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회 안했으면 바보로 살았을 거야”
“농민회 안했으면 바보로 살았을 거야”
  • 심증식 기자
  • 승인 2019.12.22 22: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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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ㅣ 진주 농민 하해룡씨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1982년 3월 충북 음성군 금왕성당에선 신군부 전두환정권이 들어서고 최초의 대중 집회가 치러졌다. 전국의 농민 1,500여명이 모인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가 열린 것이다.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는 5.18광주민주항쟁 이후 최초의 대중집회이자 부당 농지세 시정을 촉구한 최초의 농민투쟁이다. 당시 농지세는 갑류농지세와 을류농지세로 나뉘었다. 갑류농지세는 벼를 생산하는 농지에 부과했고 을류농지세는 과수·특용작물·채소 등을 생산하는 농지에 부과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농지세 모두 농민들이 부담하기에 지나치게 많았다. 조세형평에도 맞지 않아 그야말로 농민수탈용 세금이었다. 갑류농지세의 경우 기초공제액이 1982년도 기준 115만원인데 도시근로자의 종합소득 기초공제액은 290만원으로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또 종합소득세의 경우 배우자 공제와 같은 여러 가지 공제 혜택이 있었지만 농지세에는 공제혜택이 전혀 없었다. 을류농지세 역시 갑류농지세와 같아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나라에서 세금내라면 당연히 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순박한 농민들에게 당시 가톨릭농민회의 부당 농지세 시정운동은 충격 그 자체였다.

1981년 어느 날, 경남 진주시와 통합되기 전 진양군에 사는 농민 하해룡씨는 한동네 사는 농민인 정현찬(이후에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가톨릭농민회 회장 역임)씨를 따라 가톨릭농민회 진양분회 모임에 나갔다. “을류농지세가 내무부령으로 정해 놓은 인정과세로 소득이 얼마니까 세금 얼마 내라 하면 꼼짝 못하던 시절인 거라. 농민회에 가서 이야기 들어 보니 부당한 일이란 걸 알게 된 거지. 그렇게 농민들이 당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야말로 초근목피하며 농사짓고 살던 농민 하해룡씨는 30대 후반에 가톨릭농민회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알게 되고 농민운동의 길을 걷게 됐다.

농민회 활동을 통해 약자와 함께 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온 하해룡씨가 지나간 삶의 궤적을 회상하며 미소 짓고 있다.
농민회 활동을 통해 약자와 함께 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온 하해룡씨가 지나간 삶의 궤적을 회상하며 미소 짓고 있다.

보릿대 먹어야 땅을 사는 세월

“할아버지 대에 이곳 금산(면)으로 왔어. 여기에 할아버지 외가가 있었거든. 외가 그늘로 온 거지.” 그의 집안은 원래 진주 금곡면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다고 한다. 살기 어려운 시절 좀 형편이 나은 외가 근처로 왔다. “어릴 때 이 동네 사람들 대부분 못살았어. 내 동기들도 초등학교 나오고 70%가 중학교를 못 갔을 정도야. 초등학교 졸업하고 부모님 도와 농사를 지었지.” 농사지을 땅 구하기도 어려웠고 농사를 지어도 장마 때마다 침수가 돼 수확이 거의 없었다. “여기가 남강 아래 지역이라 매년 수침이 되는 기라. 10년에 한 번 정도나 수침 피해가 없을 뿐 매년 작물이 수침되니 수확을 못할 수밖에. 그래도 혹시나 하고 농사를 짓는 거지. 수침 안 되는 땅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그런 땅을 구할 수가 있나.”

침수되는 땅에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곡식 대신 풀 먹고 살았어. 배가 고파서 보릿대를 볶아서 먹었지. 보릿대는 곡식이 달렸던 거라 먹어도 괜찮다고 했어. 그 시절에 보릿대 먹은 사람은 땅 마련하고, 보릿대 맛없다고 못 먹은 사람은 땅 팔아먹었다고 했어. 보릿대를 못 먹어서 장리쌀 먹으면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보릿고개 시절 장리쌀로 보리 한 됫박을 먹으면 한 달 뒤 보리 수확을 할 때는 한 되 반을 갚아야 했다. 불과 한 달 사이 이자가 50%나 된다. 그러니 가난한 농민들이 가난을 벗어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반대로 부자들은 고리의 이자로 부를 축척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죽기 아니면 살기 그런 마음으로 살았어. 1968년 군대 제대하고 오니까 남강댐이 만들어졌더라고. 그 뒤부터는 수침 피해가 없어지면서 농사를 지어 소득이 생기기 시작했지.”

