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가 지난 8일 농업재해대책심의위원회를 열고 벼멸구 피해를 농업재해로 인정하는 심의안을 확정했다. 농식품부는 21일까지 벼멸구 발생면적(3만4000ha)에 대해 조사를 완료한 후 11월 중 재난지원금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장의 빗발친 농업재해 인정 요구에 난색을 보이던 농식품부가 꼬리를 내린 셈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농민의 시름을 조금이나마 덜게 돼서 다행이다.
이번 벼멸구 재난 대응에서 농식품부가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지원 사례가 없어 농업재해로 인정하기 어렵다던 태도는 시대 상황에도 맞지 않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지방정부가 직접 피해지역 평균 기온과 폭염 일수를 분석하고, 고온과 벼멸구의 상관관계, 벼멸구 유입 시기와 경로 등을 근거로 제시하면서까지 정부를 설득했겠나 싶다.
한국 기후변화 평가보고서(2020)에 따르면 ‘작물의 재배지 북상, 월동·외래 해충의 발생 증가, 잡초의 분포 양상 변화 등이 관측’되고, 병해충과 잡초의 발생 및 피해 양상은 계속해서 변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2023년 감사원이 실시한 ‘기후위기 적응 및 대응실태 I (물·식량 분야) 주요 감사 결과’에 따르면 농림축산식품부, 국토부, 행정안전부, 해양수산부, 환경부 등 5개 부처 모두 관련 정책 수립 시 미래 기후변화에 따른 중장기 위험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자연의 준엄한 경고가 오래됐음에도 안일하게 미래를 바라보니 답답할 노릇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잿빛곰팡이병 창궐, 2차 생장 피해, 이상 저온 피해, 과수화상병, 햇볕 데임(일소) 현상 등 기후변화에 따른 농업 피해가 다양하게 발생했다. 1973년 기상 관측 이래 평균기온과 최고기온, 폭염 일수, 열대야 일수 등 각종 기록을 경신한 9월 더위는 벼멸구 창궐로 이어졌다. 집중호우로 물폭탄까지 맞아 수확을 앞둔 논밭은 초토화됐다. 이렇듯 농업재해가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피해 규모도 더 커지면서 일상화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농식품부도 더는 기존의 방식과 틀 속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벼멸구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각종 기준도 기후위기를 반영해서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이 있다.
기후위기와 농업재해는 우리 농업, 농촌, 농민의 미래를 고민할 때 매우 중요한 열쇳말이다. 정부는 2011년부터 현재까지 기후변화에 대응해 농업분야 관련 대책을 지속 추진 중이라고 말하지만 미덥지 않다. 현재 농식품부 기후변화 대응 사업은 풀지 못한 문제처럼 공백 상태다. 더 늦기 전에 변화한 현실에 맞게 ‘기후변화 대응 농정’으로 전환하고, 기후재난으로 인한 농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농업위기가 더 이상 변수가 아닌 상수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