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면 딱 좋은' 성평등교육

익산 원서두·하단마을서 ‘성평등한 마을 만들기 교육’ 진행

평생 처음 들어보는 말 ‘성평등’ … 여성농민 정책도 알게 돼

  • 입력 2023.11.12 18:00
  • 수정 2023.11.12 20:59
  • 기자명 김수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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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모처럼 마을 경로당은 활기가 넘쳤다. 지난 6일 전북 익산시 삼기면 원서두마을(19명)과 낭산면 하단마을(12명) 경로당에서 각각 진행된 ‘성평등한 마을 만들기 교육’에 참여한 주민들은 하나라도 놓칠라 강의에 집중했다.

이 교육은 지난달 6일부터 12월 15일까지 익산시 바이오농업과가 지원하고, 농촌특화형 성평등교육 전문강사단(강사)이 진행한다. 강사인 김덕지·이현숙씨와 최순이 익산시여성농민회 부회장이 이날 교육을 이끌었다. 이들 모두 익산에서 농사짓는 여성농민이니 진짜 농촌을 잘 아는 '농촌특화' 강사인 셈이다.

두 강사는 이날 주민들에게 “성평등교육 한다고 하면 대부분 여성인권만 올리는 걸로 생각하는 데 절대 아니다. 다 같이 좋아지는 게 성평등이다(김덕지)”, “성평등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자는 거다. 모두가 살기 좋아지는 게 성평등이고, 누구 하나라도 좋지 않다면 그건 차별이다(이현숙)”라고 힘줘 말했다. 김덕지 강사는 오전에 원서두마을, 이현숙 강사는 오후 하단마을에서 각각 강의했다.

교육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주민 눈높이에 맞춰 일상에서 다르다와 틀리다를 적용해야 하는 상황을 통해 ‘성평등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란 개념부터 ‘차이와 차별’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농촌사회에서 가장 흔히 접하는 ‘며느리 차별’이나 ‘고정된 성역할’ 같은 대목에선 여기저기서 ‘바뀌는 게 좋지’, ‘요샌 그러면 안 돼야’, ‘시골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바꾸간디?’, ‘노력하라고 이렇게 와서 강의도 하잖여’라고 맞장구쳤다. 이번이 두 번째 교육인 원서두마을이나 이날이 첫 교육인 하단마을 주민 모두 판소리에 추임새 넣듯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오랜 가부장적 관습과 인식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원서두마을에서 교육이 시작될 무렵, 주민들이 경로당 안방에 모였을 때 모습이다. 여성들은 문 쪽 구석에 몰려 앉았고, 남성들은 널찍한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이를 그냥 넘기지 않고 이현숙 강사가 격의 없이 친근한 말투로 “엄마들은 맨날 구석에 앉아. 불공평하게”라고 말하니, “거긴 아저씨들 자리여”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도 여성 주민들은 겸연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소파 쪽으로 옮겨 앉았다.

하단마을 교육에선 이현숙 강사가 “우리 때는 며느리라는 이유만으로 많이 차별받았다. 얼굴도 모르는 조상들까지 돌보느라(제사) 고생 많았지 않나. 그래도 며느리이니 당연하다고만 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윤왕순(86)씨가 “요샌 시어매하고 며느리 사이가 바꿔 됐어. 옛날에는 죽어라고 빌면서 다 했는데 지금 며느리덜은 그러덜 안혀”라고 받아쳤다. “옛날처럼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바뀌는 게 좋아요?” 이현숙 강사가 묻자 흔쾌하게 이어지는 윤씨의 답변, “아 바뀌는 게 조오치.”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이현숙 강사는 “성평등은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 바로 덧붙였다.

지난 6일 전북 익산시 낭산면 하단마을에서 열린 `성평등한 마을만들기 교육'에서 마을주민들이 이현숙 강사의 안내에 따라 신문을 뭉쳐 종이상자에 던지고 있다. 이현숙 강사는 “엉덩이를 바닥에서 떼지 않고 종이 뭉치를 던져 한 번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와서 던지면 확률이 높다”며 “평등이란 건 이와 같다”고 덧붙였다. 한승호 기자
지난 6일 전북 익산시 낭산면 하단마을에서 열린 `성평등한 마을만들기 교육'에서 마을주민들이 이현숙 강사의 안내에 따라 신문을 뭉쳐 종이상자에 던지고 있다. 이현숙 강사는 “엉덩이를 바닥에서 떼지 않고 종이 뭉치를 던져 한 번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와서 던지면 확률이 높다”며 “평등이란 건 이와 같다”고 덧붙였다. 한승호 기자

“평등? 하나도 몰랐어 … 똑같이 들일 허고도 여자니까 집일 혼자 다 하고…”

교육에 참여한 주민들 대부분은 성평등이란 말을 이날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평생을 농사일과 가족 돌봄에 바친 70~80대 여성들, ‘힘들어도 그냥 살아야 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성평등은 낯설지만 반갑고도 새로운 각성을 주는 말 같았다.

