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과 주권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WTO 개도국 지위 포기에 부쳐

  • 입력 2019.11.03 18:00
  • 기자명 윤금순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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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금순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윤금순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또다시 국익이란 미명에 제물이 된 농업

우리 농업은 WTO라는 틀 안에서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라는 보조장치에 의지해 휘청거리면서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해왔듯이 국익이란 미명 하에 또 다시 이 땅의 농업을 제물로 삼은 것이다. 역대 정부들은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누구를 위한 국익인지도 모르는 국익을 위해 농업을 희생해 왔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수출이 중요하다고, 수출을 위해서는 농업이라는 곶감을 뭉텅뭉텅 빼 줘가며 거래를 해왔고 국익을 위한 거라고 했다. 그들에겐 세계 시장이라는 무한한 경제 영토의 확장을 위해 농업쯤이야 희생시켜도 되고 국민의 먹거리는 세계화된 것들로 채우면 되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농업은 경쟁력 없는 비교열위 산업이고 농민들은 밑창 터진 주머니며, 도덕적으로 해이한 대책 없는 존재들인 것이었다. 그러니 농업을 살리자는 몇 안 남은 농민들의 외침은 한낮 어느 집 개가 짖나 싶은 것이었겠다.

‘이건 아니다’ 싸우던 농민들도 때론 나라가 하는 일이려니 체념하며 열악해진 농업 현실에서 각자 살길을 찾기에 바빠졌다. 농민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정부는 들은 체도 안하다 집회장에서 국가 폭력에 농민이 죽어나가기라도 하면 겨우 사과 한마디 하고는 또다시 농산물 시장 개방을 밀어붙이는 일들이 끝도 없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이유는 국익이었다.

농업이 무너져도 책임지는 건 농민들 뿐

농산물 시장개방에 저항하던 농민의 죽음이 도화선이 돼 일어난 촛불로 들어선 정부는 사람 중심과 공정을 얘기한다. 발 딛고 서 있는 바닥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받쳐놓은 약자의 간당간당한 보조장치마저 걷어차는 것이 공정인가? 참으로 서글프고 분노스러운 현실이다. 세계는 인류의 지속가능성과 농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농민인권헌장을 만들었는데, 인권대통령이 일하는 정부에서 우리 농민의 인권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국민의 식량과 생태환경 보존, 이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농업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은 애당초부터 지금까지도 없는 듯하다.

그동안 희망 없이 쪼그라든 농업 현실을 살아내면서도 언제든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농업을 회생시킬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던 농민들은 세게 한 방을 맞은 기분이다. 당장 큰 변화가 없을 거라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오며 한편으로 언젠가는 올 것이 왔다고 헛헛한 심경을 금할 길이 없다.

개도국 지위 포기를 끝으로 농민들에게 더 이상 남아 있는 보조장치나 보호장구는 없다. 아직도 초등학생 체구에 비견될 한국 농업은 이제 헤비급의 세계 농업 주자들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맨몸으로 싸워야 한다. 참으로 공포스런 게임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농민들은 국가 정책이란 이름으로 참으로 폭력적인 세월을 견디며 지금껏 살아왔는데 앞으로는 또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개도국 지위 포기로 앞으로 농업분야에 대한 관세 및 보조금 혜택이 대폭 축소되고 농업계 전반에 큰 피해가 나타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하다. 이리 허망하게 포기할거면 농업을 살리려는 노력이라도 명확하게 했어야 했다. 지금껏 이 땅의 농업이 이렇게 무너졌는데도 농업을 무너뜨린 사람들은 영전했고 책임은 오로지 농민들 몫이었다.

