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길거리의 무인 공중전화만을 공중전화로 인식하고 있으나, 우체국에 찾아가서 걸었던 시외통화가 바로 그 이전 단계의 공중전화였다.1960년대 초, 충청남도 홍성 우체국에 한 노인이 들어선다.“할아버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대전에 있는 큰아들한테 전화 걸라고 왔는디…”“아드님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요?”노인이 주머니에서 ‘대전 1328번’이라 적힌 종이쪽지를 꺼내 보인다.“연결되면 말씀 드릴 테니 저 쪽에 앉아서 기다리세요.”그 사이에 대기석에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일어나서는 직원에게 따진다.“어이, 아가씨, 서울 전화 신청한 지가 두 시간이 다 돼가는 성부른디, 어치케 된 겨?”“아직 연결 안 됐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기차가 도착했다. 개찰구를 빠져나온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가는 곳이 있었다. 서울역 광장의 염천교 쪽 언저리에 늘어선 공중전화 부스였다. 줄잡아 열 몇 대나 되는 전화기들 앞엔 순식간에 긴 줄이 늘어졌다. 잘 도착했다고, 부재중에 별일 없었느냐고, 곧 들어갈 것이라고, 혹은 지금 막 도착했으니 마중 나오라고…할 말이야 많지만 ‘용건만 간단히’ 해야 했다.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 했었네 /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이장희의 )유행가니까 망정이지 번잡한 시내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번호판과 씨름해가며 받으면 끊고 또 걸고 하는 장난질을 하며 죽치다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 몰매 맞기 십상이었다. 그렇잖아도 새치기를 했느니 안 했
1960년대 후반, 졸업식이 열리는 어느 시골 국민학교.학부모 뿐 아니라 동네 유지들까지 모여들어 아침부터 교정이 잔치 분위기로 넘쳐났다.“에, 또…육개성상(六個星霜)을 묵묵히 극복하고 드디어 오늘 졸업의 영광을 안은 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장차 이 나라의 동량(棟梁)으로서…”대개 교장선생님의 축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냥 ‘6년 세월’이라 하거나 ‘나라의 기둥’이라 하면 될 것을, 어쩔 수 없는 한문세대인 어른들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축하의 말씀마저 꼭 그렇게 어려운 말을 앞세웠다.흰 건반 서넛이 빠져나가고 검은 건반 두어 개도 고장이 난 낡은 풍금은 그 날도 여전히 제 소리를 찾지 못 하고 삐걱댔지만, 풍금 앞에 앉은 3학년 선생님은 오늘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
내겐 국민학교 때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졸업기념 단체사진을 비롯해서 몇 차례 사진기 앞에 섰던 것 같기는 한데…어쨌든 없다. 그런데 30대 후반 무렵에 우연히 고향 동무네 집에, 초등 동창생 서넛과 함께 초대를 받아갔는데, 집주인 녀석이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나왔다. 4학년 때던가 교실 앞 화단에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난 보자마자 뒷줄 한가운데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앞줄 끝에 있는 누군가를 가리키며 “이거 너지?” 그랬을 때 “아니, 난 그날 학교 안 갔어!” 그래버렸다. 행색이야 다들 비슷비슷했지만, 그야말로 남루가 뚝뚝 듣는 꾀죄죄한 모습을 보니(게다가 무슨 불만이 있었던지, 아니면 햇살이 부셔서 그랬던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빡빡머리의 꼬
통계에 의하면 1965년도의 초등학교 교원 1인당 학생 수는 62.4명이었고, 1970년도의 초등학교 학급 당 학생 수는 62.1명이었다. 전국 평균치가 그러했다는 얘기고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 초등학교의 경우 80~90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나마도 교실이 태부족하여 1970년도의 조사 통계에 의하면 당시에 2부제 수업을 실시하던 초등학교 수가 2,688개교에 이르렀다. ‘오전반-오후반’ 혹은 ‘아침반-점심반’이라는 말이 일상어로 통용되던 시기였다.건조하게 통계숫자 들이대지 않더라도, 교실은 하나인데 무려 84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입학한 나의 섬마을 초등학교 시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안 되겠다. 책상하고 걸상을 전부 복도로 내 가야겠
