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l 분단 56년 만에 열린 남북 농민대잔치

  • 입력 2020.04.05 18:00
  • 수정 2020.04.05 20:59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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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한국농정>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본지 2001년 7월 26일 자 1면에 실린 ‘6.15 공동선언 관철을 위한 남북농민통일대회' 기사. 남북농민통일대회는 2001년 7월 18~19일에 걸쳐 금강산에서 열린, 분단 56년 만의 첫 남북 농민대잔치였다. 한승호 기자
본지 2001년 7월 26일 자 1면에 실린 ‘6.15 공동선언 관철을 위한 남북농민통일대회' 기사. 남북농민통일대회는 2001년 7월 18~19일에 걸쳐 금강산에서 열린, 분단 56년 만의 첫 남북 농민대잔치였다. 한승호 기자

한반도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남북 농민들도 2000년 6.15 공동선언을 환희 속에서 맞이했다. 6.15 공동선언은 통일농업 실현 가능성을 그 어느 때보다도 높였다. 농민들은 평화통일을 위해 우선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민간교류 물꼬를 틔우기 위해 노력했다. ‘통일준비 농업’을 사시(社是)로 내건 본지 또한 지난 20년간 통일농업을 위한 농민들의 노력을 소개해 왔다.

금강산 남북농민통일대회 성사

2001년 7월 18~19일, 분단 56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 농민들이 어우러져 한마당 잔치를 벌였다. 남측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북측의 조선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이 합동으로 금강산에서 개최한 ‘6.15공동선언 관철을 위한 남북농민통일대회’에 1,300여명의 남북 농민들이 모였던 것이다.

사실 남북농민대회 성사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한반도 전역의 극심한 가뭄 때문에 남북농민대회는 두 차례나 연기됐다. 행사 연기로 부득이하게 금강산 가는 여객선 이용계약을 취소하는 과정에서 현대그룹이 계약금 반환을 거부해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당시 전농은 “현대는 농민들 돈으로 장사하려는 속셈이냐”고 비판했다.

우여곡절 끝에 행사는 7월 18~19일로 연기됐다. 행사 진행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금강산 관광을 관리하던 현대 측이 호텔을 숙소로 제공하지 않아 농민들은 컨테이너에서 숙박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만남의 기쁨은 컸다. 남북 농민들은 씨름과 윷놀이, 줄다리기 등의 민속놀이와 오락경기를 함께 했을 뿐 아니라, 농업 관련 현안과 가뭄으로 인한 고민을 공유했다. 남북이 통일해야 농업·농촌·농민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는 데도 인식을 같이했다.

7월 19일 폐막식에서 남북 농민들은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통일연대조직 결성을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이 약속은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농민연대모임’ 결성으로 실현됐다.

본지도 당시 금강산 현장으로 가 분단 후 첫 남북 농민들의 만남을 생생히 전했다. 대회장에서 본지와 인터뷰한 북측 김명철 농근맹 부위원장은 “6.15 공동선언 관철을 위해선 한민족 한핏줄인 북과 남 농민들의 마음이 합쳐져야 한다”며 “이번 대회는 북과 남의 농민들이 통일을 위해 연대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소감을 밝혔다.

노동자·학생·학부모도 동참한 ‘못자리 비닐보내기운동’

북녘 못자리용 비닐보내기운동을 소개한 본지 2001년 2월 15일 자 기사. 당시 농민 뿐 아니라 민주노총 노동자들, 한총련 학생들도 비닐보내기운동에 동참했다. 한승호 기자
북녘 못자리용 비닐보내기운동을 소개한 본지 2001년 2월 15일 자 기사. 당시 농민 뿐 아니라 민주노총 노동자들, 한총련 학생들도 비닐보내기운동에 동참했다. 한승호 기자

 

남북농민대회에 앞선 2001년 초 이뤄진 ‘북녘 못자리용 비닐보내기운동’ 또한 6.15 시대 남북농업교류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였다.

북은 2000년대 초반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못자리용 비닐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이에 남측의 50여개 시민사회단체들은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북녘 못자리용 비닐보내기운동본부’를 구성, 2001년 2월 1일~3월 10일에 걸쳐 못자리용 비닐 확보를 위한 모금운동을 진행했다.

본지 2001년 2월 15일자 기사 <눈물겨운 북녘 못자리 비닐보내기운동 - 폐품·공병 모으고, 품삯까지 선뜻>은 못자리용 비닐보내기운동이 농민조직 뿐 아니라 노동자, 대학생, 교수들까지 동참한 거국적 운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민주노총은 IMF 위기 이후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1단위 노조 1개 비닐보내기운동’을 진행했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또한 ‘1과 1개 비닐보내기운동’을 벌였다. 대학교수와 학부모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농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예컨대 전농 강원도연맹은 2001년 2월 한 달 동안 비닐보내기 모금을 위한 폐품·공병 모으기 운동을 진행했다. 각 면 지회별로 농민들이 결의해 트럭 한 대씩 각 마을을 돌며 폐품과 공병을 모아 모금운동을 벌였다. 전남 나주시농민회에선 청년농민 6명이 이틀 동안 배 절지작업을 해 벌었던 품삯 72만원을 쾌척해 화제가 됐다.

못자리용 비닐보내기운동은 성공리에 진행돼, 2001년 3월 6일 인천항에서 북의 남포항으로 200톤의 비닐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비닐보내기운동본부 대표자들이 방북하는 걸 가로막았다. 전농은 당시 성명에서 “(비닐보내기운동본부가) 통일부에 방북승인신청을 내는 등 수차례에 걸쳐 방북허가를 촉구했지만, 통일부가 모든 책임을 선박회사로 돌리며 결국 불허했다”고 비판했다.

2001년 3월 6일 인천항에서 열린 북녘 못자리용 비닐 출항식 당시 고(故) 오종렬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의장(오른쪽)이 통일기원 제례를 지내고 있다. 가운데 인물은 박흥식 전농 전북도연맹 사무처장(현 전농 의장). 한승호 기자
2001년 3월 6일 인천항에서 열린 북녘 못자리용 비닐 출항식 당시 고(故) 오종렬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의장(오른쪽)이 통일기원 제례를 지내고 있다. 가운데 인물은 박흥식 전농 전북도연맹 사무처장(현 전농 의장). 한승호 기자

남북 농민들,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는 남북농업교류에 있어 적어도 지금보단 나았다. 2001년 김대중정부는 전농 등 농민단체들의 주장에 따라 대북 쌀 지원을 진행했고, 정부와 농협중앙회가 공동으로 북에 사과 4,000톤, 배 3,000톤, 감자 5,000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이명박·박근혜정부의 반북대결주의 정책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남북 농민교류도 중단됐다. 촛불항쟁 뒤 문재인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남북 농업교류는커녕 남북 농민들이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전농은 지난해 북에 ‘통일트랙터’를 보내기 위한 운동을 벌이며 여전히 엄혹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만들고자 했다.

비록 정세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엄혹하지만, 평화통일을 위한 농민들의 노력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하루빨리 다시 남북 농민들이 모여 대잔치를 여는 그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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