“몰르는 거 아는 것이 제일 재밌네. 이런 교육받는 것도 하나도 몰랐어. 다음에도 또 들어야지(김정애, 83).”

“들어서 나쁠 건 없어. 나이 먹어도 배울 것이 많어. 어디 가봐, 뭐 물으면 몰러. 쌀끔(값)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고오, 농촌 사람들 못 살겄오. 거 데모 좀 혀야 혀(윤왕순, 86).”

“평등을 배운 게 좋았어. 평등이라곤 안코 살았거든. 그러는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평등 같이 가야 헌게. 옛날에는 똑같이 들일 허고 와서도 집일을 여자니까(우리 주인 양반은 더 했어) 다 혼자 허야고, 그런 게 많이 힘들었어. 요새는 그게 아니제, 난 아들만 넷이라, 같이 하라고 해. 지금은 그렇게 해야 돼. 여기는 상 다 놓고, 남자들이 늙었어도 당신들이 직접 밥그릇도 가져다 놓고 그래. (교육을) 정기적으로 하니 알아듣기도 쉽고 좋아. 안 들은 거보다 훨씬 낫소(최복희, 82).”

“내 아들 귀하면 남의 딸도 와서 산 게 귀한 게 같이 허여지. 어떻게 혼자 하라고 그래? (아들들이) 집에 오면 설거지 하라고 혀. 사위도 우리집 오믄 자기가 다 하대. 사위는 남의 식구라 설거지하라 못혀. 지덜이 가서 치우면 모를까. 근데 아들한텐 ‘니가 치워’ 이러지(곽영순, 82).”

이날 교육은 고정된 성역할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불평등한 농업정책과 농촌소멸, 식량주권 문제로까지 확장됐다.

농민인구 약 200만명 가운데 여성농민이 절반을 넘지만, 농업경영체를 등록해 농민으로서 직업을 인정받는 경우는 미미하다. 이 또한 대부분 남편 사망으로 자연 승계된 것이다. 농사 경력에 대한 직업적 전문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불합리함, 같은 일을 해도 여성농민의 임금이 남성농민보다 적은 문제, 극심한 도농 격차와 턱없이 낮은 농업소득, 가부장적·배타적 문화로 청년인구가 농촌에 들어오지 않는 현실, 똑같이 농사지었어도 남편 앞으로만 나오는 농민수당(전북도는 농가당 지원), 국제적 식량위기 시대에도 식량자급률은 물론 농민, 특히 여성농민을 도외시하는 농정기조, 건설노동자보다 위험요율이 높지만 농민은 산업재해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현실 등까지 폭넓게 공유됐다. 농촌 성평등 교육은 농업·농촌, 농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문제인 것이다.

“여성농민이 없으면 농사 못 짓는다. 논농사는 몰라도 밭농사는 못한다. 여성농민이 혼자 농사지어도 먹고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여성농민의 숙련된 기술과 경험을 인정받아야 한다.” 열정적 강의에 한창 진지한데 누군가 “(나이가 많아) 우린 끝났어!”라고 외치니 다들 웃음이 터졌다. 김덕지 강사는 “옆 마을에 92살 된 언니가 나는 왜 생생바우처(전북도가 만20세 이상부터 만75세 미만 여성농민에게 지원) 안 주느냐고 항의하더라고요. 안 끝났어요”하고 화답했다. “후배들을 위해서 나서줘야 해요. 나이 들어서 필요 없다고 하실 순 있으나 농촌에 들어와서 뒤를 이어 농사짓겠다고 하는 젊은이들에겐 정말 필요해요.” 미래세대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이현숙 강사의 부담스러운 호소도 가요 ‘내 나이가 어때서’를 한 자락 곁들이니 유쾌한 공감이 이어진다.

김덕지 강사는 “손가락 굽어지게 일해도 입에 들어가는 게 별로 없으니 우리 자식들도 안 한다고 한다. 이게 농촌의 현실인데 이대로 끝나야 할까? 밥은 누구나 먹어야 한다. 식량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린 농촌을 지켜야 하고 다음 세대가 와서 농업을 이어가야 하는데, 농촌에 오지 않는 이유가 농사지어서는 먹고살지 못한다는 인식이 박혀서다. 이걸 우리가 깨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농촌의 내일을 향한 이들의 여정에 ‘딱 좋은 나이’ 따윈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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