교사 (분필로 칠판에 그리거나 두드리며) 그러이께네 5에다가 7을 보태마 얼마제? 여기 알사탕 일곱 개가 있는데, 열 개가 될라카모 얼매가 모자라노? 세 개 모자라제? 저기 있는 다섯 개에서 사탕 세 개를 이짝으로 갖고 와보자. 그라모 저기는 두 개가 남제? 그래서 답은 열 개 하고도 두 개, 12가 된다카이. 그래도 모르겄나? 이런 멍충한 자슥들!효과 (아이 울음소리)교사 영순아, 퍼뜩 복도에 나가서 아 좀 달래갖고 온나. 시끄럽워서 수업을 할 수가 있나.소년 (출입문 열고)헹님아, 아부지가 공부 그만하고 퍼뜩 와서 소 꼴 베러 가라 카드라!효과 (아이들, 까르르 웃음)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신이, 청석골의 예배당을 빌려 야학을 열었던 일제강점기의 얘기가 아
모르긴 해도 나라 전체를 통틀어서, 그 수가 가장 많은 친목모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초등학교 동창회’가 정답일 것이다. 같은 학교 졸업생 전체가 대상이 되는 총동창회에서부터, 졸업 연도별로 끼리끼리 모이는 동기동창회, 더 작게는 ‘몇 학년 몇 반 반창회’라 부르는 소모임에 이르기까지, 초등학교 하나에만도 졸업생들의 모임이 그 학교의 유리창 수만큼이나 많았다. 동창회가 열리는 날이면 모처럼 시골 초등학교 교정이 덩치 큰 어른들로 복작거렸다. 옛 시절에 그랬다는 얘기다.그러나 산업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고향 마을에서 6년 동안의 기초 의무교육을 마친 졸업생들 대부분이 타 지역으로 뿔뿔이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정작 시골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동창모임은 고향에 남아 있는 몇몇 졸
1972년에 이염휘는 인천세관으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인천은 우리나라 제2의 항구답게 여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형선박들의 출입이 잦았다. 그 무렵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주요 밀수 품목은 보석류와 시계, 카메라 등속이었다. 특히 시계밀수가 성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서울의 남대문시장에서 거래되었다.“여수에서는 통관 절차를 받을 배가 어쩌다 한 척씩 들어오는 데다, 대부분 소형 화물선이어서 한바탕 후다닥 뒤지면 ‘임무 끝’이었는데, 이놈의 인천항 배들은 워낙 덩치가 커서 배 한 척 수색하려면 한나절이 금세 지나간다까요. 밀수 제보가 접수된다 해도 배 한 척에서 24시간 철야로 하역작업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그걸 지켜봐야 했으니 막막하더라고요.”자, 그러면 이염휘 조사관 일행을
여수세관 밀수단속반 반장 책상의 전화가 울린다. 신고 전화다. 통화를 마친 반장이 출동명령을 내린다. 조사관들이 후다닥 사무실을 나섰는데, 신참 조사관이 의아해서 묻는다.“반장님, 지금 항구에 들어온 선박 없는데 뭘 조사해요?”“입항한 선박을 조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돌산도로 가는 거야.”“돌산도에는 왜…?”“어젯밤에 한 어선이 밀수품을 돌산도로 싣고 가서 대량으로 감춰뒀다는 거야. 서둘러!”세관에 신고 된 밀수 정보는 대개 정확히 들어맞았다. 분선 밀수는 일본에서 들어오는 화물선의 선원들과 현지 어선의 선주 사이에서 사전 계약에 의해 이뤄진다. 그런데 지분문제로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애당초의 선주는 빠지고 다른 사람이 가담하는 경우,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