‘WTO 개도국 지위 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소속 농민단체 대표들이 지난달 2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정부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입장에 항의하며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승호 기자
‘WTO 개도국 지위 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소속 농민단체 대표들이 지난달 2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정부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입장에 항의하며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정부와 언론의 여론호도

언론마다 WTO 개도국 지위 포기 기사가 넘쳐나고 방송마다 개도국 지위 포기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논리들을 펼친다. 세계 경제력 순위 10위권을 다투는 우리나라가 왜 아직 개도국인지 뉴스를 접한 국민들은 의아하고 개도국 지위 포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부가 우리의 개도국 지위가 농업분야에만 적용됨과 한국농업의 특성과 현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트럼프의 포기 압력에 당당하게 대응하는 대신 구린 놈이 찔리듯이 개도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또 정부와 언론은 우리나라가 농업분야에서만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왔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서 마치 우리나라가 그동안 WTO 전 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온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임에도 개도국으로서 특혜를 누려 왔고 이제 포기하는 것이 압력 때문이 아니라 아주 마땅한 대처인 양 호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농민들의 반발을 우려해서인지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닌 미래 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쌀 등 국내 농업의 민감분야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도 했다. 미래에 있을 협상에서 소중하게 사용할 수도 있는 협상카드를 쉽게 다 날려버려 놓고 이번에도 또다시 농민들을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 협상이란 2001년 카타르 도하에서 시작해 2005년 홍콩 5차 각료회담 이후 아직까지 표류하고 있는 WTO DDA도하라운드협상을 의미한다. 도하라운드는 언제 협상이 타결될지 알 수 없고, 그때 가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포기가 아니란 거다. DDA협상 타결까지는 기제출된 개도국 지위의 이행계획표대로 갈 거란 전제하에 도하라운드에서 개도국 지위를 정하는 규칙이 바뀌면 그때 쌀과 민감품목 등을 지키기 위해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하면 되니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니라는 논리다.

일국의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내 맘대로 논리를 참으로 무책임하게 펴고 있단 생각이 든다.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개도국 지위의 포기를 선언했으면서도 말이다. 트럼프는 개인이 아니고 세계에서 일방적 패권을 휘두르기로 유명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도하라운드가 당장 12차 각료회의처럼 가까운 미래에 타결되지는 않겠지만 언제 타결될지는 알 수 없거니와 이번 개도국 지위 포기선언으로 우리 농업의 불확실성은 확실해졌다. 거기다 도하라운드가 타결된다면 그때 우리나라도, 미국도 누가 권력을 잡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때 가서의 일은 그때 가봐야 알 일이다.

개도국 지위 유지, 우리나라 WTO 가입의 전제 조건

1980년대부터 본격화 한 외국 농축산물 수입개방과 함께 간간이 들려오던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소식이 타결 목표 시한이던 1990년 말을 넘겨 몇 차례의 고비 끝에 1994년 봄에야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최종 타결됐다. 우리 산업의 대외경쟁력에 대한 우려와 농산물에 대한 예외없는 관세화를 전제하는 WTO에 대한 반발로 농민들의 UR협상반대 투쟁은 물론 범국민적인 반대투쟁이 거세게 타올랐다.

WTO는 협상타결을 앞두고 개문발차를 예고했고 출범 전 가입이 어렵게 될 듯하자 급해진 정부는 막판에 우리나라의 개도국 지위를 선언하면서 협상에 참여했다. 대신 정부와 정치권은 WTO협정이행에 관한 법률을 특별법으로 제정하고 공익형 직불제 도입을 통해 농업과 농민을 보호하겠다고도 했다. 민족내부간거래의 내용 등을 담는다던 WTO협정이행특별법은 제정 이후 곧 사라졌다. WTO 가입을 위해 정부와 정치권이 벌인 희대의 사기극이요, 농민들을 우롱한 작태였다.

즉 농민들에게 개도국 지위 유지는 우리나라 WTO 가입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WTO 출범 다음 해인 1996년 김영삼 정권은 느닷없이 OECD에 가입하면서 다른 부문에서는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고 농업부문과 기후변화 부문에서만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농업부문에서만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며 특별품목으로서 쌀에 대한 관세화 10년 유예를 두 번 받아내고 2014년 관세화 후에도 513%의 고율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 고추, 참깨, 마늘, 인삼 등도 고율 관세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개도국 지위 포기로 관세를 줄여야 하고 감축허용보조AMS 등 농업보조금도 대폭 줄여야만 한다.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 왔음에도 수많은 FTA 협상 때마다 농업은 늘 테이블에 올려졌고 국익을 위해 난도질당해야만 했다. 이젠 꺼져가는 농업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시급히 수액이라도 주사하고 응급 수술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개도국 지위를 이리 쉽게 포기 한단 말인가. 참으로 생사람을 잡아 죽어가도록 만들어 놓고 치료는커녕 겨우 확보한 병상마저 걷어치우는 꼴이다.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WTO 개도국 지위 포기 방침 철회! 농정대개혁 실현! 농민공동행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농민대표자들이 올해 수확한 나락 더미를 들고 개도국 지위 포기 시 강력한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정부에 경고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WTO 개도국 지위 포기 방침 철회! 농정대개혁 실현! 농민공동행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농민대표자들이 올해 수확한 나락 더미를 들고 개도국 지위 포기 시 강력한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정부에 경고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업 다음으로 힘없고 약한 고리, 다음 협상의 희생양

