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경지역서 진보의 싹 틔우는 사람

이 사람ㅣ강원 철원 농민 김용빈씨

  • 입력 2020.04.19 18:00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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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중학교 때부터 농사짓기로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농고에 들어갔죠. 고등학교 졸업 후 군복무까지 마친 뒤 이곳 철원에 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철원에서 32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용빈 철원군농민회장 이야기이다. 김용빈 회장이 나고 자란 곳은 경기도 남양주 마석이다. “마석은 개발 붐이 일기 시작해서 장기적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농사지을 만한 곳을 찾아 이사를 하기로 했죠.”

김씨가 군에 있는 동안 김씨의 아버지가 여기저기 농사지을 곳을 물색했다고 한다. “아버지 고향이 지금은 이북 땅인 철원 위쪽 평강이예요. 내색은 안하시는데 그래서 이곳에 점수를 많이 준 거 같아요.” 김씨의 아버지는 실향민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을 나와 남양주에서 정착했다고 한다. 다시 이주를 하게 되면서 고향과 가까운 철원에 끌렸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북관계가 좋지 않아 전방지역인 철원 땅값이 싼 것도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였죠. 그리고 평야지대라 저수지도 잘 돼 있어 논농사하기도 좋아서 오기로 했지요.”

1988년 김용빈씨 가족 모두는 남양주 생활을 정리하고 철원으로 이주하게 됐다. 부모님과 할머니까지 다함께 철원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이즈음 김씨는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여기 와 보니까 또래 친구들이 많았어요. 대부분 군대 제대하고 뭔가를 모색하면서 집에 있는 친구들이라 통하는 것도 많았어요. 그들과 어울리며 재미있게 지냈지요.” 1980년대만 해도 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이 더러 남아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젊은이들이 집에서 농사를 도우며 장래를 계획했던 것이다.

철원에 와서 농사를 시작한 지 5년이 될 무렵 아버지는 살림을 아들에게 맡겼다. “농사지은 지 5년쯤 돼서 아버지가 통장을 넘겨주셨는데, 경영 등 모든 걸 책임지게 하신 거예요.” 평소에도 자신의 의견을 잘 들어주신 아버지는, 농사는 아들에게 맡기고 공사장 일을 다니셨다.

“아버지는 밖으로 일을 하러 다니셨어요. 그게 더 재밌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침에 일하러 가서 정해진 시간에 마치고 오는 걸 좋아하셨어요. 그러면서도 바쁠 때나 자질구레한 농사일은 도맡아 해주셨죠.” 김씨의 아버지는 일찍이 농사를 아들에게 넘겨주었지만 물꼬를 확인하는 일이나 논두렁 깎기 등 크고 작은 일을 도왔다. 김씨가 농사짓는 데 항상 큰 힘이 돼 주셨다.

김용빈 철원군농민회장이 철원 오대쌀로 만든 막걸리 ‘대작’ 공장 앞에서 농민회가 막걸리를 만들어 팔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김용빈 철원군농민회장이 철원 오대쌀로 만든 막걸리 ‘대작’ 공장 앞에서 농민회가 막걸리를 만들어 팔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동네일 열심히 하다 결혼까지

“여기 와서 동네일을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 보니 마을에서 청년회 총무도 맡게 됐죠.” 농촌사회는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로 움직인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공동체의 역할이 컸다. “그 당시에는 동네 사람들이 합심해서 잘 돌아갔어요. 동네잔치가 있으면 동네에서 같이 준비하고, 장례가 나면 마을에서 맡아서 다 치렀죠.”

농촌 마을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뭐니 뭐니 해도 마을주민들의 대소사를 함께 치르는 것이다. 청년 김용빈은 마을일에 적극 참여했다. 젊은 사람이 성실하게 일하고 마을일에도 내 일처럼 나서니까 동네 사람들도 좋게 봤다. “동네 어르신들이 저를 잘 보셔서 여러 번 중매가 들어왔어요. 지금 아내도 그때 소개를 받아 인연이 됐고 결혼을 하게 된 거죠.” 김씨는 1994년 동네 어르신들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성공했고 아이 셋을 낳아 살고 있다.

덜 쓰고 사는 게 삶의 지혜

언제쯤 농사로 기반을 잡았는지 물었다. 하지만 김씨는 기반을 잡았다고 생각된 적이 없단다. “항상 빚이 늘었다 줄었다하면서 지금까지 왔어요. 땅을 장만하고 나면 빚이 늘고, 몇 년 갚는가 싶으면 농기계 장만하고. 애들 키우는데 돈이 들어가고 애들 셋을 얼추 키웠다 싶으니까 트랙터가 고장이 났어요. 새로 사는데 9,000만원이 들어가는데 중고 트랙터 팔고 할인 좀 받고 해도 6,000만원 정도 들어가요. 또 빚이 시작되는 거죠.”