하우스 농사로 기반을 쌓다

남강댐이 만들어지면서 장마철 하천 범람으로 인한 침수 피해가 사라졌다. 남강 하류 농민들의 삶이 비로소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우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씨도 1970년도부터 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온상(비닐하우스) 지어 참외농사를 시작했어. 대나무를 양쪽에서 꽂아 구부려 가운데 묶고 비닐을 씌워서 온상을 만들었지. 처음에는 폭 5m 길이 100m 짜리 한 동으로 시작했어.” 그 당시는 철제하우스가 보급되기 전이라 대나무로 하우스를 지어 농사를 지었다. “5년 정도 온상을 하면서 식량문제가 해결됐지. 1980년대 쯤 돼서 우리 동네 대부분이 굶지 않고 살았던 것 같아.”

금곡면에서 절대적 빈곤이 사라지게 된 결정적 역할은 남강댐 건설로 침수피해가 사라지고 하우스 농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한 동으로 시작해서 계속 늘렸어. 나중엔 사람을 써서 할 정도로 규모를 키웠지. 참외 값이 최고로 비쌀 때는 참외 1상자면 한 사람을 쓸 수 있을 정도였어.” 이때가 우리나라 하우스 농사 초기라 하우스에서 재배한 참외는 노지보다 일찍 출하해 가격이 높았다. “참외농사하면서 땅도 제법 샀어. 1990년대 중반까지 5,000평정도 농지를 구입했지. 옛날 어른들이 논밭 큰 거 있으면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했잖아. 농사꾼한테 그만큼 땅이 중요하다는 말이겠지.” 그는 참외농사로 삶의 기반을 쌓았다. 물론 하우스 농사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85년 겨울이었는데, 모종을 키우는 하우스에 열풍기를 새로 들여놨어. 12월 8일 그날 동네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거든. 일요일 아침에 동생한테 하우스에 가보라 했더니 하우스 온도가 5℃라는 거야. 5℃면 냉해를 입는 온도거든. 동네에서 열풍기 산 사람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불러 모아서 서울 온풍기 회사로 몰려가 막 따졌지. 그리고 진주에 데리고 내려와 경찰서에 가서 사기죄로 고소하고.” 열풍기를 판매한 지역 농약방에서 과대광고를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비닐 두세 겹을 덮고 열풍기를 돌려봐야 야간에는 보온이 되지 않기 때문에 온도가 오를 리 없었다. 기온이 낮아지면서 열풍기는 열효율이 떨어졌고 결국 작물에 냉해가 온 것이다. “그런데 진주경찰서에서 우리가 열풍기 값을 20%만 냈기 때문에 사기가 아니라는 거야. 그래서 열풍기 잔금을 안주는 것으로 끝을 냈어. 250만원짜리 열풍기를 결국 50만원에 산 셈이지.”

피망고추 불량종자 투쟁

농민운동 역사상 종자문제로 보상을 받은 초유의 사례가 있다. 1984년 흥농종묘 피망고추 투쟁이다. 진주에서 하우스 농사를 짓는 농민들 중에는 피망고추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많았다. 대부분 일본의 종자로 재배했다. 당시 흥농종묘가 ‘월계관’이라는 이름으로 피망고추 종자를 출시했다. 과가 크고 병충해에도 강하다고 대대적인 광고를 했다. “그런데 막상 수확하고 보니 피망 고추가 너무 작은 거야. 여러 개 놓아야 일제 피망과 크기가 같을 정도로. 사람들이 오바(코트) 단추라고 부를 정도였어.”

