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역사에서 1, 2차 세계대전의 혼란은 세계질서를 종종 전전과 전후로 나누게 하는 역할을 해 왔다. 시대적 혼란이 새로운 사회 변화를 촉발하고 새로운 사회 문화와 체제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동안 생산성과 효율을 위한 무한 경쟁 속에 노동시장 유연화 등으로 생태계 파괴와 양극화를 불러온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 다음 시대의 가치가 무엇이 돼야 하는지는 근대사회의 한계를 고민해 온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다.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신자유주의 이후에 우리 사회를 이어갈 새로운 사회적 가치로서 생명을 제시한다. 또 사재기의 첫 대상이
어린이나 학생을 둔 부모님들은 요즘 많은 걱정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든 국민들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 뿐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코로나19로 인한 특수한 상황이니 어느 누구를 탓 할 수도 없는 일이라 더욱 답답한 노릇이다.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모든 학생들이 이렇듯 학교 가기를 바란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등교를 바라고 있다.북녘의 동포들은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러 가지 불분명한 소식통에 따르는 무분별한 보도가 간간이 있기는 하지만, 북측 당국의 공식적인 발표는 아직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올해 초, 새로 시행되는 공익형직불제와 연동될 ‘양곡관리법’의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으로 농정 당국은 신곡
세계무역기구(WTO)는 코로나19로 세계무역량이 더 축소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있고, 이 추세는 거스를 수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각 나라는 식량 재고와 식량안보에 불안해하며 수출을 중단하거나 식량수입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아시아무역센터(ATC)는 예상하고 있다. 통상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침체된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무역장벽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자유무역의 기수였던 미국을 위시해 세계 각국은 내수 부양책을 우선시할 것이므로 자유무역의 기조는 쇠퇴할 것으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중학교 때부터 농사짓기로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농고에 들어갔죠. 고등학교 졸업 후 군복무까지 마친 뒤 이곳 철원에 와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철원에서 32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용빈 철원군농민회장 이야기이다. 김용빈 회장이 나고 자란 곳은 경기도 남양주 마석이다. “마석은 개발 붐이 일기 시작해서 장기적으로 농사를 짓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농사지을 만한 곳을 찾아 이사를 하기로 했죠.”김씨가 군에 있는 동안 김씨의 아버지가 여기저기 농사지을 곳을 물색했다고 한다. “아버지 고향이
[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한반도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남북 농민들도 2000년 6.15 공동선언을 환희 속에서 맞이했다. 6.15 공동
2019년 우리나라 농업총생산액은 50조4,280억원으로 추정되며, 농산물을 생산하는 재배업의 경우는 30조7,050억원으로 추정된다. 과거와 달리 농산물의 생산은 대부분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농산물 생산자 가격이 생산비를 보장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해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배추 가격이 전년대비 53.1%나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무와 양파 등 많은 채소 품목들의 가격도 연이어 폭락했다. 이로 인해 농업인과 산지유통인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본지가 창간한 2000년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의 여파가 휘몰아치고 FTA라는 새로운 폭탄이 태동한 시기였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으로 구별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유동자본이란 계속적인 교환을 통해서만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본이고, 고정자본이란 소유주를 바꾸지 않고 수입이나 이윤을 가져다주는 물건이다. 유동자본의 예는 상인의 화물이나 화폐가 대표적이고, 고정자본의 예는 토지, 기계, 생산도구이다. 유동자본은 지출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하고, 고정자본은 보유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한다.농업자본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으로 나뉘는데, 고기를 팔기위해 사육하는 소는 유동자본이고, 일소(역축, 役畜)는 고정자본이다. 젖소가 생산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경북 성주가 예전에는 4대 사고(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곳) 중 한 곳으로 성주목이 있었을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큰 도시였어요. 성 안에 군청이 있고 성 밖과 경계인 경산리에 우리집이 있었고요.” 6.25 당시 정한길 가톨릭농민회 회장의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경찰을 한 기억은 없고 농사짓던 모습만 기억난다고 한다. 당시 경찰을 했다고 하면 시골에서 ‘있는’ 집안이다. “초등학교 때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도련님, 하고 세숫물 떠다 주던 기억이 나요. 가마솥에
