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운동의 씨앗을 뿌리다
여성농민운동의 씨앗을 뿌리다
  • 심증식 기자
  • 승인 2019.11.24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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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ㅣ경남 산청 임봉재씨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1950년대 초 어느 여름날이다. 초등학교 5학년 임봉재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보리밥 소쿠리를 찾았다. “그때는 보리밥도 간신히 먹을 때였어요. 여름에는 소쿠리에 보리밥을 담아 처마 밑에 두고 학교 마치면 그걸 꺼내서 점심으로 먹었죠. 그런데 그날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부엌에 가서 가마솥 뚜껑을 열어봐도 뭐가 없더라고요. 방안에 계신 어머니가 인기척을 듣고는 모기소리로 ‘봉재야 봉재야’ 하고 부르셨어요.”

방문을 열어 보니 어머니 혼자 아이를 낳으셨다. “어머니가 물 한 그릇 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임봉재는 어머니께 찬물 한 바가지 떠 드리고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할머니는 이웃에 사는 고모집에 계셨다. “조모, 조모, 엄마가 애기를 낳았어요. 그랬더니 할머니께서 ‘잘난 지지배 낳아 놓고 자랑한다’ 퉁명스레 한마디 하셨어요. 어린 나이지만 이 말을 들으니 화가 나고 슬펐죠.” 임봉재는 고모집을 나와 외할머니집으로 뛰어갔다. “외할머니는 이미 준비를 하고 계셨어요. 어머니가 애기를 낳았다고 하니까 제 말을 듣자마자 미역하고 쌀을 챙겨서 나섰고요.” 딸에 대한 차별은 이 뿐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딸들이 집에서 소리 내서 웃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학교에 가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지만 집안의 제일 어른이신 할아버지께서 여자는 학교 다니는 거 아니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고 싶었죠. 학교 보내 달라고 밥을 안 먹었어요. 며칠 씩 밥을 안 먹으니까 집에서는 아이 죽는다고 입에 쑥을 뜯어 먹였는데 다 뱉어내면서 학교 보내달라고 했어요. 결국 할아버지가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했죠.” 임씨는 친구들보다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가게 됐고 그래서 1학년이 아닌 2학년으로 들어갔다. “아버지한테 한글을 배운 게 있어서 공부가 쉬었어요.” 공부에 열정은 있었지만 집안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할머니가 기름 닳는다고 초롱불도 못 키게 했어요. 밀짚에 반사된 달빛으로 책을 보며 공부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50년 6.25가 나고 그해 10월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다. 포로수용소 부지로 지정된 마을은 전부 소개(강제 이주)를 하게 됐다. 임씨가 사는 마을도 포로수용소 부지로 지정돼, 외가동네로 이사했다. 결국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한 마을에 동갑네 외사촌이 있었어요. 외사촌이 학교에 다녀오면 그 책을 빌려와서 밤마다 공부를 했어요. 그걸 외삼촌이 알고는 아버지에게 초등학교는 보내야 한다고 설득 해서 다시 4학년에 들어가게 됐구요.” 어렵게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5학년 때에는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고, 학교 가는 날보다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때 월사금이 170환인데 할아버지께서 주지 않아서 내질 못했어요. 그러면 담임선생님이 쫒아냈어요. 집에 이야기 해봤자 학교 가지 말라고 할까봐 말도 못하고, 다른 애들 학교 가고 나면 책보 들고 나와서 학교 가는 중간쯤 언덕 아래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돌아오곤 했어요.” 6학년 때에는 목수인 아버지가 성당 일을 하다가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학교를 또 다닐 수 없었다.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담임선생님 하고 반장이 찾아와서 ‘졸업장은 받아야지’ 해서 겨우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았어요.”

임씨는 어려서부터 이런 일을 겪으면서 “엄마는 죄도 없는데 왜 구박을 받아야 하지, 딸을 낳으면 그렇게 되나,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우리는 평등한 하느님의 자녀인데 왜 딸이라고 천대를 받아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임씨는 수녀가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농사일을 했다. 아버지는 다쳐서 누워 계시고 성당에서 마련해준 땅에 어머니와 농사를 지어야 했다. “16살 때부터 농사일을 했는데 모내기철에는 3주간 모내기를 하고 나면 손에 피가 났어요. 일을 잘하고 몸도 건강하니까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고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선을 보라고 날짜를 잡아왔다.

