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의 장벽을 허물어라 … 샘골농협엔 남녀 구분이 없다

[지역농협의 역할을 고민하다⑥] 전북 정읍 샘골농협

  • 입력 2023.10.29 18:00
  • 수정 2023.10.29 21:39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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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지난 3월 8일 치른 전국 동시조합장선거는 조합장의 초선·재선 여부와 관계없이 전국 지역 농·축협이 운영을 재정비하는 기점이 되고 있다. 본지는 각각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농·축협 여덟 곳을 격주로 소개함으로써 전국 농·축협 임직원·조합원들이 각자 조합의 역할을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전북 정읍 샘골농협(조합장 허수종)은 ‘깨어 있는’ 조합장을 보유한 농협이다. 허수종 조합장은 지난 8년여의 임기 동안 조합 경제사업의 양과 질을 비약적으로 늘려왔으며 농가소득 감소, 농촌 공동화 등 지역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선진적인 고민과 실천을 이어왔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한 업적이 있으니 바로 ‘성평등’이다.

공채로 진행하는 지역농협 직원 채용에서 최근 신입사원의 여성 비중은 60~70%까지 높아져 있다. 어떤 곳이든 지역농협 직원 성비는 여성이 우위를 점하는 추세다. 다만, 전체 성비와는 별개로 임원이나 고위직 직원만큼은 대다수의 농협에서 아직도 남성의 전유물로 남아 있다.

관리자급 여성 직원이 드문 이유를 찾아 올라가다 보면, 남녀직원 간 경제사업 소양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농협 조직의 특성상 경제사업을 알아야 조직 전체의 생리나 정체성을 체화할 수 있는데 입사 초기부터 잡무나 외근이 많은 경제사업은 남직원, 신용사업은 여직원 위주로 역할을 구분짓게 마련이다.

허 조합장은 과감하게 이 구분을 허물어버렸다. 부임 이후 경제·신용파트를 불문하고 전 직원에게 경제사업 관련 자격증 취득과 교육 이수를 의무화했다. 신용파트 직원도 간간이 주유소나 수매 현장에 나가 경제사업을 경험케 했고, 나아가 경제-신용파트 간에 성별을 떠나 `능력'에 따른 인사교류를 실행했다. “여성을 어떻게 1년 동안이나 타지로 보내냐”며 남직원만 보내던 파견근무에도 보란 듯이 여직원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샘골농협 허수종 조합장과 여성 관리직 직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반시계방향으로 김남희 본점 신용과장, 고연경 북면지점장, 허수종 조합장, 강지숙 이평지점 신용과장, 박해영 경제본부장, 박복순 이평지점장, 정은경 축산과장, 안동순 북면지점 신용과장.
샘골농협 허수종 조합장과 여성 관리직 직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반시계방향으로 김남희 본점 신용과장, 고연경 북면지점장, 허수종 조합장, 강지숙 이평지점 신용과장, 박해영 경제본부장, 박복순 이평지점장, 정은경 축산과장, 안동순 북면지점 신용과장.

여성을 우대한 게 아니라 ‘벽’을 텄을 뿐이지만 결과는 관리직의 성비 균형으로 나타났다. 현재 샘골농협의 직급 3급 이상 간부직원은 6명 중 3명이 여성이다. 4급 직원은 14명 중 5명이 여성이며 내년 4급 승진대상자 2명이 또한 모두 여성이다. 일반적인 농협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모습이다. 숫자뿐 아니라 지점장 2명, 경제사업본부장, 축산과장 등 핵심요직을 대거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단지 자리만 나눠갖는 게 아니다. 현재 건설 중인 샘골농협 우리밀 건조저장시설은 박복순 이평지점장이 경제본부장 재직 시절 국가공모사업을 유치해온 성과물이다.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전달력 있게 발표해 일개 지역농협으로서 20억원짜리 국가사업을 따내는 쾌거를 거뒀다. 그 후임인 박해영 경제본부장 역시 지자체 협력사업 성과로 콩 선별장 설치를 진행 중이며 조합원들에 작목전환까지 권장하며 쏠쏠한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능력' 위주 인사이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여성 관리급 직원들 모두가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후배 여직원들의 업무의욕이 높아짐은 물론, 점점 더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드는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임원의 경우엔 조합장의 의지가 미치지 않는 영역인 만큼 여성할당 방식을 택했다. 이는 허 조합장의 초선 공약이기도 했다. 샘골농협은 3개 농협이 합병한 농협이라 각 면별로 3명씩의 이사를 선출하는데, 이 3명 중 1명이 여성의 자리로 할당돼 있다. 여성 상임이사를 포함해 현재 샘골농협 이사는 10명 중 4명이 여성이다.

처음엔 농협 사업구조를 잘 몰라 큰 역할을 못 했던 여성 임원들이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남성 중심이었던 조합의 사업에 여성의 존재를 녹여내고 복지사업 등 지역에 대한 조합의 역할에 섬세함을 구현했다. 샘골농협이 자랑하는 부녀회 판매사업, 여성산악회 봉사활동 등에서도 여성 이사들이 구심점이 되고 있다. 이는 조합에 대한 여성 조합원들의 관심과 참여를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고 있기도 하다. 농협에서 소외되기 십상인 여성 조합원들이 조합의 주체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농촌은 인구가 많은 도시와 떨어져 있고 주민들이 고령화돼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성평등의 가치는 가부장적 문화가 깊게 남아있는 농촌으로선 가장 시대의 변혁에 발맞추기 버거운 의제다. 농협은 농촌 사회의 중심이 되는 조직이자 기관으로서 그 격차를 줄이는 데 앞장서야 하지만, 오히려 더 악질적인 성차별과 성범죄로 구설에 오르는 농협이 많은 실정이다.

샘골농협이 실현하고 있는 평등의 가치는 그래서 돋보일 수밖에 없다. 지역사회 전체의 인식 제고를 이끌어내기엔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몇몇 다른 농협들의 관심과 성찰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내고 있다. 적어도 농촌이라는 공간에 샘골농협처럼 건전한 문화를 가진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도시와 농촌 모두에게 소중한 의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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