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도련님에서 농민운동가로

이 사람ㅣ정한길 가톨릭농민회장

  • 입력 2020.02.23 18:00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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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경북 성주가 예전에는 4대 사고(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 중 한 곳으로 성주목이 있었을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큰 도시였어요. 성 안에 군청이 있고 성 밖과 경계인 경산리에 우리집이 있었고요.” 6.25 당시 정한길 가톨릭농민회 회장의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경찰을 한 기억은 없고 농사짓던 모습만 기억난다고 한다. 당시 경찰을 했다고 하면 시골에서 ‘있는’ 집안이다. “초등학교 때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도련님, 하고 세숫물 떠다 주던 기억이 나요. 가마솥에 소죽을 끓이는데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데워서 줬어요.”

정한길은 성주 부잣집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남달랐다. 5남매를 모두 대구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말쯤 대구로 전학을 갔어요. 아버지가 아이들 고생한다고 대구에 집도 한 채 사서 학교에 다니도록 했죠.” 또한 아버지는 남자들은 모든 걸 다 해야 한다면서 운동을 배우도록 했다. “중학교 들어가서 태권도를 했는데 사촌들하고 놀다 무릎이 심하게 꺾인 거예요. 그래서 중학교 졸업하고 1년 쉬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중학교 때 다친 무릎은 고등학교 들어가서도 낫질 않았다. 결국 고교 2학년 초에 성주농고로 전학을 왔다. “인문계 다니다 실업계에 오니까 교과 내용도 다르고 의욕도 없고 했는데 1, 2등하고 그랬어요.” 몸이 아파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자 성주에 내려왔고, 농고에 다니게 되면서 정한길 회장은 농민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농고를 졸업한 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에 가서 재수를 시작했다. 정한길 회장은 성량이 남다르다. “목소리 하나 믿고 기자나 아나운서 되겠다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실력이 없어서 그런지 잘 안 됐어요.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죠.”

경북 성주 가야산 자락에 터를 잡고 농민운동에 매진해온 정한길 가톨릭농민회장이 지난 18일 자신의 삶의 이력을 설명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경북 성주 가야산 자락에 터를 잡고 농민운동에 매진해온 정한길 가톨릭농민회장이 지난 18일 자신의 삶의 이력을 설명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청년 정한길, 농사를 시작하다

재수에 실패한 청년 정한길은 아버지 농장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아버지 농장도 있고 농고도 졸업했으니 자연스럽게 농사를 짓게 됐어요. 그런데 현재 농업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꽃 농사를 시작했어요.” 20대 초반 청년 정한길은 주위에서 또는 아버지가 하던 농사가 아닌 새로운 농사에 도전했다.

“과수원에 수확이 한창 많을 16년생 부사(사과)나무가 그득한데 이 나무를 베어 내고 하우스를 지었어요. 국화꽃 농사를 하려고 그랬죠.” 철부지 같은 어린 아들이 사과나무를 베어 내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지켜봐 주셨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묵묵한 응원이다.

성주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꽃 농사로 청년 정한길은 언론에 조명되기도 했고 지역에서는 선도 농민으로 알려졌다. “농사로 돈을 잘 벌지 못했는데 국화로 시작해서 시클라멘이라고 빨간 꽃, 화분도 하고 아이들 학습장, 경진대회, 학교와 연계해서 성공사례 공모도 했어요.” 청년 정한길은 농사뿐 아니라 꽃을 토대로 한 다양한 활동을 시도했다. 1980년대 청년 정한길이 의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집안 덕택이었다.

그런데 농사짓기 6~7년쯤 되면서 재산을 전부 처분해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형님이 사기를 당하고, 그 외 집안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치면서 재산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어요. 재산을 다 팔았는데도 부채가 3,000만원 남았어요. 돌도 안 된 애를 데리고 어디로 갈까 고민을 많이 했죠. 주위에서는 도시로 가라고 하고…. 그런데 성주를 벗어나면 두고두고 부모 욕되게 한다는 생각에 성주에 있기로 마음먹고 가야산 자락 천주교 공소가 있는 곳에 거처를 두기로 했어요.” 정한길 회장은 고교 졸업앨범을 만들면서 사진관 사장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가 천주교 공소가 있는 곳을 찾게 된 계기다.