“그 당시에는 선을 보는 거는 곧 결혼을 하는 거예요. 저는 결혼 안하고 수녀가 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성당에 대구에서 오신 정교 회장님이 계셨는데, 밤중에 그분을 찾아가서 대구로 가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정교 회장님께서 ‘난 네 아버지 감당을 못 한다. 아버지 말씀 들어라’고 하는 걸 회장님 치마꼬리를 붙잡고 울면서 시집 안 간다고 대구로 보내 달라고 사정사정을 했죠. 선보기로 한날 새벽에 대구로 도망갔어요.” 임씨는 거제에서 대구 성당으로 가서 3개월간 지냈다. 결혼하라고 안할 테니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서야 거제로 돌아왔다.

임봉재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이 자신의 삶의 이력을 설명하며 밝게 웃고 있다. 임 전 회장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야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봉재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이 자신의 삶의 이력을 설명하며 밝게 웃고 있다. 임 전 회장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야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수녀원에 들어가다

“집에 내려와 고민을 하다가 초등학교 졸업생도 받아주는 서울에 있는 성심수녀원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수녀원 생활은 내 생각과 달랐어요.” 수녀원은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해 주는 곳으로 생각했는데 그 속에도 계급이 있었다. “마더·시스터라는 제도가 있거든요.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마더’라고 하는데 그들은 학교 선생님이 되고, 고등학교 이하 학력인 사람은 ‘시스터’라고 하면서 가정부처럼 일을 하는 거예요. 당시 성심여고는 장군의 딸들이 다니는 기숙학교였어요. 시스터들이 학생들 식사, 빨래, 청소 등을 했어요. 2년간 있다가 내가 학생들 종노릇하러 여기 온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수녀원을 나왔어요.”

그런데 수녀원 원장이 공부를 다시 시작하라고 연락을 했다. “그때 제2차 바티칸 공회가 있었는데 바티칸 공회에서 교회 내 계급제를 없애라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예요. 그래서 수녀원 상황이 바뀌어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공부를 시켜준다는 거였어요.” 그러나 그때 임씨 나이는 이미 23살이었다. 이제 공부를 해서 수녀가 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이냐시오 로욜라’라는 성인에 관한 책을 읽게 됐어요.”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 바스크 귀족가문의 기사로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중상을 입는다. 그는 회복을 위해 병상에 누워서 치료하는 동안 여러 가지 교회서적을 탐독해서 로마 카톨릭 은수자가 됐다. 이후에 계속 공부해 예수회를 창립하고 나중에는 성인이 됐다. 로욜라가 공부를 하기위해 중학교에 들어간 것이 33세였다. “로욜라 성인의 이야기를 읽고 제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원장 수녀님께 연락해서 중학교 과정을 다시 시작했어요. 월반하고 검정고시 거쳐서 고등과정을 배우며 수녀원에서 선생님 역할도 했어요.”

임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됐다. 일본에서 공부를 하는 중에 동생이 다쳤다는 편지를 받았다. “중학교 졸업하고 대구에 가서 자전거로 배달 일을 하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게 편지 내용이었어요. 가슴이 철렁했죠.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말하니, 수녀원에서는 걱정하지 말고 계속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공부를 그만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임씨는 나중에 성심학교 수녀원에 찾아가 급사를 하면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고향에 돌아오다

성심학교에서 고등과정을 마치고 나자 학교에서는 야간대학이라도 가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임씨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고 거제로 내려왔다.

마침 고향친구에게 고등공민학교가 있는데 선생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친구한테 나 같은 사람도 선생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좋지’,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고등공민학교 선생을 하게 됐어요.” 임봉재씨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이때 가르친 제자들이 지금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찾아온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에 어렵게 공부하다보니 얼마 되지 않는 학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도 여전히 있었다. 임씨는 이런 학생들이 남 같지 않았다. 월사금을 못 내 학교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던 경험이 그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이라고 월급을 얼마 받았는데 그걸 학비 못내는 학생들 학비로 썼어요. 그런데 이런 일들이 다른 선생님들과 갈등의 원인이 됐죠.” 고등공민학교 선생을 3년 정도 한 어느 날 수녀원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가 찾아와서 필리핀 대학에 가서 공부할 기회가 있다고 임씨를 추천했다. “필리핀에 가서 신용협동조합에 관한 공부를 했어요. 한국에도 이미 신용협동조합이 있었지만 저는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래 이거다, 거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확신이 들었던 거예요.” 임봉재는 1년간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다. 필리핀에서 알게 된 한국 교수의 소개로 협동조합교육연구원을 소개 받아 협동조합교육연구원 거제지사를 만들었다.