[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한국 농업의 현실은 2001년에도 암울했다. 2001년 1월 4일 발간된 본지 신년호 1면 ‘죽어가는 농업을 살립시다’
총선이 눈앞에 다가왔다. 또다시 예년과 같이 농민들은 농촌을 위해 그래도 무언가 할 수 있을 때라고 소박한 희망을 품고, TV나 언론 지상에서 보던 얼굴을 모처럼 보게 된다. 농촌을 위한 현란한 여러 약속도 조만간 농가 곳곳에 제시될 것이고.그러나 그런 희망에 차고 굳건한 약속은 지금까지 제대로 지켜진 바 없다. 선거철에 등장했던 약속은 늘 그렇듯 실현되지 않고, 다음 선거에서 조금 형태를 달리해 상투적으로 반복되어 유포된다. 이는 대부분의 공약이 실현되지 않고 끝난다는 점에서 총선이건 대선이건, 혹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리 차이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2018년 10월 어느 날 박형대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한테 연락이 왔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 인터뷰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도올 선생은 지난 대선 때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로 ‘풍요로운 농촌건설’을 주창했다. 농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사라지는 이때 당대의 석학이고 철학자인 도올 선생이 농업을 이야기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전부터 도올 선생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인터뷰라니 너무 반가웠다.그런데 전남 장흥에서 농사짓는 박형
[한국농정신문 홍기원 기자]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본지는 2000년 11월 27일 첫 신문을 펴냈다. 본지의 첫 1면 톱기사 제목은 “이러다 농민 다 죽는다”였다. 당시
새해가 밝았다. 늘 같은 해와 달이 뜨고, 대개의 일상이 반복되며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365일을 주기로 하여 새로운 희망을 품고 다시 신발 끈을 매기 위해 새해의 소망을 가진다. 지난해의 아쉬움과 실망, 실패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본능이 아닌가 싶다.고령화되고 있는 농민들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의지를 가지고,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라는 감정을 유지했으면 한다. 여전히 우리농민과 농업, 농촌의 발전을 위해 생산현장과 정책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농민이 주체가 돼 농업·농촌문제를 스스로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1982년 3월 충북 음성군 금왕성당에선 신군부 전두환정권이 들어서고 최초의 대중 집회가 치러졌다. 전국의 농민 1,500여명이 모인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가 열린 것이다. 부당 농지세 시정 농민대회는 5.18광주민주항쟁 이후 최초의 대중집회이자 부당 농지세 시정을 촉구한 최초의 농민투쟁이다. 당시 농지세는 갑류농지세와 을류농지세로 나뉘었다. 갑류농지세는 벼를 생산하는 농지에 부과했고 을류농지세는 과수·특용작물·채소 등을 생산하는 농지에 부과했다.그런데 이 두 가지 농지세 모두 농민들이 부담하기
책꽂이에 유난히 눈에 띄는 책이 한 권 꽂혀 있다. 전남 순천시 문해교실 할머니들의 자서전을 구술한 책이다. 책의 제목은 ‘내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더냐’였다. 제목부터 참으로 맛깔스러웠다.지난 30년 동안 여성농민운동은 투쟁의 자양분은 풍부했지만 여성농민들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고 홍보하는 일은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책을 보면서 우리는 인생을 알고 있을까? 모든 회원들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가야할 목표지점을 인식하고 함께 걸어가고 있을까? 많은 질문을 던진다.전여농 30년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1950년대 초 어느 여름날이다. 초등학교 5학년 임봉재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보리밥 소쿠리를 찾았다. “그때는 보리밥도 간신히 먹을 때였어요. 여름에는 소쿠리에 보리밥을 담아 처마 밑에 두고 학교 마치면 그걸 꺼내서 점심으로 먹었죠. 그런데 그날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부엌에 가서 가마솥 뚜껑을 열어봐도 뭐가 없더라고요. 방안에 계신 어머니가 인기척을 듣고는 모기소리로 ‘봉재야 봉재야’ 하고 부르셨어요.”방문을 열어 보니 어머니 혼자 아이를 낳으셨다. “어머니가 물 한 그릇 달라고 하시는
언니네텃밭, 왜 언니일까? 누나가 아니고. 예로부터 의좋은 형제 얘기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의좋은 자매 얘기는 찾기가 어렵다. 심지어 심리학에서는 여성들끼리 갖는 일반적인 감정을 질투로 분석하기도 한다.그러나 언니라는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언니는 여성들끼리 나누는 연대애이고 자매애이다. 언니는 언니들이 짓는 농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언니들끼리 주고받는 살림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주체들끼리의 관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의미로 텃밭은 말 그대로 살림(먹거리)의 밑천이다. 텃밭이 있어 밥상
또다시 국익이란 미명에 제물이 된 농업우리 농업은 WTO라는 틀 안에서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라는 보조장치에 의지해 휘청거리면서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해왔듯이 국익이란 미명 하에 또 다시 이 땅의 농업을 제물로 삼은 것이다. 역대 정부들은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누구를 위한 국익인지도 모르는 국익을 위해 농업을 희생해 왔다.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수출이 중요하다고, 수출을 위해서는 농업이라는 곶감을 뭉텅뭉텅 빼 줘가며 거래를 해왔고 국익을 위한 거라고 했다. 그들에겐 세계 시장이라는 무한한 경제 영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