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밀수⑤ 인천항에 밀수선이 떴다!

  • 입력 2017.11.26 15:33
  • 수정 2017.11.26 15:3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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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이염휘는 인천세관으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인천은 우리나라 제2의 항구답게 여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형선박들의 출입이 잦았다. 그 무렵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주요 밀수 품목은 보석류와 시계, 카메라 등속이었다. 특히 시계밀수가 성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서울의 남대문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이상락 소설가

“여수에서는 통관 절차를 받을 배가 어쩌다 한 척씩 들어오는 데다, 대부분 소형 화물선이어서 한바탕 후다닥 뒤지면 ‘임무 끝’이었는데, 이놈의 인천항 배들은 워낙 덩치가 커서 배 한 척 수색하려면 한나절이 금세 지나간다까요. 밀수 제보가 접수된다 해도 배 한 척에서 24시간 철야로 하역작업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그걸 지켜봐야 했으니 막막하더라고요.”

자, 그러면 이염휘 조사관 일행을 따라 현장으로 가보자.

인천세관 조사관실에 밀수 제보가 접수되었다. 아침에 이미 들어와 있는 어느 ○○호에 카메라 밀수품이 들어있다는 정보다. 이제 곧 하역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여수 같으면 당장 출동해서 수색에 들어갔겠지만 인천항은 사정이 달랐다. 우선 ‘워치맨’을 조심해야 한다. 하역작업을 하는 인부들이 화물을 함부로 다루거나 혹은 훔쳐갈지도 모르니까, 선박회사에서 고용한 경비원들이 24시간 경비근무를 선다.

문제는 그 경비원들이 세관 조사관들의 동태를 훤히 읽고 있는 데다, 조사관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화주(貨主)에게 귀띔을 해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조사관들이 지켜보고 있는 중에는 밀수품 보따리를 하역할 리가 없다. 그래서 조사관들은 부러 큰소리로 말한다.

“선배님들! 오늘 우리 집, 집들이 하는 것 잊어먹은 거 아니지요?” “아, 그렇지. 아이고, 벌써 여섯 시 반이네.” “집들이 선물은 뭘 사가지?” “무슨 걱정이야, ‘이인천의 성냐앙공자앙~’…그거 몰라? 성냥 사가면 되지 뭘.” “자, 어서들 퇴근하자구!”

화물선 경비원들 들으라고 일부러 퇴근하는 척 바람을 잡고 난 조사관들은, 이미 하역해 놓은 화물들의 틈바구니로 숨어들어서 잠복근무에 들어간다. 드디어 ○○호의 하역작업이 시작된다. 하지만 화물선의 선원들이 밀수품으로 짐작되는 꾸러미를 언제 내릴 것인지 기약이 없으므로 잠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여름철 부두엔 모기가 극성이었다. 무시로 달려드는 고놈들을 손바닥으로 때려잡으면서도 조심하느라 아얏, 소리도 못 지른다. 집들이 회식은커녕 모기 회식을 시켜주는 꼴이 되었다.

“선배님, 저기 저것!”

화물선에서 군용 더블백 하나가 내려온다.

“지금 덮칠까요?”

“아니, 좀 더 기다려!”

더블백이 두 개 더 내려온다.

“꼼짝 마라, 세관 조사관이다!”

현장을 제대로 잡았다. 더블백을 풀자 일제 캐논 카메라가 무려 3백 개나 쏟아져 나왔다.

시대별로 밀수 대상 품목들도 변천을 거듭했다. 70년대 중반 무렵에는 인천세관에서 카메라나 시계 말고도, 대만이나 홍콩 등지로부터 들여오는 해구환이나 우황청심환, 호골환 따위의 약제류 밀수가 성행하였다.

밀수품의 은닉 수법도 진화를 거듭했다. 더블백에 넣어 들여오는 것은 ‘여기 밀수품 들었으니 잡아 잡수!’하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다.

“그 시절 서해안이나 남해안에서 김양식장을 설치하는 데에 대나무가 많이 필요했거든요. 주로 대만에서 수입했어요. 문제는 해구환, 청심환 같은 환약들을 그 대나무 대롱 속에 감춰갖고 들여왔다는 거죠. 야아, 그 많은 대나무 구멍을 일일이 들여다보느라고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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