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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는] 완행열차③ 전쟁 그리고…

김형배는 1944년에 입대하여 ‘짠밥’을 먹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군대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7년에 군산역으로 돌아와 다시 ‘철도밥’을 먹기 시작한 이래, 몇 군데의 역을 전전하였다.

이상락 소설가

1950년에 그는 대전 열차사무소 소속의 차장이었다. 대전 열차사무소에는 차장만 150명이 있었고, 차장을 보조하는 열차원이 또 그 수 만큼이었다. 그 해 6월 25일.

“그날 내가 배정받은 차가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군용열차였어.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했지. 살펴보니 그날따라 화물칸에 포하고 장갑차 따위의 장비들이 잔뜩 실려 있는 거야.”

그러려니 했다. 오후 4시쯤 용산역에 도착하여 숙소에 드니 공기가 심상찮았다. 부산에서 온 역무원들도 역시 군수품을 싣고 왔노라 했다. 38선 어디쯤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도 했다.

하행선을 운행하려고 오후 7시쯤 다시 용산역에 나가보니, 불과 세 시간 만에 역사의 공기가 싹 달라져 있었다. 승강장 여기저기에는 막 일선에서 후송된 부상병들이 절룩거리거나 쓰러진 채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뭔가 큰 재변이 난 모양이구나!

불길하고 섬뜩하였다. 철도청 역무원 김형배에게 전쟁은 그렇게 다가왔다.

전쟁이 터지자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모든 열차에서 객차가 사라졌다. 바꿔 말해서 모든 열차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만을 수송할 뿐, 승객을 태워 나르는 일체의 업무를 중단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6월 28일 새벽, 국방군의 공병에 의해 한강다리가 끊어져버렸다. 이제는 영등포역이 경부선이나 호남선의 상행열차가 갈 수 있는 최북단 지점이 되었다. 영등포역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려는 시민들로 연일 장사진을 이뤘다.

승객 수송은 중단되었으나 열차 승무원들은 더 분주해졌다. 후방에서 군수품을 끝없이 실어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철도청 공무원이 아니라 육군 수송부대의 장병 역할을 했던 거야.”

어느 날, 역시 군수품을 잔뜩 싣고서 대전을 출발하여 올라가고 있었는데 평택역에 이르렀을 때 역장이 나와서 운행을 중단시켰다. 영등포까지 운행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평택에서 대기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택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마침 잘 됐다, 바람이나 쐬자, 해서 바깥으로 막 나설 참이었지. 그런데 그때 비행기 한 대가 바로 머리 위로 날아오는가, 했더니 폭탄을 퍼부은 거야. 평택역 건물이 폭삭 주저앉아버리고…나도 어딘가에서 날아온 유리 파편에 이마를 맞아서 가벼운 부상을 당했어. 여기 잘 봐. 흉터 보이지?”

김형배 노인은, 자신이 이른바 ‘철도밥’을 먹고 살아온 내력 중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을 대라면, 두 말 할 것 없이 1.4 후퇴 당시 피란민을 수송했던 때였노라고 회고한다.

“아니, 그때 우리가 피란민을 수송했다기보다는, 우리가 운행하는 군수품 수송열차가 몰려든 피란민들에게 점령당했다고 봐야 할 거야.”

1951년 1월 중순 어느 날, 영등포역.

출발하기 한참 전부터 김형배가 운행할 하행선의 군용화물열차에는 피란민들이, 그야말로 송곳 꽂을 틈도 없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바깥에서는 칼바람에 눈보라가 휘날렸다. 피란민들은 수북하게 눈이 쌓인 화차의 지붕 위까지 기어오르느라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살이 살을 먹고 쇠가 쇠를 먹는 전쟁 통에, 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 하였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옛날 일인데도, 요즘도 가끔 악몽을 꾼다니까. 기차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붕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질러대는 비명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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