‘분선(分船)’이라는 말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배를 나눈다?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도 않고 언어생활 일반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해상(선박) 밀수를 단속하는 세관의 조사관들 사이에서는 매우 익숙한 말이었다.1960년대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이 ‘분선 밀수’가 극성을 부렸는데, 그것은 화물선의 비창에 밀수품을 숨겨 들여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밀수 물량이 대규모였다.자, 그럼 당시 여수세관에서 밀수품 적발에 발군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이염휘 조사관의 얘기부터 들어보자.“일본을 오가는 화물선이 항구로 돌아오면 당연히 세관직원들이 배에 올라서 구석구석 까다롭게 수색을 할 거 아닙니까?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먼 바다에서 일반 어선에다 밀수품을 슬쩍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화장품이나 양산, 커피 같은 물건들은 사치품으로 분류되어서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에도 특별소비세가 부과됐을 뿐 아니라 외국산 제품의 유입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회지의 부유층 아녀자들은 일본에서 건너온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미국에서 건너온 양산을 손에 든 채, 역시 서양에서 흘러들어온 커피를 마시면서 한껏 멋을 부렸다. 일본에서 여수항으로 들어오는 활선어선에서 양산, 화장품, 커피 따위의 밀수품이 단골로 적발되었던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만일 세관 조사원에게 들키지 않고 밀수품을 ‘업자’에게 안전하게 넘길 수만 있다면 밀수꾼들은 적게는 두세 배, 많으면 대여섯 곱절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선박 밀수꾼들이 성공적으로 일을 해내기
‘고려 말의 외교관이었던 문익점이 몰래 들여온 목화씨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밀수품’이라는 취지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글쎄, 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밀수품이라 부를 만한 품목들이 없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당시 목화씨는 원나라의 금수품이었으니, 그것을 몰래 들여온 것을 ‘밀수’라 하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말하는 ‘밀수-밀수품’은 문익점의 시대와는 그 개념부터가 다르다. 단순히 금수품목을 반출하거나 들여오는 것뿐 아니라, 관세청의 공식적인 통관절차를 거치지 않고 몰래 들여오는 모든 상품이 밀수품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밀수행위다.시절마다 밀수 대상 품목들이 달랐다. 요즘이야 녹용, 보석, 마약, 중국산 농산물
『나를 보내세요』코레일이 KTX 운행을 시작하면서 내건 슬로건이다. 참 좋은 광고카피다, 생각했다. 그러나 옛적 개발연대에, 완행열차로, 그것도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 대목에 고향의 식구들에게 ‘나’를 보내는 일은 매우 고단한 여정이었다. 열차표 구하기가 1라운드였다면 진짜 전쟁은 개찰구를 빠져나가면서부터다. 좌석 지정이 안 돼 있는 완행열차의 경우 먼저 앉은 사람이 임자였으므로, 개찰구를 빠져나간 승객들은 전속력으로 승강장으로 내달린다. 하지만 객실 좌석은 재바른 승객들에 의해 삽시간에 점령되고…이제는 자리를 차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기차간에 어떻게 ‘나’를 우겨넣느냐가 문제다. “안 되겠어. 애는 이쪽으로!”젊은 여자가 승강장에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먼
1960년대 후반 이후 대도시에 본격적인 산업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농촌의 젊은이들이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줄줄이 떠났다.이 무작정 상경 붐은 경부선보다는 상대적으로 산업기반이 취약한 호남선 인근지방에서 특히 거세게 일었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귀성길에 나서는 추석이나 설 명절 때가 되면 철도당국은 한바탕 몸살을 앓아야 했다.1971년 초, 어느덧 30년 이력이 쌓인 김형배는 그해 설날을 앞둔 즈음에 용산역장으로 부임하였다. 부임한 다음 날 아침, 역무원들에게 일장 연설부터 했다.“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교통부 장관, 내무부 장관, 철도청장 명의로 귀성객 수송대책에 만전을 기하라는 공문이 연일 내려오고 있어요.
