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완행열차① 기적도 목이 멘 목포행 완행열차

  • 입력 2017.09.15 14:07
  • 수정 2017.09.15 14:1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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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행열차는 대중가요의 단골 소재다. 그 중에서도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는 호남선은 완행열차의 상징처럼 인식돼 왔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려면 무려 14시간을 부대껴야 했다.

이상락 소설가

그 시절의 완행열차는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바깥풍경을 읽기에 매우 알맞은 속도였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 이제 드디어 서울을 벗어나는 구나…그래, 들판에 나락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걸 보니 가을은 가을이로구나…다음이 천안역이라는데 능수버들 휘늘어졌다는 삼거리는 어디쯤 있을까…아, 이번이 대전역이라고? 여기서 가락국수 한 그릇 먹어줘야 호남선 타는 맛이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나도 그랬다. 1970년대에 방학이나 명절을 맞아서 고향 행차를 한 번 하려면 이삼일 전에 순대국 몇 그릇으로라도 체력보충이라도 해야 했다. 대체로 용산역에서 밤 10시쯤에 출발하는 열차를 이용했던 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서 가본 기억이 없다. 거의 열두 시간을 서 있다 보면 피가 온통 하체로 몰려서, 다음날 아침 영산포역에 내리면 온몸이 구겨진 건빵봉지 같았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장흥의 회진포구까지 간다. 다시 통통거리는 여객선을 타고 고향 섬에 이르면 이미 저물녘이었다. 그때 바라본 고향바다는 참말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사실 물리적인 거리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 정도의 시간은 걸려야 옳다. 서울역 광장에서 남산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케이티엑슨가 뭣인가를 탔는데, 두 시간 남짓 만에 목포에 도착해 유달산 바라보며 세발낙지를 씹는다면…이건 삼천리강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도둑 심보다. 여행이 아니라 순간이동이며 속임수, 마술이다.

이런 세상인데도 기차여행에 대한 정서는 옛 것을 탐해서,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깡통맥주를 마시면서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혹은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따위를 흥얼거린다. 하지만 호남선의 비는 내리는 게 아니라 ‘나리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런 가요, 비나리는 호남선에…’ 이게 진짜다. 목포 출신인 원로 소설가 천승세가 술자리에서 내게 말했다.

“진짜로 실연을 당해서 가슴이 쓰릴 때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다가 ‘대전 부르스’라도 한 번 흥얼거려봐. 구구절절이 내 사연이지. 참말로 눈물이 나지…”

1941년 어느 날 군산역-.

아침, 일본인 역장이 사무실로 들어와 역무원들의 복장상태를 점검한다. 그런데 바로 이 날,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원으로 막 입사한 앳된 얼굴의 신입직원이 있었다. 역장이 물었다.

자넨 고향이 어디고 나이는 몇 살인가?

“충청도 서천 출신이고 올해 열일곱 살이구먼유.”

음, 지금부터 호남선 철도의 각 역 이름을 목포에서부터 한 번 외워보게.

“목포, 동목포, 임성리, 일로, 명산, 몽탄, 무안…그리고…고, 고막원, 다시, 영산포…”

그만! 자넨 국민학교도 안 다녔나?

“아니, 댕겼는디유.”

학교를 다녔다는 사람이 학교를 빼먹으면 어떡하나!

“……?”

무안역 다음은 고막원역이 아니라 학교역(鶴橋驛)이란 말이야! 지금 천황폐하의 군인들은 대동아 성전에 나가서 목숨 바쳐 싸우고 있는데, 철도수송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역무원이 기차역을 못 외운대서야 말이 되는가!

지금 일본인 역장으로부터 혼나고 있는 이 신입직원의 이름은 김형배이다. 1924년생이니 생존해 있다면 금년에 아흔세 살이다. 그를 2001년 여름에 만나 역무원으로 살아온 내력을 들었다. 호남선의 산 증인인 이 사람으로부터 지난 시절 완행열차가 실어 나른 민중의 애환을 차근차근 더듬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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