흔히 협상이란 주고받는 거라고 상대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자고 한다. 먼저 압력에 대한 쉬운 포기를 확인시켜준 후 상대가 진행되고 있는 협상에서 어떤 거든 양보할거라고 기대한다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한다. 더욱이 과거의 여러 협상에서 공정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던 미국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아파트 월세 받기보다 한국 정부에게 방위비 받아내는 게 더 쉽다’는 트럼프의 말처럼 너무 쉽게 보인 건 아닌지. 이제 기울어진 전 세계 자유무역의 판에서 한국의 농업과 관련해 미국의 입장에선 아주 공정하고 완전한 자유무역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얻은 셈이다.

중-미 간에 패권을 둘러싸고 앞으로도 싸움은 지속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 과정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휘말릴 소지가 매우 크다. 앞으로 있을 수많은 협상에서 미국이 또 무언가를 우리에게 요구할 때 정부가 늘 희생양 삼아왔던 농업에서 더 내줄 것은 이제 없다. 상생을 얘기하며 약자를 희생양 삼는 정부에게 다음엔 또 어느 분야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인가 묻고 싶다. 당연히 농업 다음으로 힘없고 약한 고리가 그 타깃이 될 것이다.

미국의 중국을 겨냥한 싸움에서 우리 농업이 고래 등이 터진 것이든, 미국과의 자동차 협상이나 주한미군의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전략이든 정부는 애초에 농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식량주권을 지키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국가주권의 측면에서 국민의 먹을거리를 지키는 것은 식량안보라고 불릴만큼 중요하다. 국민의 생명을 유지하는 먹을거리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면서 경제주권과 국방주권을 지킬 수 있을까? 처음부터 정부의 관심은 국익이 아니라 재벌의 이익과 미국의 환심을 사는 데만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달리 보면 지난 7월 26일 재임기간 중 자신의 성과를 위한 트럼프의 말 한마디가 우리 정부에 강력하게 작용한 결과다. 이번 건도 결국 만장일치를 중심으로 하는 WTO의 다자주의와 WTO 출범 당시 인정한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 약속을 깬 미국의 일방주의적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농업과 주권,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경제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횡행하면서 돈이 되면 무엇이든지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있다. 과연 한 나라의 근간이 되는 농업과 주권을 팔아도 나라가 지탱할 것인가? 식량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나라나 사람은 주인이나 인간이 주는 것만을 받아먹는 개돼지에 불과하다. 나라의 농업을 줄곳 거래의 대상으로만 삼아 온 이 나라 경제관료들의 생각이 가당찮게 여겨지는 까닭이다. 식량과 주권은 지켜야 할 대상이지 결코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농업의 미래를 위한 투자차원에서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공익형 직불제 도입을 위한 예산심의에도 적극 임하겠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정부 행태를 보아온 농민들로선 그닥 신뢰가 가질 않는다. 정부가 내놓은 공익형 직불제 도입이란 것도 신뢰가 가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진정 정부가 국회에 내놓은 정도를 가지고 공익형 직불제 도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개도국 지위 포기가 농업·농민에 대한 사망선고가 되지 않기 위해선 전향적인 농정패러다임의 전환과 함께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 된다. 아무 실효성 없는 과거와 같은 정책들이 다시 반복돼선 안 된다.

지금 세계는 지구별의 지속가능성을 걱정하며 인류 미래를 위해 농민의 인권과 가족농의 중요성에 합의하고 효율적인 이행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에겐 이런 변화들을 늦출 여유가 없다. 지금 당장 실행하라!

우리 농정에 대한 속시원한 돌직구, ‘농사직썰’을 매월 1회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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