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한승호·유승현 기자]
수확을 앞둔 배추밭이었건만 성한 배추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올가을 유례없는 긴 장마에 무름병이 번진 배추는 잎이 노랗게 짓물러 썩어가고 있었고 지난 추석 연휴 전에 이미 수확을 마쳤어야 할 브로콜리 또한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맑게 갠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 달째 오락가락했던 비로 밭 곳곳엔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고 배추와 브로콜리 모두 손을 대기가 무섭게 뽑히거나 으스러졌다.
유례없는 가을장마로 김장배추뿐만 아니라 브로콜리까지 무름병이 확산하면서 농가 피해가 속출하자 충북지역 농민들이 애지중지 키워 온 농작물을 트랙터로 갈아엎으며 자연재해 인정 및 피해 대책 마련을 정부에 촉구하고 나섰다.
16일 오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들녘에선 ‘배추(브로콜리) 무름병 피해 대책을 촉구하는 밭 갈아엎기 투쟁’이 진행됐다. 이날 새벽에도 비가 내린 탓에 배추와 브로콜리 모두 물에 젖어 있었고 밭은 걷는 게 힘들 정도로 질퍽거렸다. 이날 밭 갈아엎기 투쟁을 준비한 이병철 청주시농민회장은 “비가 한 달째 계속 오고 있다. 오늘 새벽에도 비가 왔고 이번 주에도 또 비가 잡혀 있다”며 “무름병이 온 지금 상황도 심각한데 이런 상태가 이달 말까지 이어지면 피해가 곳곳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올해 농사지은 3000평 규모의 브로콜리밭 중 이날 500여평을 갈아엎은 최영해(67)씨는 “3000평 전부 이 밭과 상태가 똑같다. 까맣게 썩어가니 수확을 할 게 없어 그냥 다 포기했다”며 “자식처럼 귀하게 키웠는데 수확을 앞두고 이렇게 되니 그동안 들인 농자잿값이나 인건비 등 손해도 크지만 지금은 그저 답답하고 막막할 따름”이라고 착잡한 심경을 전했다.
같은 지역에서 7000평 규모로 배추를 재배하고 있는 양성근(73)씨도 “배추 농사만 50년 넘게 지었는데 이런 피해는 처음”이라며 “방제도 평년의 두 배인 8번씩이나 했는데도 무름병 확산을 막을 수 없었고, 수확해봤자 자잿값도 건질 수 없어 이렇게 갈아엎게 됐다”고 설명했다.
밭을 갈아엎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진행한 농민들은 “유례없는 가을장마로 일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발병을 막기 위해 약을 쳐도 그때뿐”이라며 현재 확산하고 있는 무름병은 극한의 이상기후에 의한 자연재해라고 입을 모았다. 이에 농민들은 △배추(브로콜리) 무름병 자연재해 인정 및 피해조사 실시 △극한 기후에 대비한 기후변화직불제도 실시 등을 정부에 거듭 촉구했다.
김기형 전국농민회총연맹 충북도연맹 의장은 “농민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이 하는 일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올가을 이상기후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는 농사를 잘못 짓거나 방제를 제때 못한 농민들의 탓이 아니다. 정부는 더 큰 피해로 번지기 전에 무름병을 자연재해로 인정하고 농민들이 다시 힘을 내 농사에 나설 수 있도록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