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공중전화① 아무도 전화 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 입력 2018.01.05 16:07
  • 수정 2018.01.05 16:1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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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도착했다. 개찰구를 빠져나온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가는 곳이 있었다. 서울역 광장의 염천교 쪽 언저리에 늘어선 공중전화 부스였다. 줄잡아 열 몇 대나 되는 전화기들 앞엔 순식간에 긴 줄이 늘어졌다. 잘 도착했다고, 부재중에 별일 없었느냐고, 곧 들어갈 것이라고, 혹은 지금 막 도착했으니 마중 나오라고…할 말이야 많지만 ‘용건만 간단히’ 해야 했다.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 했었네 /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이장희의 <그건 너>)

이상락 소설가

유행가니까 망정이지 번잡한 시내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번호판과 씨름해가며 받으면 끊고 또 걸고 하는 장난질을 하며 죽치다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 몰매 맞기 십상이었다. 그렇잖아도 새치기를 했느니 안 했느니 하며 다투기 일쑤였고, 통화가 늘어지면 “공중전화로 삼국지를 읽느냐!” 따위의 핀잔이 뒤통수에 날아들었다. 성질 급한 사내들은 아예 전화 부스에 발길질을 하기도 했다. 벌써 삼사십년 저 편의 풍경이다.

중2 겨울방학 때 난생 처음 서울 구경을 했다. 촌놈 티를 내면 안 된다 했으므로 서울말도 미리 연습하고, 애써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서울역 앞 공중전화 앞에서 난 얼어붙고 말았다.

도착하면 연락하라며 친지가 적어준 번호가 아마도 75-3587인가 그 비슷했다.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송수화기를 들고서 동전을 투입했다. 뚜우-, 신호음이 울렸다. 7을 돌리고 5를 돌렸다. 그런데 그 다음이 고민이었다. ‘75 국에 3587’이라 했는데 도대체 ‘국’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였다. 번호판에는 숫자만 있을 뿐 ‘국’도 없었고 ‘-’도 없었다. 그 대신에 0을 한 번 돌리고 3으로 넘어가야 하나? 아니면 전화기 어디를 한 번 툭 쳐야 하나…? 고민하다가 뒷사람의 성화 때문에 그만 밀려나고 말았다. 후훗, 어쩔 수 없는 촌놈이었다.

그 많던 도심의 공중전화들은 언제 사라졌을까? 쌀집이나 구멍가게의 처마 밑, 혹은 정다방이나 약속다방의 출입문 옆 귀퉁이에 놓여 있던 그 주황색 전화기들은 또 모두 어디 갔을까? 먹고 사는 일이 분주해서 그만큼 누구에겐가 전할 말이 참 많았던 시절, 우리들의 입이 되고 귀가 되어 주었던 공중전화에 얽힌 얘기들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1962년 7월, 지금의 창경궁 자리가 당시에는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이었는데, 그 곳에서 산업박람회가 열렸다. 그 박람회에 사상 처음으로 무인공중전화기 10대가 선을 보였다. 박람회장을 찾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주인도 없이 왜 전화기를 바깥에 내다놓았나?”

“쓰고 싶은 사람은 아무나 걸 수 있는…그러니까 공중전화래요.”

“그, 참, 공중변소 얘기는 들어봤어도 공중전화가 있다는 얘기는 첨 들어보겠네 그려.”

당시의 공중전화는 자석식이었다. 전화기의 핸들을 돌리면 교환원이 나오는데, 먼저 통화하고 싶은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부른 다음, 5원짜리 주화를 넣는다. 교환원이 돈 통으로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 연결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5원짜리 주화 한 개를 가지면 3분 동안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의 전차요금이 2원50전이었던 데 비하면, 통화료가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산업박람회가 끝나자, 창경원에 설치됐던 10대의 공중전화기는 광화문 등 시내 주요 거리로 옮겨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전화기가 서울 거리에서 선을 뵌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그 자석식 전화기가 다이얼식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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