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밀수 - ② 뛰는 밀수꾼, 나는 세관원

  • 입력 2017.11.03 14:56
  • 수정 2017.11.03 14:57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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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화장품이나 양산, 커피 같은 물건들은 사치품으로 분류되어서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에도 특별소비세가 부과됐을 뿐 아니라 외국산 제품의 유입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이상락 소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회지의 부유층 아녀자들은 일본에서 건너온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미국에서 건너온 양산을 손에 든 채, 역시 서양에서 흘러들어온 커피를 마시면서 한껏 멋을 부렸다. 일본에서 여수항으로 들어오는 활선어선에서 양산, 화장품, 커피 따위의 밀수품이 단골로 적발되었던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만일 세관 조사원에게 들키지 않고 밀수품을 ‘업자’에게 안전하게 넘길 수만 있다면 밀수꾼들은 적게는 두세 배, 많으면 대여섯 곱절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선박 밀수꾼들이 성공적으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세관 조사원들이 눈치 채지 못 할 곳에 비창, 즉 비밀창고를 설치해야 했다. 반면에 조사관들의 처지에서는 밀수꾼들의 수법을 한 발 앞서서 읽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0년, 여수 세관의 신참 조사관 이염휘가 선배 조사관들과 함께 활선어 수출어선의 화물칸을 둘러보고 있다.

“이 배에 두 번째 승선해서 조사하고 있는데…여기 화물창고 구조가 뭐 달라진 것 없어?”

“글쎄요, 지난번하고 똑같은 것 같은데요.”

“쯧쯧, 그런 흐리멍덩한 눈으로 장차 세관 조사관 노릇 잘 해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잘 봐. 이 판자벽에 박힌 못이 지난번엔 벌겋게 녹이 슬어있었는데, 지금은 다 새 못이잖아. 달려가서 ‘빠루’ 갖고 와!”

조사관들이 화물칸의 판자벽을 뜯어내는 동안 선장과 선원들이 몰려와서는 왜 남의 배 창고를 다 부수려 하느냐, 손해배상 해 줄 것이냐, 하며 방방 뛰었으나 이윽고 판자벽 너머에서 밀수품이 가득한 ‘비창’이 드러나자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밀수품 저장 공간을 감추려는 선원들과 그것을 들추려는 조사관 사이의 숨바꼭질은 날로 교묘해지고 또한 진화하였다. 왕년의 세관 조사관 이염휘 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당시 활선어선의 기관실에는 커다란 기름 탱크가 둘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에 다녀오면 기름통 한 개는 텅 비게 된단 말예요. 처음에는 그 빈 탱크에다 밀수품을 숨겼는데 번번이 들키니까, 나중엔 밀수품을 비닐에 싸서는 아예 기름이 들어있는 통 바닥에다 가라앉혀 놨어요. 베테랑 조사관들이 그걸 눈치 채고 기름을 옆 탱크로 퍼 옮기고서 결국 찾아내더라고요.”

신참 조사관 이염휘에게는 감추는 선원들보다, 그들의 묘수를 간파하고 들추어낸 선배들이 몇 배나 더 신통하더라고 했다.

드디어 이염휘도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 날은, 밀수품 적발 실적 올리면 반장이 저녁에 소주 한 잔 제대로 사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화물 창고며 기름 탱크며 여기 저기 다 뒤져봐도 꽝이었어요. 분명히 우리 조사관들이 승선하기 전의 선원들 움직임을 봐서는 뭔가 감추고 있는 눈치였는데…”

그러나 현물을 찾지 못 했으니 의심이 간다는 정황만으로 어찌 해볼 수는 없었다. 빈손을 털고 배에서 내렸는데, 이염휘가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맞아, 그 빨간 나이롱 줄!”

조사관들이 다시 후다닥 배에 올랐다.

“배 이물 쪽에다 닻줄을 사려놓거든요. 그런데 그 닻줄 사이에 빨간 나이롱 줄을 묶어놓은 게 얼핏 보였어요. 그래서 선배 조사관들한테 다시 가서 살펴보자고 했지요.”

그 빨간 나일론 줄은 바닷물 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당겨 올려보니 역시 비닐에 싼 밀수품 보따리가 따라 올라왔다. 그날 저녁 술맛이 끝내줬다나 어쨌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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