주먹만 해야 할 피망고추가 오버코트 단추만 했다는 이야기다. 피망고추를 재배한 농민들 중에는 가톨릭농민회 회원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농민회 진양분회에서 앞장섰다. “피해 농가가 110농가였어. 가톨릭농민회에서 피해농가들을 모아 놓고 흥농종묘에 가서 투쟁을 하자고 한기라. 면적당 얼마씩 돈을 걷어 경비도 스스로 마련하고, 버스 3대를 불러서 금산면에서 출발해서 가는데 삼거리에서 경찰들이 길을 막고 있더라고.” 불량종자 투쟁을 위해 상경하던 버스는 면소재지를 채 벗어나지도 못하고 경찰에 막혔다. “메구(풍물)치고 사람들 데리고 고속터미널로 가다가 또 막혔어. 전부 군청 차에 타게 하더니 집에 내려놓는 기라.” 결국 농민들은 밤에 흩어져서 각자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서초동 흥농종묘 앞에서 날이 부옇게 되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기라. 110개 피해농가 중 104명이 모였어.” 흥농종묘에 모인 농민들은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장에는 문익환 목사도 다녀가고 학생들도 지원을 나왔다. 그렇게 11일간의 농성 끝에 하우스 한 동에 100만원씩 보상을 받았다. “흥농에서는 보상금이라고 안하고 위로금이라고, 하우스 한 동당 100만원을 쳐서 줬어. 가농은 보상금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피해 농민들끼리 배분하라고 손을 딱 뗐지.” 좀 더 투쟁을 했으면 더 많은 보상금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농성기간 중 경찰의 회유에 농민들이 한두 명 씩 귀가하면서 11일 만에 합의를 하고 투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씨는 당시 피해농민도 아니고 가톨릭농민회 진양분회 임원도 아니었다. 그저 일반회원에 불과했지만 농민들 투쟁에 끝까지 함께 했다. “단식농성을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더러 중간에 나서서 뭘 먹고 오기도 했지만 나는 끝까지 단식을 했어.”

농민회장 그리고 가슴 아픈 사연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타결되면서 1995년부터 WTO가 출범하고 새로운 무역질서가 세워졌다. 농산물개방이 시작된 것이다. 농민들은 UR 반대투쟁에 나섰다. 1994년 하씨는 진양군농민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2월 1일 서울에서는 UR 재협상 쟁취, 국회비준거부와 농정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전국에서 농민들이 화물 차량을 끌고 서울로 집결하기로 했다. “진주에서 트럭 40대가 고속도로를 이용해 상경한기라. 그날 아침에 비가 왔어. 죽암휴게소에서 점심을 막 먹기 시작하는데 함양에서 사고가 나서 한 사람은 현장에서 죽고, 한 사람은 대학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중태라는 소식을 듣게 된 거지.”

이날 진주농민회 대다수 회원들은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진주농민회 손구룡 부장과 경남도연맹 김순복 간사는 함양 쪽 도로를 이용했다. 새벽에 내린 비가 음지쪽에는 빙판으로 변해있었다. “도로가 얼어서 핸들이 말을 안들은 거야. 미끄러져 나무에 들이받았다고 하더라고. 그때 다 같이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지도자가 잘못하면 손발이 고되다고, 내가 그 당시 지도자로써 책임이 가볍지 않아.” 하씨는 젊은 활동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자책감에 눈시울을 붉혔다.

“진주 시내에서 장례식을 크게 치렀어. 추모기금도 많이 모여서 추모관도 마련했지. 그리고 매년 2월 1일에는 추모제를 지내고 있어.” 1981년 가톨릭농민회 진양분회에 참여하면서 농민운동을 시작한 하씨는 40년 가까이 농민운동을 하면서 가장 가슴 아프고 자책감을 갖는 일이 바로 1994년 두 젊은 활동가의 죽음이라고 회고했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 남 줄 게 없어”

하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평생 새벽에 일어나서 일했어. 그래야 농민회 활동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가 초근목피하며 살다가 오늘의 기반을 만들어 놓은 원동력은 부지런함과 검소함이다. 특히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진주에 지금 화투 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나도 옛날엔 재미삼아 화투를 했는데 농민운동 3년 해보니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198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에는 화투가 만연돼 있었다. 그러나 농민운동가들은 화투와 같은 노름을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씨 역시 엄격한 자기 관리로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다. “일도 남보다 늦게 마치고 성실히 해야 집회도 제대로 가고 농사에 지장이 없지. 늦게까지 자고 먹을 거 다 먹으면 무슨 활동을 하나.” 하씨가 일생동안 실천했던 자신만의 지침이다. “주위로부터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으려면 착한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농민회 활동하면서 많이 배웠어. 농민회 하지 않았으면 바보로 살았을 거야.” 하씨는 농민회 활동을 통해 약자와 함께 하고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도 배우고, 정치·경제·사회에 대해 눈을 떴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서울서 하는 농민대회에도 참석했지. 정철균(진주시농민회 사무국장)이가 가자고 전화를 했어. 두말 안하고 간다고 했지. 안갈 이유를 대라면 백가지도 댈 수 있는데, 지금도 오라고 하면 좋아. 젊은 사람들 하는 거 힘 보태주고 대회에 가면 동지들도 만나서 좋고.”

일흔넷의 하해룡씨는 청춘시절 배운 삶의 자세를 한 치의 빈틈없이 실천하면서 좋은 세상은 그저 오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농민’이라는 자부심으로 들녘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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