김형배는 1944년에 입대하여 ‘짠밥’을 먹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군대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7년에 군산역으로 돌아와 다시 ‘철도밥’을 먹기 시작한 이래, 몇 군데의 역을 전전하였다.1950년에 그는 대전 열차사무소 소속의 차장이었다. 대전 열차사무소에는 차장만 150명이 있었고, 차장을 보조하는 열차원이 또 그 수 만큼이었다. 그 해 6월 25일.“그날 내가 배정받은 차가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군용열차였어.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했지. 살펴보니 그날따라 화물칸에 포하고 장갑차 따위의 장비들이 잔뜩 실려 있는 거야.”그러려니 했다. 오후 4시쯤 용산역에 도착하여 숙소에 드니 공기가 심상찮았다. 부산에서 온 역무원들도 역시 군수품을 싣고 왔노라 했다. 38선 어디쯤에서 전투가
“내가 호남선 철도역만 외우는 줄 알어? 경부선도 훤하다고. 해볼까? 부산-부산진-초량-구포-물금-원동-삼랑진…알았으니까 그만 하라고? 허허허…. 역무원으로 일하자면 역 이름만 외워서는 안 돼. 거리도 알아야 하거든. 예를 들어서 군산에서 목포는 195 킬로미터, 광주는 154, 대구는 270, 부산은 395, 영등포는 276, 서울은 279, 인천은 301….”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군산역 역무원으로 출발하여 정년퇴임하기까지 평생 ‘철도밥’을 먹고 살아왔다는 김형배 노인은, 내가 만났을 때 일흔여덟 살이나 됐는데도 전국의 철도역 이름은 물론, 군산에서 각역까지의 거리를 장판지에 들기름 흐르듯 거침없이 외워 젖혔다. 다른 건 몰라도 역간 거리를 아직 술술 외는 걸 보면, 초년병 시절 일본인 역장
완행열차는 대중가요의 단골 소재다. 그 중에서도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는 호남선은 완행열차의 상징처럼 인식돼 왔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려면 무려 14시간을 부대껴야 했다.그 시절의 완행열차는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바깥풍경을 읽기에 매우 알맞은 속도였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 이제 드디어 서울을 벗어나는 구나…그래, 들판에 나락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걸 보니 가을은 가을이로구나…다음이 천안역이라는데 능수버들 휘늘어졌다는 삼거리는 어디쯤 있을까…아, 이번이 대전역이라고? 여기서 가락국수 한 그릇 먹어줘야 호남선 타는 맛이지….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나도 그랬다. 1970년대에 방학이나 명절을 맞아서 고향 행차를 한 번 하려면 이삼일 전에 순
없던 말을 새로이 만들어낼 때 그것을 ‘신조어’라고 부른다. 새로 만든 말이니 듣기에 다소 생경스럽고 엉뚱하게 여겨지는 건 당연할 터이다. 그런데 먹을거리가 뒤쪽에 놓인 다음의 복합명사형 조어들은, 아무래도 한 덩어리로 뭉뚱그리기엔 참말 뜬금없다.석회+두부, 수은+콩나물, 담배꽁초+커피, 톱밥(혹은 쇳가루)+고춧가루, 카바이드+막걸리….옛 시절 한 때 신문 사회면을 들었다 놨다 했던 활자들이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실제로 1971년에 두부를 만들 때 공업용 석회를 응고제로 사용했다 해서, 가공식품의 원조 격인 두부가 밥상에서 배척되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유명한 ‘석회 두부’ 사건이다.그 전 해인 1970년에는 악덕업자가 콩나물을 기르는 데에 수은이 다량 함유된 농약을
1970년대 중반에 예비사단의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엔 훈련소가 식당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 했다. 따라서 끼니때가 되면 소대마다 너덧 명의 식사당번이 커다란 밥통과 국통 따위를 가지고 취사반에 가서, 밥과 부식을 받아 내무반으로 날라다(추진해서) 배식을 했다.어느 날 내가 ‘짠밥’ 추진 당번병으로 차출되어서, 훈병번호 38번 녀석과 함께 국을 받아 들고 내무반으로 향했다. 그 날 메뉴는 소고깃국이었다. 국물이 꿀렁거리는 ‘식깡’을 나눠들고 한적한 모퉁이를 돌아설 무렵, 38번이 국물위에 동동 떠 있던 기름투성이의 고기 한 점을 맨손으로 건져서는 순식간에 제 입속에 넣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녀석은 그 뜨거운 고깃덩이를 한참동안 입에서 호로로, 굴리더니 도저히 못 참겠던
일제 강점기에는 물론이고 해방이후 상당기간까지도 당장 끼니 잇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먹을거리의 성분이나 위생 상태를 따질 형편이 못 되었다.우리나라에 식품위생법이 생긴 것은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도였다. 이 법에 근거해서 부정·불량 식품을 단속하였는데, 그 관련 업무는 당시의 보건사회부 관할이었다. 그런데 식품 중에서도 고기를 주원료로 하는 식육제품이나, 우유를 주원료로 하는 유가공품은 농림부에서 관리하였다. 그래서 불량식품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경우 정부 부처들 사이에 관할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왕년에 식약청 과장을 지낸 오균택 씨의 회고다.“식육제품의 경우에도 고기 함량이 50%이상 되는 제품은 농림부에서 관리하고, 그 미만인 제품은 보사부에서 관리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