이것이 농민들의 일상이다. 시설 장비 등을 갖춰야 하기에 주기적으로 목돈을 들여 투자를 해야만 농사를 이어갈 수 있다. 그나마 안정적으로 빚을 갚고 얻고 할 수 있다면 다행인 것이다. 그래서 김씨의 좌우명은 ‘덜 쓰고 살자’다. “농사짓고 살면서 항상 생각하는 게 덜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쓰고 싶으면 더 벌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핸드폰 이런 것도 제일 나중에 사는 게 삶의 원칙이었어요.”

김씨는 이러한 생각에 검소하게 살면서 농사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김씨는 지금 부모님과 철원으로 이주하면서 아버지께서 마련한 5,000여 평의 땅과 김씨가 장만한 7,000여 평의 땅, 그리고 임차농지 8,000여 평까지 2만평 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다. “농지는 농어촌공사를 통해서 구입했어요. 매년 적금 넣듯이 땅값을 갚았지요.” 그런데 이제는 땅값이 올라서 땅을 더 사기도 어렵다고 한다.

“처음에 농사지으러 왔을 때는 농민들이 ‘쌀 계’를 많이 했어요. 1년에 쌀 5가마, 10가마, 20가마 등 10년 부으면 작은 논 한 자리씩 살 수 있었어요. 그 때 저도 쌀 계 타서 작은 땅 몇 자리 샀어요. 그런데 몇 년 지나니까 땅값이 급격히 올라서 계가 모두 없어졌어요. 금강산 개발 소문이 돌면 땅값이 배로 뛰고, 그러기를 몇 번 하면서 땅값이 너무 많이 올라서 농사지어서 땅을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해졌어요.” 2000년 이후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금강산으로 연결되는 경원선이 지나가는 곳이라 하여 땅값이 덩달아 올랐다.

농민회를 알게 되다

김씨가 철원에서 농사를 지은 지 10년이 채 안되던 어느 해 신기한 장면을 보게 됐다. 마을 형님네 마당에서 농약을 내려두고 옮기고 있었다. “농약은 농약방이나 농협에서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동네 형님 집 마당에 농약을 쌓아 놓고 나눠 가더라고요. 왜 그런지 궁금했어요.”

1990년대 초 농민회에서는 농자재 공동구매사업을 벌여왔다. 농협과 농약방에서 판매하는 농약이나 종자 가격이 비싸지만 농민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농민회에서 회원들을 중심으로 공동구매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도매상에서 농약이나 종자를 직접 구매해 농민들이 나눠썼다. 이러한 농민회의 농자재 공동구매사업으로 농협과 농약방에서 농자재를 판매하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철원군농민회에서도 당시에 농약 공동구매사업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농민회에서 농약 값이 비싸니 인하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안 들어 준거예요. 그래서 농민회에서 선 구매방식으로 도매상에서 직접 사온 거죠.” 농민회에서 농약을 공동구매해서 싸게 판매하니까 농약방에서는 난리가 났다. “농약방에서 신고를 했어요. 불법으로 농약을 취급했다고. 그런데 공동구매는 불법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농약방들이 농약 값을 내릴 수밖에 없었죠.”

이러한 경제사업(공동구매사업)은 1990년대 농민회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였다. 농민회의 경제사업은 규모는 작았지만 파급효과는 농약 또는 종자 가격을 낮춰 지역 농민들 모두에게 도움을 줄 만큼 역할을 해냈다. 이 때만 해도 김씨는 농민회에 가입하지 않아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다. 다음해에 마을에 농활을 받게 되면서 농민회에 대해 알게 됐다.

“마을에 농활이 들어와서 마을 형님들과 계획을 세우고 하면서 농민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김씨는 농활을 마치고 나서 자연스럽게 농민회와 교류하게 됐다. “겨울에 만나서 얘기 들어 보니까 전농에서 신입회원 교육을 한다는 거예요. 정읍에서 4박5일간 신입회원 교육을 했는데 철원에서 몇 명이 같이 갔어요.”

김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많은 교육을 다녔다. 지도소 교육, 4-H 교육, 농협 교육 등을 빠짐없이 다녔다. “교육을 가보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주는 거예요. 교육을 받으면서 그랬구나, 왜 그동안 농사지으면서 갑갑했나, 했는데 이게 이런 구조가 만든 결과구나, 하나씩 알게 됐어요. 세상이 보이더라고요.” 전농의 신입회원 교육은 청년 김용빈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게 했다. 농민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됐고, 이 사회 구조를 깨닫게 됐다. “인생을 성실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고, 착하게만 살면 되는지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보수적인 지역에서 순박한 청년이 농민회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김씨를 걱정하는 어른들이 있었다. “동네 어른 두 분이 보자고 해서 각각 만났는데 농민회하면 하는 일도 잘 안되고 탄압도 있을 거라면서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그 분들은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 말씀은 고마운데 내가 빠지면 누가 하냐고 했어요.”

