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
한 달 전 죽창을 들고 나락을 불태웠던 정읍시 농민들이 이번엔 벼가 가득 담긴 톤백을 읍·면사무소 15곳에 적재했다. 지난 25일 오전 8시 무렵 신태인읍사무소 앞 주차장에는 이미 스무개 남짓한 톤백이 쌓아 올려졌고, 이날 하루 끝엔 100여개의 톤백이 거대한 벽을 이뤘다.
죽창을 든 지 한 달여 만에 농민들이 다시 나락을 쌓아올린 이유는 쌀값 폭락에 대한 책임을 정부에 묻기 위해서였다. 정읍 농민들은 ‘쌀 소비가 줄고 있는데 농민들이 벼를 많이 심어 시장 논리에 의해 쌀값이 폭락했다’는 정부 논리를 새빨간 거짓말이라 일갈하며 작금의 쌀값 폭락은 물가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정부가 의도적으로 시장격리를 미루고 수입쌀을 무차별적으로 방출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트럭과 트랙터 등으로 적게는 1~2개에서 많게는 10개의 톤백을 날라 읍·면사무소에 쌓은 정읍 농민들은 어려운 농촌 현실을 토로하며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여전히 수확이 진행 중인 까닭에 농민들은 나락 적재 투쟁에 참여한 뒤 다시 논으로 향하기 바빴고, 정읍시농민회 정책실장이자 6만6,000평 규모로 쌀 농사를 짓는 농민 박형용(45)씨 또한 이날 오전 면사무소에 나락을 쌓은 뒤 다시 논으로 달려가 수확 작업에 매달렸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있는 박씨의 경우 자경 비율이 여타 농민에 비해 높은 편이어서 그나마 상황이 낫지만, 그 역시 쌀값 폭락과 생산비 상승으로 인한 타격을 피하진 못했다.
박씨는 “정읍시농민회가 산출한 올해 논벼 생산비만 봐도 농지 임차료가 전체 생산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걸 알 수 있다. 지난 9월 25일 정부 시장격리 물량 발표 전에는 최대치로 떨어진 쌀값 때문에 직불금까지 보태야 농지 주인에게 임차료라도 줄 수 있다는 말이 오갈 정도였다”라며 “미봉책인 시장격리 발표 이후 소폭 오른 쌀값은 농민들의 적자 폭을 미약하게 줄였을 뿐이고, 생산량마저 평균 10~15% 줄어든 현재 농민들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읍시농민회에 따르면 올해 1,200평 한 필지당 논벼 생산비는 466만6,000원이다. 농가 인건비는 제외한 금액이며, 이 중 농지 임차료가 240만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1,200평당 40kg 75포대의 벼가 생산되기 때문에 40kg 논벼 한 포대의 생산비는 약 6만2,213원 정도로 계산된다. 하지만 9월 25일 시장격리 발표 전만 하더라도 농협의 40kg 벼 우선지급금이 4만원에서 4만5,000원 수준일 거란 얘기가 돌았다고 한다. 농민들의 큰 손실이 우려된 이유다.
시장격리 발표 이후 쌀값이 살짝 반등하긴 했지만, 문제는 올해 수확량이 1,200평 한 필지당 67~68포대 수준으로 파악된다는 점이다. 포대당 생산비가 오를 수밖에 없는 여건이고 쌀값도 여전히 지난해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농가 여건이 나아졌다고 평가하기에는 시기상조다.
박씨는 “지금 정읍에선 우선지급금이 5만5,000원으로 결정됐는데 쌀값이 더 올라도 본전치기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문제는 지금의 양곡관리법과 시장격리로는 쌀값과 수급 정책을 안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며, 이게 바로 오늘 나락적재 투쟁을 한 이유다”라며 “양곡관리법이 시장격리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에선 시장격리 물량을 칼자루처럼 쥐고 마치 농민에게 시혜를 베풀 듯 인심쓰는 척을 하고 있는데 농민들은 거기에 농민들의 운명을 맡길 생각이 없다. 쌀 생산비가 보장되는 법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울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나락적재 투쟁에 나선 정읍 농민들은 “쌀값 폭락의 책임은 당초 잘못된 양곡관리법을 만든 더불어민주당, 뒷북격리로 쌀값을 하락시킨 농림축산식품부, 새로운 양곡관리법을 반대하는 국민의힘과 윤석열 대통령 모두에게 있다. 또 해마다 40만톤 이상 강제로 들이는 TRQ 수입쌀과 개방농정이 쌀값 폭락의 근본 원인이다”라며 “농식품부가 90만톤 시장격리를 뒤늦게 발표했지만 이는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잘못된 법제도와 정부 관료의 손에 농민들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 이에 농민들은 128년 전 동학농민군처럼 다시 죽창을 들고 정부와 사생결단의 싸움을 할 것이며 쌀값을 농민들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읍시농민회는 내달 9일 정읍시청 앞에서 다시 한번 나락 적재 투쟁을 전개할 방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