천막서 시작한 산골생활

“성주군 가천면 용사리. 12개 자연부락을 끼고 있는 가야산 자락인데 여기서 고랭지꽃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터를 잡았어요. 농장을 임대해 천막을 쳤고, 돌도 안 지난 아이와 천식이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골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부자가 망해도 3년은 먹을 게 있다는 말이 있지만 정한길 회장은 실상 손에 쥔 게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며칠을 굶기도 하고 풀을 끓여 먹기도 했다. 자연도 생채기를 냈다. 태풍에 천막이 망가지고 도로가 쓸려 내려간 것도 부지기수다.

“들어간 첫해부터 태풍 피해를 입었어요. 태풍이 몰아치니까 순식간에 천막을 지탱하던 나무가 죽창처럼 방안을 뚫고 들어오더라고요.” 없는 살림에 자연재해까지 입자 생활고는 더 심해졌다.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복구를 해야 하는데 길이 완전히 유실된 거예요. 집사람은 애를 업고 30리 자갈밭길을 걸어서 가천면 면소재지 병원에 가고, 나는 40kg짜리 비닐을 지게에 지고 왔죠.”

산골생활의 어려움은 그뿐 아니었다. “두메산골에 전기도 없이 촛불을 켜고 사는데, 밤이면 뭇짐승들 울음소리에 겁 많은 집사람은 해 뜨면 무서워 못살겠다고 아이 업고 친정에 간다고도 여러 번 말했어요.” 산골의 삶은 하루하루가 고행이었다. “그 때는 희망이 별로 없었지만 모든 걸 털어버렸으니 오히려 천국 같았어요. 새벽부터 일하고 저녁에 가야산 풍경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도 그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가야산은 제2의 알프스라고 할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삶의 고달픔이 깊었어도 가야산은 정한길 회장에게 시름을 잊게 했다. 한해 두해 지나가면서 농사는 자리를 잡아갔다. “준산간 지역이니까 농사가 10월이면 끝나요. 안개꽃, 글라디올러스, 노란백합 등을 심었는데 하우스와 노지 사이에 출하해 가격이 좋았어요. 대구 칠성시장까지 오토바이로 한 시간 반 거리인데 하루에 두 번씩 꽃을 팔러 다녔거든요. 안개꽃은 지금도 한 단에 1,500원인데 그 때도 1,500원이었어요. 준고랭지라 가격도 좋다보니 두 번 다녀오면 땅을 500평 살 정도였어요.”

꽃 시세가 좋아도 정한길 회장은 땅 한 평 마련하지 못했다. 고향집을 정리하면서 떠안은 3,000만원 빚을 갚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맨주먹으로 산골에 들어가 남들이 안하는 준고랭지 꽃농사를 짓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농협 성주지부장이 우리 사는 곳까지 와서 도와주겠다고 했고, 크고 작은 도움을 참 많이 받았어요. 대만 교류도 가게 되고 각종 행사에 불려가 예우나 존중을 받기도 했죠. 농어민후계자도 되고,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 고향이 성주라 전두환이 성주에 오면 불려가기도 했어요. 그 때를 생각하면 권력 편에 서지 않고 산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정한길 회장은 우리밀살리기와 생협의 기반을 닦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승호 기자
정한길 회장은 우리밀살리기와 생협의 기반을 닦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승호 기자

우리밀 운동에 헌신

천주교 신자로서 천주교 공소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교회는 나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꽃을 수확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 공소에 봉헌을 했다. “미사를 할 때 꽃으로 꾸미는데 신앙은 있으나 미사에 참석하지는 못해 꽃으로 봉헌했어요. 산골 공소를 꽃으로 꾸며 놓은 것을 본 주임사제가 저를 찾아오셨죠.” 그 때 찾아온 신부가 환경운동의 선구자로 유명한 정홍규 신부다.

“꽃 한 단이 1,400원이던 시절이었는데, 골짜기 땅 한 평에 700원이었어요. 꽃 농사짓기에 더없이 좋은 시절이죠. 그런데 신부님께서 집사람한테 ‘집에 있는 장롱은 몇 년이면 바꾸냐’고 물었대요. 아내가 ‘한 10년이면 바꾸죠’ 라고 답했고요. 또 이어진 질문이 ‘남편하고 몇 년 살았냐’ 했다는 거예요. 그 말은 곧 나를 데리고 환경운동 하러 나가자는 이야기였어요.”

