유포된다. 이는 대부분의 공약이 실현되지 않고 끝난다는 점에서 총선이건 대선이건, 혹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리 차이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2018년 10월 어느 날 박형대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한테 연락이 왔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 인터뷰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도올 선생은 지난 대선 때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로 ‘풍요로운 농촌건설’을 주창했다. 농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사라지는 이때 당대의 석학이고 철학자인 도올 선생이 농업을 이야기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부터 도올 선생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인터뷰라니 너무 반가웠다.그런데 전남 장흥에서 농사짓는 박형
[한국농정신문 홍기원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본지는 2000년 11월 27일 첫 신문을 펴냈다. 본지의 첫 1면 톱기사 제목은 “이러다 농민 다 죽는다”였다. 당시
새해가 밝았다. 늘 같은 해와 달이 뜨고, 대개의 일상이 반복되며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365일을 주기로 하여 새로운 희망을 품고 다시 신발 끈을 매기 위해 새해의 소망을 가진다. 지난해의 아쉬움과 실망, 실패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본능이 아닌가 싶다.고령화되고 있는 농민들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의지를 가지고,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라는 감정을 유지했으면 한다. 여전히 우리농민과 농업, 농촌의 발전을 위해 생산현장과 정책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농민이 주체가 돼 농업·농촌문제를 스스로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1982년 3월 충북 음성군 금왕성당에선 신군부 전두환정권이 들어서고 최초의 대중 집회가 치러졌다. 전국의 농민 1,500여명이 모인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가 열린 것이다.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는 5.18광주민주항쟁 이후 최초의 대중집회이자 부당 농지세 시정을 촉구한 최초의 농민투쟁이다. 당시 농지세는 갑류농지세와 을류농지세로 나뉘었다. 갑류농지세는 벼를 생산하는 농지에 부과했고 을류농지세는 과수·특용작물·채소 등을 생산하는 농지에 부과했다.그런데 이 두 가지 농지세 모두 농민들이 부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