“거제에 돌아와서 엄마들을 대상으로 신협 교육을 했어요. 복식부기도 가르치고.” 그러나 생각처럼 엄마들은 잘 따라주지 않았다. 매일 일하고 살림하느라 바쁜 엄마들에게 신협 교육은 이상에 불과했다. 임씨는 스스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이집을 차려서 엄마들의 짐을 덜어주고자 했다. 이를 지켜보던 신협교육원에서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 갈멜 연구소에 어린이집 양성 교육과정이 있으니 다녀오라고 제안했다. “막상 이스라엘에 가보니까 어린이집 교육과정은 정원이 다 찬 거예요. 그래서 지역사회개발과에서 8개월간 교육을 받았어요.”

농촌여성회를 만들다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임씨는 여성농민에 관심이 많은 수녀님들과 함께 1976년도에 가톨릭 농촌여성회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임씨는 농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수원교구에 자리를 만들고 독일재단에서 외원을 받고자 농촌여성들 교육사업과 조직사업을 하겠다는 프로젝트를 제출해서 지원을 받았어요.” 임씨는 전국을 다니며 여성농민들을 만났다. “본당 신부님들께 여성농민들 모아달라고 해서 엄마들을 교육했어요. 그때만 해도 엄마들 만나면 눈이 반짝반짝했어요.” 그 당시 여성농민들은 대부분 글을 알지 못했다. 농촌에서 농사일과 집안일에 파묻혀 살던 여성농민들은 임씨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엄마들이 저녁밥 먹고 설거지 해놓고 모여서 밤늦도록 이야기 하고 깔깔깔 웃고 하면서 교육을 했어요.” 교육은 자기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이었다.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희생만하며 살아가는 여성농민들이 사람대접 받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들 호응이 너무 좋아 다음에 오면 조직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예상과는 달랐다. 한 달 후에 와보면 그대로였다. 의식이 바뀌고 조직화 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문제였다. 임씨는 실망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엄마들이 야속했어요. 알았으면 해야지 왜 안하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게 나한테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엄마들은 시부모 모시고 아이들 키우고 하느라 다른 것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나는 혼자 몸이라 가방 하나 들고 며칠씩 돌아다녀도 누구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엄마들은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 거죠.”

임씨는 3년여 동안의 농촌여성회 활동을 접고 농촌에 들어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어린이 교육을 하기로 했다. 경북 봉화의 오지에 들어가 3년간 공부방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돌봤다. 그러나 봉화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80년대 독재정권 아래 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탄압받으면서 임씨 역시 경찰의 감시와 압력으로 오래 머물 수 없게 됐다.

“봉화에서 생활이 어려워질 때 가톨릭농민회에서 어차피 당신은 알려진 사람이니 시골에 숨지 말고 공개적으로 여성부 활동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왔어요.” 이때부터 임씨는 가톨릭농민회 여성부 활동을 하며 전국을 다녔다. 그는 여성농민 교육과 조직화를 하는 일을 맡았다. 오늘날의 여성농민운동은 바로 임씨가 1976년에 만든 농촌여성회와 1980년 가톨릭농민회 여성부 활동이 토대가 됐다.

가톨릭농민회 회장이 되다

1980년대 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만들어질 무렵 임씨는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접고 괴산으로 들어갔다. 이제 정착해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다. 그러나 괴산생활을 시작할 무렵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어머니가 쓰러지시고 나서 그동안 어머니 힘들게 했으니 이제라도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씨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거제로 갔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치매가 시작됐다. 치매증상이 있는 어머니는 매일 새벽마다 죽은 아들 묘를 찾아가 아들을 불렀다.

“어머니가 아들 묘를 찾아 가는 걸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데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누가 산청을 소개했어요. 처음에는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어요. 괴산에 다시 돌아가겠다고만 생각했고. 그런데 동생도 권하고 주위에서도 괴산이 춥고 교통도 불편하니 고향과 가까운 이곳에 오는 게 좋겠다고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산청에 오게 됐어요.”

임씨는 산청에 집을 짓고 텃밭농사를 하며 어머니를 모셨다. 산청에 온 지 5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후 가톨릭농민회 마산교구 회장을 맡았다. 가톨릭농민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임씨에게 가톨릭농민회 전국회장을 맡으라고 권유했었다. “가농에서는 이제 여성이 회장을 할 때가 됐다고 전국회장을 권유했어요. 그런데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회장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밝히고 거절했죠.”

수차례의 권유를 사양해 오다 지난 2010년, 결국 가톨릭농민회 회장을 맡게 됐다. “가농에서 여성이 회장이 된 건 역사적인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임 회장은 여전히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야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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