가톨릭농민회에서는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를 결성해 전국적으로 조직을 만들던 시기였다. 교구별로 운동본부를 만드는데 대구에 농민회가 없어서 실무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한길 회장에게 권유한 것이다. “그 당시도 삶의 기반이 탄탄한 건 아니었어요. 겨우 빚 갚음이나 하던 시절인데…. 신부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전망 있는 꽃 농사 싹 갈아엎고 우리밀살리기 대구경북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성주읍내에서 그리고 가야산 자락에서 농사에 전념하던 정한길 회장은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개인의 삶을 꾸려왔다면 이제부터 사회적 삶으로 걸음을 딛게 된 것이다. “대구에 가서 생협 만들고 일본에 왕래하면서 30년 앞선 밀 관련 자료를 얻어 왔어요. 필요한 부분들 번역해서 농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요.” 우리밀살리기운동을 하면서 밀이 살아났으니 소비도 늘려야 했다.

“과자나 라면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장류공장을 만들었어요. 집사람이 생산 책임을 맡았고요.” 본인뿐 아니라 아내도 우리밀살리기운동에 함께했다. 이뿐 아니었다. 생협을 만들어 놨으니 물건을 채워야 했다. 정한길 회장은 무상으로 물건을 공급했다. “내 돈으로 1억원은 쓴 느낌이에요. 두부를 만들어서 공급하고 콩나물 길러 공급하고, 대구에서 낙동강 페놀 사건이 터졌을 때는 샘을 파서 생수도 공급했어요.” 거의 무상으로 물품을 공급했다. 초창기 우리밀살리기와 생협의 기반을 닦기 위해 헌신, 또 헌신했다.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다

우리밀살리기운동을 하면서 가톨릭농민회와 인연이 닿은 정한길 회장은 우리밀살리기 대구경북 사무국장을 마치고 가톨릭농민회 전국본부 부회장을 5년간 맡았다. “전국 부회장 마치고 귀향했는데 전국 사무총장직을 청하는 거예요. 당시 물류를 중요시 하던 때이고 물류연합을 만들었는데 마땅한 책임자가 없다며 물류연합과 사무총장 겸직을 요청해서 맡게 됐어요.”

정한길 회장은 사무총장 2년을 하면서 싫은 소리도 참 많이 들었다고 한다. 물류연합을 이끌면서 농민들과 이해관계 충돌이 잦았고 이 모든 것을 끌고 가는 사무총장은 필연적으로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정한길 회장은 가톨릭농민회에서 특이한 이력이 하나 있다. 대구교구 소속인데 안동교구 회장을 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원래 속지주의예요. 지역사람이 지역의 회장을 맡아야 하는 거죠. 그런데 안동교구가 커지면서 마땅히 이끌고 갈 사람이 없다고 제안이 온 겁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안동교구 주교님께서 큰 결심을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안동으로 교적을 옮기고 5년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회장을 맡게 된 거죠.”

많은 사람들이 정한길 회장을 안동 사람으로 알고 있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안동교구 회장 시절 백남기 농민투쟁이 일어났다. 백남기 농민투쟁 이후 정한길 회장은 가톨릭농민회 회장으로 나서게 됐다.

헌신적인 아내

정한길 회장은 10년 남짓 개인의 삶을 살았고 나머지는 운동가로 살아왔다. 아내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사람이 원래 성주 부잣집 딸이에요. 그런데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고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어요. 근데 일을 참 잘해요. 나하고 손발이 잘 맞아서 같이 일을 하면 다섯 사람 몫을 해요. 내가 밖에 돌아다니며 활동할 때 집안일은 아내가 다 한 거죠. 농사일뿐 아니라 대구에서 생협을 만들었을 때 두부, 콩나물 등 생협에 팔 물건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해요.”

정한길 회장의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정 회장 집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년 365일 중 300일은 손님이 왔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뒹굴 정도였는데 그 뒤치다꺼리를 아내가 다 했어요.” 풍광이 좋아서 집을 찾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겨울이 되면 가야산 7부 능선 위에는 눈이 있고 그 밑에는 소나무가 푸르른 광경이 펼쳐져요. 전에 로마 바티칸 대사가 공관장 회의를 하러 나오면 꼭 우리집에 와서 하루 자고 갔어요.”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정한길 회장 집을 찾았다. 지금도 정한길 회장 집에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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