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인증제 혁신 위해 상처 딛고 일어선 농민들

  • 입력 2023.02.12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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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억울한 농민 잡는 현행 친환경인증제의 혁신을 위해 농민들이 직접 나섰다. 누군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 ‘친환경인증 취소처분’을 뒤집어냈고, 누군가는 인증제 혁신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조직화에 나섰다. ‘운명’이라 규정된 것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농민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친환경농민이 더는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고 행복하게 농사짓는 것’이다.

행심위에서 처음으로 받아낸 ‘인증취소의 취소’ 판결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18년째 유기농 감귤농사를 지어온 김영란(오른쪽)·이성호씨 부부가 농장의 감귤나무를 둘러보고 있다. 한창 탐스러운 감귤이 저 나무에서 자라나야 할 철이지만, 지난해 8월 억울하게 인증취소를 당한 김씨 부부는 농사까지 중단한 채 결백을 증명하고자 동분서주해 왔다.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18년째 유기농 감귤농사를 지어온 김영란(오른쪽)·이성호씨 부부가 농장의 감귤나무를 둘러보고 있다. 한창 탐스러운 감귤이 저 나무에서 자라나야 할 철이지만, 지난해 8월 억울하게 인증취소를 당한 김씨 부부는 농사까지 중단한 채 결백을 증명하고자 동분서주해 왔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귀농해 유기농 감귤 농사를 지어온 김영란·이성호씨 부부. 그들에게 2022년은 억울함과 분노, 자존감 상실로 점철된 한 해였다.

지난해 5월 25일, 김씨 부부는 한 인증기관에 친환경인증 갱신 신청을 했다. 인증 갱신 과정에선 농장에서의 시료 채취를 통해 농약성분 검사를 해야 하기에, 인증기관은 지난해 6월 28일 김씨 부부 농장에서 시료를 채취해 잔류농약 분석을 했다. 분석 결과, 시료에선 뷰프로페진 0.081mg/kg, 클로르페냐피르 0.011mg/kg이 검출됐다. 인증기관은 농약이 검출됐다며 지난해 8월 4일 김씨 부부에게 유기농인증 취소처분을 통보했다.

자신들은 치지도 않았던 농약.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며 ‘건강하고 생태친화적인 감귤’을 생산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18년을 버틴 부부에게, 감귤에서 농약성분이 검출됐다는 ‘낙인’은 그 자부심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김씨 부부는 인증기관에 인증 재심사를 신청하면서, 세 번의 시료 채취를 통한 비교분석 및 자신들의 억울함을 소명할 청문회의 실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인증기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씨 부부는 직거래로 감귤을 팔아왔다. 인증취소 처분으로 인해 감귤은 더 이상 유기농인증 표시를 붙여 팔 수 없게 됐다. 사실상 판로가 끊긴 셈이다. 김씨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직원들은 우리가 인증취소 처분받은 건 언제 알았는지, 우리 농장을 방문해 감귤상자의 ‘유기농’ 글귀와 유기농인증 표시를 가리는 스티커들을 붙였다”며 “(농관원은) 인증취소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할 땐 별 반응이 없더니 그런 조치는 정말 발 빠르더라”고 토로했다.

사실 김씨 부부의 ‘비의도적 이유로 인한 친환경인증 취소’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15년과 2020년에도 치지 않은 농약의 성분이 농장에서 검출됐다. 당시 김씨 부부는 중앙행정심판위원회(행심위) 및 농관원 등을 돌아다니며 탄원서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당시엔 그대로 인증취소를 당했다.

지난해 세 번째 인증취소를 당한 뒤, 김씨 부부는 행정사를 찾아다니며 인증기관의 처분이 어떤 점에서 잘못됐는지를 살폈고, 자신들이 농약을 치지 않았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농업기술센터, 제주도농업기술원, 농관원 제주지원, 그 밖의 각종 농업 관련 연구기관 등등 갈 수 있는 곳, 못 갈 곳을 안 가리고 다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그들이 입증하려던 것은 농약 검출의 원인이 ‘인접한 일반농가로부터의 농약비산’이라는 점이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인증취소 처분 이후 농사고 생계고 다 포기한 채 결백을 증명하고자 곳곳을 돌아다녔다”며 “그 ‘입증’ 과정은 전적으로 우리 부부의 몫이었다. 정부도, 인증기관도 결백을 증명하려는 우리의 목소리를 사실상 외면하고 있었다. 모두가 우리에게만 ‘농약 안 쳤다는 증거를 찾아오라’고 하더라”고 회상했다.

지난해 10월 26일, 김씨 부부는 다시 행심위를 찾아 인증기관이 내린 ‘유기농산물인증 취소처분의 취소’를 청구했다. 지난해 12월 20일, 행심위는 김씨 부부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왜일까?