그 때 김씨를 걱정해 주던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한 분은 나중에 농민회에서 같이 활동을 하고 있고, 또 다른 한 분은 아직도 김씨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농민회 활동으로 철원군농민회 사무국장, 전농 강원도연맹 사무처장, 정책위원장, 협동조합개혁위원장 그리고 현재 철원군농민회 회장 등의 중책을 맡으며 활동하고 있다.

선거에 두 번 나가다

김씨는 2006년 철원군수 선거와 2010년 철원군의원 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어요. 그런데 진보정당이 서울을 비롯해 도심 일부지역에서 알려지고 얘기도 되고 역할도 하고 있지만 철원에서는 택도 없는 소리였어요.” 보수적인 철원에서 민주당도 빨갱이 소리를 듣는데 진보정당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김씨는 직접 나가서 부딪쳤다.

“공개적으로 진보정당을 표방함으로 지역기반을 더 적극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거라고 봤어요. 그러면 보수적인 분들도 그 정도는 인정할거다 생각했죠.” 진보정당 후보로 출마한 선거로 성과도 있었다. “발언권이 생겼어요. 누굴 만나도 말할 수 있고, 진보정당의 후보로서 대표성을 인정받게 되었죠.” 선거결과는 5%득표였다. 1,000명의 지지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선거였다. “함께 고생했던 후배는 결과에 실망해 지역을 떠났지만 저는 우리를 지지하는 1,000명이 있다는 것에 엄청난 자신감이 생겼어요,”

4년 후 2010년 김씨는 군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군의원 선거는 당선이 가능할 것이라 기대했다. “군수는 안 되도 군의원은 맡겨줄 줄 알았죠. 그런데 똑같이 5%였어요.”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는 고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가 나면서 김씨는 한동안 은둔하게 됐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넌 어느 쪽이냐고 묻는 거예요. 이야기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어서 한동안 두문불출, 나가지도 않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어요.” 김씨는 이에 대해 결과적으로 통합진보당 사태가 진보정치에 뜻을 둔 여러 사람들을 좌절하게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철원쌀로 막걸리를 빚다

철원군농민회에서는 2년 전부터 철원 오대쌀로 ‘대작’이라는 막걸리를 만들고 있다. “오대쌀이 유명한데 항상 남는 게 문제예요. 값은 잘 받는데 농협이 투매를 하다 보니 시장이 어지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오대쌀 소비를 늘리는 방안을 고심하다가 막걸리를 만들게 됐어요.”

농민회원 중에 술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 오대쌀로 막걸리를 만들었는데 술맛도 괜찮았다고 한다. “농민회원들의 출자를 받아서 1년 이상 준비를 했어요. 공장을 직접 지어 생산할 수는 없어서 위탁방식으로 생산을 시작했죠. 우선 철원지역을 중심으로 공급하기로 하고 홍보했어요.”

농민회가 막걸리를 생산 판매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쌀 소비 촉진이라는 측면에서 술은 아주 좋은 소재다. 일본의 경우에도 쌀이 많이 나는 지역이 술도 유명하다. 일본의 쌀 주산지라고 할 수 있는 니가타현의 경우 사케가 유명한 것처럼. 이런 면에서 보면 철원군농민회에서 만든 오대쌀 막걸리는 지역의 상징성도 있고 쌀 소비 촉진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2년 정도 철원지역에서 홍보하고 공급하면서 지역에서는 ‘대작’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외부홍보도 시작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밥맛이 좋기로 유명한 오대쌀로 술을 담가 술맛 또한 좋은 막걸리,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좋아하는 상큼한 막걸리로 인정받는 것이 오대쌀 막걸리 ‘대작’의 목표라고 한다. 철원군농민회에서는 올해 설을 맞아 증류주도 출시했다. 고구려시대 때 철원의 지명이 모을동비(毛乙冬非)다. 그 이름을 따서 ‘모을동주’가 탄생했다. 설 선물세트로 400세트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철원군농민회에서는 20여 년 째 농민주유소를 운영해 지역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경제협동사업을 통해 지역의 농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이 뿐 아니라 김용빈 회장은 지역 내 다양한 모임을 만들고 참석하면서 철원지역의 진보적 인식을 높이고 있다.

철원의 독립운동과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과 ‘철원독립운동기념사회’를 만들어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 내 진보적 인사들과 함께 ‘깨어있는 시민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김용빈 회장은 특유의 유연함으로 보수성이 강한 철원에서 진보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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