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콩은 손길이 엄청 필요한 작물이다. 고생 고생해서 다 키웠고 이제 수확만 하면 되는데, 한 톨도 수확하지 못하고 이렇게 싹 갈아엎으니 농가들 심정이 비통하기 그지없다. 생활도 해야 하는데, 재해보상이나 보험금도 턱없이 부족하고, 농민들 마음이 참으로 침통하지 않겠나.”
대부분 잿빛으로 변해버린 들녘의 논콩을 바라보며 전북 김제시 농민 서창배씨(김제시 교월동)가 말했다. 전국 최대 논콩 주산지 전북 김제시 농민 등 100여명이 27일 김제시 부량면 대평리 일원 논콩 경작지 1200평을 갈아엎었다.
이맘때 논콩은 단단한 콩알을 줄줄이 매달고 누런빛을 곱게 띠지만, 지금 김제의 논콩은 까맣게 썩어가고 있다. 지난 9월초 집중호우로 침수된 데 이어 한 달여간 이어진 잦은 비로 곰팡이성 병해까지 엄습해서다. 이에 김제시농민회·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김제시연합회·부량면수해대책위원회가 모여 △논콩피해 추가조사 실시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정부에 촉구하며 논콩을 갈아엎었다.
지난 9월까진 침수 피해만 확인된 상황이었으나, 9월말 무렵 병해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콩알이 마치 미라처럼 변하는 병증부터 열매가 여물지도 않은 채 잎이 떨어져 버리는 불마름병 등 고온다습한 날씨에서 주로 발생하는 곰팡이·세균성 병해다.
논콩 농가들이 이날 애지중지 키워온 논콩을 갈아엎는 시위까지 나선 건 오롯이 정부 정책 때문이다.
지난 9월초 침수 피해 신고 대상에서는 그 이전(6월)에 피해 신고된 경작지는 제외됐으며 피해 입증을 위해서는 농가가 작물이 침수된 사진을 첨부해야 했다. 피해율도 논콩은 15%로 한정했다가 농가들의 규탄이 이어지자 30%로 상향됐고 신고 기간도 다소 연장된 바 있다.
문제는 그 뒤 이어진 습해에 대해서는 어떤 조사나 지원방안도 지금으로선 없다는 점이다. 이에 농민들이 △9월 침수 이후 피해에 대한 추가 조사와 △그에 기반한 피해율 산정 및 보상 실시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대로 수확을 포기하고 속수무책 앉아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더 근본 문제는 시작부터 논란이 컸던 정부의 벼 재배면적(8만ha) 감축 정책이다. “논콩 때문에 새로 들인 농기계값도 제대로 감당이 안 되는 상태였는데, 올해는 정부가 벼를 줄이려고 논콩을 매우 장려했다. 콩(대체작물)을 안 심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까지 하니 농가들이 올해 벼 대신 콩을 유난히 많이 심었다. 결국 정부의 압박 속에서 콩 재배가 늘어난 거다. 농민들로선 정부 정책을 잘 따른 것밖에 없는데 정작 정부는 이럴 땐 농가 피해 지원에 나서지 않으니 농민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잖은가.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오죽했으면 갈아엎겠나.” 농민 서창배씨가 말했다.
이날 논콩 갈아엎기에 나선 농민들은 트랙터에 시동을 걸기 전 집회를 열어 정부를 향한 규탄을 쏟아냈다.
투쟁사에 나선 송채복 부량면수해대책위원장은 “풍년을 기대했던 콩 농가들은 하루아침에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괜찮겠지. 그래도 살아나겠지’라며 논에서 물이 빨리 빠지길 학수고대하면서 가슴 졸인 나날이었다”라며 “그러나 콩은 결국 낙엽처럼 다 죽어버렸다. 분명 재해인데도 정부는 완전히 침수되지 않으면 피해 신청조차 받지 않았다. 콩 조사 기준이 없어 벼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벼는 열매가 줄기 꼭대기에 달리지만 콩은 밑에 달린다. 전혀 다르다. 그간 농민들이 받은 건 1200평당 농약대 30만원뿐이다. 이마저도 받지 못한 농가가 태반”이라고 전했다.
이어 황양택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북도연맹 의장은 “지금까지 농민들은 물이 안 빠지는 논이나 저지대에 콩을 심어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정부는 이를 듣지 않고 쌀 재고가 많다며 콩을 권장했다”라며 “결국 정부의 안일한 논콩 정책으로 농민들이 재해를 당했으니 정부는 이를 책임지고 제대로 보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조경희 김제시농민회 교육위원장은 “완전히 물에 잠겨도 피해율은 고작 15%다. 그러나 콩은 한번 침수되면 이후 발생할 증상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작물이다. 당장 눈에 띄는 피해만 조사해선 안 되며 재조사가 필요하고 최종 피해율에도 이를 반영해야 한다”라며 “병해가 발생한 지난 9월 재조사에 나서고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으면 농민들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어떻게든 올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이날 농민들은 김제시를 특별재난지구로 선포하라고 입을 모았지만, 이상기후가 매년 반복될 가능성이 큰 만큼 근본 대책으로 △논콩의 특성을 반영한 피해조사 기준 마련 △재해 보상금액 상향 등도 아울러 주문했다.
현재의 재해보상은 실효성이 낮아서다. 농업재해는 피해 보전이 아닌 복구비 지원 개념이라 약간의 농약대와 대파대(재해로 작물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일 때) 지원에 그친다. 농작물재해보험 역시 높은 자기부담비율, 낮은 피해율 책정, 할증 등으로 농가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재해 지원체계는 생산비와 자가노동비를 전혀 보장하지 않아 결국 농가부채 상승, 농사 지속 여부 및 농가 생계유지와도 직결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이날 논콩 갈아엎기에 참여한 농민 박명수씨(김제시 부량면)에 따르면 논콩 생산 과정에 들어간 대강의 비용만 해도 1200평(1필지)당 180여만원에 이른다. 1필지당 콤바인 30만원(심고 수확할 때 각각)·약제비 8만~9만원씩 4~5회·인건비 19만원(1명당, 3~4번 투입) 등이다. 대부분 경작 규모가 1만평 대이고, 농지 임차료, 농기계 구입 대출이자 등이 포함되지 않은 액수임을 고려하면 총생산비는 상당한 액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