행심위는 결정서에서 “「친환경농어업 육성 및 유기식품 등의 관리·지원에 관한 법률(친환경농어업법)」제24조 1항은 인증기관이 인증을 취소하려는 경우 사업자(농민)에게 의견제출 기회를 줘야 하고, 해당 사업자가 청문을 신청하는 경우 청문을 해야 한다고 규정”함을 언급하며 김씨 부부의 인증 재심사 신청 및 청문회 실시 요구를 받지 않은 해당 인증기관이 친환경농어업법 제24조 1항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한편 김씨 부부에게 인증취소 처분을 내린 인증기관은 해외 논문을 인용하며 행심위 측에 “강제적인 송풍장치 실험(바람세기 4km/s) 조건 아래 (재배 과정에서 농약의) 비산이 쉬운 키 작은 작물인 상추·딸기·토마토에서도 20m 거리에선 비산량이 최대 260배 감소했던 바, 20m 거리 이상에선 유의미한 비산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행심위는 이에 대해 결정서에서 “피청구인(인증기관)이 제시한 논문은 바람 방향에 대해 수직으로 설치한 분무대 장치를 이용한 실험이고, 이 사건의 경우는 인접 관행필지에서 사람이 동력 분무기를 사용하는 환경이라 두 경우가 같은 조건이라 보기 어렵다”고 한 뒤 “비산은 주로 물방울 크기와 노즐 형태, 분무 압력 등에 의해 결정되고, 직경 0.15mm 이하의 미세 물방울은 낮은 풍속에서도 20m 이상 이동한다고 돼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중략) 표류 비산에 의한 오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적시했다.

친환경인증제도를 혁신하는 사람들

김영란·이성호씨 부부처럼 억울한 인증취소 피해를 당한 농민들의 사례는 그동안 수없이 많았으나, 인증기관의 친환경인증 취소처분에 대해 행심위가 직접 취소 판결로 인증취소 처분을 뒤집은 것은 김씨 부부 사례가 최초다.

각지의 친환경농민들은 이에 고무받아, 농민에게만 입증 책임을 묻고 농민을 사실상의 범죄자 취급하는 친환경인증제를 이참에야말로 혁신해야 한다고 나서는 중이다. 지난해 10여명의 농민·도시민이 모여 결성한 ‘친환경인증제도를혁신하는사람들(대표 김하동, 인혁사)’이 이에 앞장서는 조직 중 하나다.

경북 상주에서 유기농 토마토 농사를 짓는 김하동 인혁사 대표는 지난해 6월말 인증갱신을 위해 심사받던 중 인증기관이 토마토로부터 떠간 시료에서 잔류농약이 검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검출량이 0.01mg/kg 이하면 ‘불검출’로 간주되는데 김 대표의 토마토에선 0.014mg/kg이 나왔다는 것이다. 20여년 간 농약·화학비료 한 번 사용하지 않은 농지, 암반 관정에서 퍼 올린 지하수를 사용하는 농지, 5년 전 산에서 퍼온 깨끗한 흙으로 객토까지 한 농지에서 농약이 검출됐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김 대표는 이때를 회상하며 “그동안 농사지어온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심정이었다”며 “그 전에도 그랬지만 그때 이후 ‘언제 다시 내 의도와 무관하게 농약이 검출될까’라는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불안감 속에서 농사짓는 건 그 자체가 ‘폭력’이고 농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문제다. 이에 각지에서 불안감 속에 살아가는 농민, 또는 억울한 피해를 당한 농민들의 목소리를 모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인혁사 결성 계기를 밝혔다.

김 대표는 전국 각지의 친환경농민 중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찾아 나섰다. 각지에서 혼자 억울함을 ‘입증’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또는 ‘입증해봤자 소용없다’며 자포자기하던 농민들이 인혁사에 모이기 시작했다. 호응한 동지 중 한 명이 제주도의 김영란씨였다. 인혁사는 계속해서 동지들을 모을 예정이다.

인혁사는 지난달 20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최근 비산 및 각종 원인 불명의 이유로 벌어진 잔류농약 혼입으로 친환경인증 취소농가가 늘어나는 상황을 거론하며 “이제 이 땅 어디에도 친환경농업의 안전지대는 없다. 친환경인증제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합성농약 성분은 검출되지 않을 것’이라는 친환경농어업법 시행규칙 내용은 현실을 외면한 법 조항일 뿐이다. 이를 근거로 자신이 뿌리지도 않은 농약이 검출된 농민을 단죄하는 행위는 정의롭지 않다”고 한 뒤 “정부는 소비자를 위해 안전한 농산물을 가려낸다는 이유로 농약검사를 점점 늘려가며 기준을 강화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기후변화, 이동수단의 발달 등으로 병해충이 급속히 늘어나고, 농촌 고령화와 일손 부족으로 농기계 사용이 빈번해지며 공동방제와 드론을 이용한 방제 등이 늘어나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정황근)는 오는 22일까지 친환경농어업법 시행규칙 개정을 위한 농민 의견을 수렴할 계획인데, 이와 관련해 인혁사는 친환경인증제 혁신을 위해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걸고 있다.

1. 뿌리지 않아도 농약은 검출될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무고한 농민의 인증취소 방지를 통한 친환경농업 지속 방안 마련.

2. 친환경농어업법 시행규칙 및 고시의 ‘합성농약 성분은 검출되지 않을 것’ 조항 삭제.

3. 친환경농어업법 제2조 정의에 반하여 농약잔류검사 내용 중심으로 구성된 친환경농어업법 시행규칙, 농관원 고시의 심사방법을 ‘생산과정을 평가하는 심사방법’으로 전면 개정.

4. 인증기관을 관리·감독할 전문성을 갖춘 독립적 인정기구 설립.

인혁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친환경농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김영란씨는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억울하게 인증취소 당하고도 체념하며 친환경농사 자체를 포기하려는 농민들이 있을 테다. 포기하지 마시라. 계속 친환경농사 지으시라. 함께 싸워서 인증제도를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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