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졌지만 잘 싸웠다. 지난 16일 치러진 202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 출마한 농민후보는 ‘민주당 텃밭’이라 평가되던 호남에서 유의미한 수준의 득표를 기록하며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측을 긴장시켰다. 결과적으로 농민 당선자는 배출하지 못했지만, 이번 재‧보궐선거는 농민후보의 향후 행보, 그리고 오는 2026년 6월 3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기대하게 만든 선거였다.
총 네 곳(전남 영광군·곡성군, 인천 강화군, 부산 금정구)의 기초지자체장과 한 곳(서울시)의 교육감을 선출한 이번 선거엔 두 명의 농민후보가 출사표를 냈다. 바로 전남 영광의 이석하 진보당 영광군 지역위원장(전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사무처장)과 전남 곡성의 박웅두 조국혁신당 농어민위원장(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이었다.
영광에서 30여 년간 농민운동·지역운동을 벌여온 이석하 후보는 진보당을 대표해 영광군수 후보로 출마, 장세일 민주당 후보 및 장현 조국혁신당 후보 등과 맞붙었다. 핵발전소 반대투쟁, 고형폐기물연료(SRF) 열병합발전소 반대투쟁 및 농민생존권 보장 등 30년 이상 영광군민의 권익을 위해 활동해 온 운동가답게, 이 후보는 영광군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포착해 공약으로 담고자 노력했다.
이 후보는 영광군수 후보로서 ‘비리척결·청렴군수’ 구호를 내걸며 △공공병원 건립 △공공노인돌봄 요양원 건립 △무상급식·무상교육 정책 실시 등의 혁신 공약을 발표해 군민들의 주목을 끌었다.
수도 서울을 비롯한 ‘중앙’의 이익을 위해 온갖 희생(특히 핵발전소의 존재로 인한 주민 안전 위협)을 감내하며 소멸위기까지 겪어온 ‘지역 양극화의 산증인’ 영광군민 중 다수가 이 후보의 지지대열에 함께했다. 이 후보는 지난 7~8일 ‘여론조사 꽃’이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37.4%의 지지율을 기록, 장세일 민주당 후보(35%)를 앞서는 것으로 나와 이변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후보는 결과적으로 16일 재‧보궐선거에선 30.72%의 득표율을 기록해 2위로 낙선했다. 영광군수 당선자는 장 후보였다(득표율 41.08%). 그러나 직전 선거인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그리고 민주당에서 공천을 못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직전 군수인 강종만 영광군수)가 48:52로 거의 반반씩 표를 점유했던 ‘민주당 텃밭’ 영광군에서 진보당 깃발을 내걸고 30% 이상의 득표율을 올린 것 자체가 이 후보 및 진보당으로선 큰 성과였다.
아울러 뇌물수수 의혹을 일으켰던 김준성 전 영광군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군수직을 상실한 강종만 전 영광군수 등으로 인해 피로감이 높았던 영광군민들 입장에서, ‘청렴정치’를 내걸며 출마한 이 후보의 선전은 그 자체로 영광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 후보는 사실상 선거결과가 판가름 났던 지난 16일 밤 낙선인사를 통해 “군민의 주권이 실현되는 군정, 정치혁신을 바라는 군민들의 열망, 지역소멸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군민의 소망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앞으로도 우리 영광군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로 헌신하며, 늘 우리 군민들의 곁에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후보가 일으킨 '바람'은 민주당 측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장세일 영광군수 당선인은 영광 농민들의 첨예한 사안 중 하나인 쌀값 문제 대응과 관련해 진보당 측과 공동대응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민주당만의 일방적 군정(郡政)을 꾸려가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바 있다.
한편 곡성에서도 농민운동·농어민기본소득운동에 헌신해 온 박웅두 조국혁신당 후보가 농민후보로서 곡성군수에 출마했다.
