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시민 여러분, 트랙터를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농민들을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함께 싸웠고, 함께 승리했습니다.” 지난 26일 서울 효자동에서 열린 탄핵 촉구 집회의 막바지. 연단에 선 정영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은 마치 가슴 속의 응어리가 녹아내린 것만 같은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전봉준투쟁단’의 2차 남태령 투쟁. 지난 동짓날부터 시작된 남태령의 기적은 봄날의 남태령을 넘어 효자동에서 다시 한번 농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감싸 안았다.
지난 25일, 농민들은 저녁 7시 광화문 탄핵 촉구 집회에 참가하고자 전국 곳곳에서 수십대의 트랙터를 밀어 올렸다. 윤석열 대통령의 초법적 석방과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지연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경찰은 지난 1차 투쟁 때와 마찬가지로 남태령에서 농민들을 막아섰다.
경찰과 서울시의 확고한 남태령 봉쇄 의지는 이미 전날까지 수많은 보도를 통해 드러나 있던 터였다. 이에 시민들은 농민들의 트랙터보다도 먼저 남태령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시민 대열의 후방에서 트랙터와 트럭으로 전 차선을 봉쇄하며 정당한 시위권 보장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오히려 차량과 방패벽으로 농민·시민들을 포위하며 현장 사수 의지를 과시했다. 한바탕 농민-경찰 간 몸싸움이 벌어질 때, 깃발과 카메라를 든 시민들이 몰려오면서 진정되기도 했다.
봉쇄된 공간 안에서 농민·시민은 또다시 “차 빼라”를 외치며 무기한 집회에 들어갔다. 최초 500여명으로 시작한 집회는 금세 3000여명으로 늘어났고 저녁 퇴근시간 이후 한때 1만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어둠이 깔리고 대중교통 막차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난 동짓날처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며 밤을 환하게 밝혔다.
상황이 급변한 건 26일 새벽이었다. 새벽 4시경 농민 트랙터 중 1대가 남태령을 우회해 광화문 비상행동 농성장 입성에 성공한 것이다. 당연히 경찰은 좌시하지 않았다. 경찰은 트랙터를 지키는 농민·시민들과 정혜경 진보당 국회의원의 사지를 들어 끌어내고 지게차로 트랙터를 견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게차가 효자동 방면(자하문로)으로 진입하던 순간, 황급히 몰려온 일단의 시민들이 지게차를 막아섰다. 남태령에서 밤을 지샌 시민들, 그리고 자택에서 아침을 맞은 수많은 시민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효자동 일대엔 극심한 혼란이 벌어졌다. 견인 차량이 시민들의 집회 대열을 피해 한쪽 차로로 운행을 계속하려 하자 시민들은 대로와 골목길로 끈질기게 따라붙었고 결국 왕복 6차로 전체를 막아섰다.
이때부터 효자동은 졸지에 집회장으로 변모했다. 수백명의 시민이 왕복 6차선 도로를 막고 시위하며 트랙터 반환을 요구했고,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끈질기게 자리를 지켰다. 집회를 위한 방송차를 들이는 과정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경찰 간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저녁 7시, 매일 경복궁 동십자각 인근에서 진행하던 탄핵 촉구 집회 장소마저 이날은 효자동으로 옮겨져 버렸다. 동십자각 대신 농민들의 트랙터가 있는 효자동으로 몰려온 수만명의 시민들은 트랙터 강제 압수, 시민에 대한 폭력 행사 등 이날 하룻동안 경찰이 효자동에서 보인 행태에 공분했다.
시민들의 발언 내용은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됐다. 영남지역 대규모 산불과 희생자에 대한 애도, 경찰의 반시민적 행태에 대한 분노,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향한 변함없는 갈망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모든 발언자가 예외없이 농민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연대감을 표했다.
이갑성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의장(전봉준투쟁단 서군 대장)은 “트랙터는 농민들이 논갈이하고 땅을 평평하게 하는 기계다. 땅만 갈겠나? 우리 농민들이 트랙터로 적폐가 가득한 세상도 한번 평평하게 만들어 보겠다”며 “앞으로도 여러분이 어려울 때 항상 농민이 앞장서서 함께하겠다. 국민의 요구를 담아서 윤석열을 파면시킬뿐 아니라 이 세상을 갈아엎는 데 누구보다 앞장설 것을 약속드린다”고 시민들의 성원에 화답했다.
이날 오전 효자동에서의 한바탕 소란 후 야당 국회의원들이 서울경찰청장을 항의방문하고 시민단체들이 경찰 수장들을 고소하는 등 경찰을 향한 정치·사회적 압박이 이어졌다. 결국 경찰은 7시 집회 시작 10분 전에 ‘트랙터 반환’ 의사를 전달했다. 남태령에서부터 1박 2일 투쟁을 감내해 온 시민들은 “2차 남태령도 시민이 승리했다”며 기세를 더욱 높였다.
트랙터가 풀려남에 따라 하루종일 자하문로를 점거했던 농민·시민의 집회도 마침내 해산할 수 있었다. 집회가 끝난 뒤, 여전히 트랙터에 길을 내주길 주저하는 경찰을 향해 수만명의 시민들이 일제히 응원봉을 휘두르며 “차 빼라”를 외쳤고, 무대 위 대형스크린도 트랙터와 농민들을 비췄다. 농민 트랙터는 마침내 시민들과 행진하며 집회의 대미를 장식했고, 이송용 트럭에 높이 올라타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지난해 12월 22일 한남동 트랙터 투쟁이 겹쳐지는 광경이었다.
광화문에서 소임을 다한 트랙터는 곧바로 귀향길에 올랐다. 트랙터를 운전한 충남 예산 농민 조광남씨는 트럭 위에서 “시민 여러분 덕분에 트랙터는 본업으로 돌아갑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끝까지 함께 투쟁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전했다. 이날 탄핵 투쟁의 최고조를 장식한 전봉준투쟁단 트랙터를 발판삼아 시민단체는 지난 27일 전국시민총파업대회를 전개했으며 농민들 역시 그 주역의 하나로 참여해 헌재의 탄핵 심판을 압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