박 후보는 1990년 대학 졸업 뒤 곡성으로 귀농해 곡성군농민회장 및 곡성 교육희망연대 대표 등을 역임하며 곡성군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활동해 왔다. 박 후보는 이번 재‧보궐선거에서 △군민기본소득 100만원 지급 △출생부터 사회 진출까지 군(郡) 책임제 △경로당 매일 한 끼 배달 △군내버스 무료화 및 노선 개편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곡성 역시 이상철 전 군수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군수직을 상실함에 따라 재‧보궐선거 대상이 된 상황에서, 박 후보는 조상래 민주당 후보(직전 2022년 지방선거서 무소속으로 낙선), 최봉의 국민의힘 후보 등과 곡성군수 자리를 놓고 대결했다. 조상래 후보의 경우 ‘쌀 직불금 부정수급자 명단’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린 바 있다는, 농민 유권자들로선 눈을 흘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박 후보는 개표 결과 득표율 35.85%로 2위를 기록해 낙선했으며, 조 후보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과반 이상의 득표율(55.26%)을 기록해 군수에 당선됐다. 그러나 곡성 역시 민주당 후보와 민주당 계열 무소속 후보가 표를 반반씩 가르던 지역임을 감안할 때, 박 후보 역시 선전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한편 수도 서울에선 농민·먹거리운동진영이 지지하는 진보교육감 후보가 승리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해직교사들을 복직시킨 것을 ‘부정 채용’이라 판단한 대법원의 유죄 판결로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이 교육감직을 상실함에 따라, 서울시교육감 자리를 놓고 정근식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과 조전혁 전 국회의원 등이 맞붙었다. 정치·교육철학 성향상 정근식 후보는 진보성향 교육감으로, 조전혁 후보는 보수성향 교육감으로 분류된다.
개표 결과 정 후보는 득표율 50.24%로 과반수를 기록, 2위인 조 후보(45.93%) 등을 제치고 조희연 전 교육감에 이은 서울시의 새 ‘진보교육감’으로 당선됐다.
서울시교육감 자리는 서울시장과 함께 서울 내 유치원·초·중·고등학교 원·학생 약 83만명의 먹거리인 ‘학교급식’을 책임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서울시교육감이 어떤 급식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학생이 농촌지역 농산물을 더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하느냐가 결정되며, 유전자조작먹거리(GMO)를 섭취하느냐 마느냐도 판가름 난다. 아울러 서울시교육감은 학교급식노동자의 노동권·건강권 확보와 관련된 정책에도 관여한다.
이와 관련해, 정근식 당선인은 후보 신분이던 지난 8일 전국먹거리연대·희망먹거리네트워크·GMO반대전국행동 등 먹거리운동 연대체들과 함께 ‘기후재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기후급식으로 대전환’ 구호 아래 정책협약식을 맺었다. 쌍방은 정책협약을 통해 △생산·유통·소비·폐기 전 과정에서 기후를 생각하는 급식 실천 △건강한 먹거리 공급으로 아이들 건강권 보호 △학교급식 3주체(학생, 학부모, 교사) 대상 기후먹거리 교육 확대 및 소통 채널 구축 등 3대 목표 실현을 위해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3대 목표 실현을 위한 7대 과제는 △기후급식 확대를 위한 품질기준 마련 및 남은 음식 기부 활성화 △기후급식 활성화 위한 서울시 공급체계 개선 방안 마련 △학교급식 종사자 노동권 보장 및 처우개선 △유치원·초·중·고등학교 친환경 무상급식 정착 및 5무(無) 급식(GMO, 방사능, 항생제, 첨가물, 잔류농약 없는 급식) 확대 △중단된 초등 방과 후 늘봄학교 과일간식 지원 △학생·교사·학부모 대상 기후먹거리 교육 확대 및 소통채널 확대 △서울시교육청 학교급식위원회 현실화 및 국공립·사립 초·중·고 급식소위원회 활성화 등이다.
한편 이번 선거결과와 관련해, 권종탁 전국먹거리연대 집행위원장은 정근식 당선인의 당선을 “그나마 다행”, 이석하 후보와 박웅두 후보의 석패를 “너무나 아쉽다”고 평가하면서, 정 당선인을 향해 “시민사회단체와 정책협약을 맺으며 약속했던 먹거리 관련 공약 실현을 위해 속도감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학교급식 종사자들의 처우개선, 건강한 먹거리에 기반한 친환경 무상급식 정책 실현 등을 위해 노력하길 당부한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