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농사일이 시작되면서 적잖은 걱정 하나가 있었다. 지난 겨울 무렵부터 왼쪽 어깨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치지도 않았는데 조금씩 아픈가싶더니 옆으로 쳐들거나 뻗으면 대단한 통증이 오고 심지어 세수를 하거나 운전대를 돌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오십견이라는 증상인 듯했다. 병원에서는 어깨 관절을 감싸고 있는 조직이 닳아 생긴 병이라고 하면서 무슨 주사약을 어깨 근처 여러 곳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실 원인에 대해서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농사를 짓고 글을 쓰는 직업상 쉽게 어깨에 무리가 온 것 같다는, 아내가 짐작한 내용이 의사가 진단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일정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양의 대신 한의원을 찾아 침을 맞기 시작했다. 거의 한 달 동안 꾸
“건강한 정신이 깃든 농민 옷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농민문화로 확산됐으면 좋겠어요” 한국사회 산업화 과정의 아픔과 1980년대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을 온 몸으로 겪어온 이기연 씨. 그는 노동자 문화운동을 통해 현장과 노동자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민중미술’에서 답을 찾고 활동했다. 이후 ‘우리옷’의 우수성과 철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우리옷 브랜드인 ‘질경이’를 설립해 우리옷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옷은 살림의 문화, 농민복은 농민문화 전달통로 가능 한도숙=어려운 삶을 살아오셨지요. 풍문여고를 졸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 지인 몇 분도 이 사장님을 알고 있더군요. 학창시절에 유명했나보죠. 이기연=그림을 유별나게 그렸었
늘 그렇듯 두 계절을 지나 한 계절이 바뀌는 가을의 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그 어느 해 보다도 뜨거웠던 여름. 우리들의 낮과 밤을 점령했던 무더위와 열대야를 두 녀석이 보쌈 해 가버렸네요. 볼라벤과 덴빈의 심술 덕에 남부지방은 몇 십 년 된 소나무가 뽑히고, 운행 중이던 차량이 물에 잠기고, 등교생이 부상을 입고, 농가에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태풍 온다고 유리창에 신문지와 테이프를 붙인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서울은 조용히 지나갔지만요. 누군가는 좁디좁은 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나 먼 나라 이야기 같은걸 보면 우리나라도 참 넓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넓어서 아직 내나라 땅 구석구석도 밟아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자전거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일주하는 게 작
오늘 대한민국의 농촌은 병들어 있다고 한다. 그곳은 더 이상 뭇사람들의 고향이 아니며 도시민들의 비애와 분노를 누그리고 인간성을 회복시키기에 마땅한 곳이 아니다. 그곳도 도시와 못지않은 경쟁의 소용돌이와 자본의 예리한 칼끝이 이미 깊숙이 들어와 버린 처절한 생존의 현장이다. 여차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훌쩍 떠나야할 패배자들과 탈락자들이 끙끙 신음을 내며 농촌의 끝자락에 매달린 곳이다. 도연명(陶淵明)은 쌀 닷 말에 자신의 인격을 팔고 싶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며 ‘귀거래사’라는 시를 썼다. 물론 예전의 법도대로 한다면 현직에 있을 때만 서울에 있고 벼슬을 놓으면 시골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돌아가시기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내놓고 고향인 봉하로 내려가 농사를 지은 것이 그런 모
며칠 전, 다섯 명의 남자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50대 전후의 남자들은 모두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름을 대면 알만한 소설가이고 그런 인연으로 우리 집으로 일종의 사전 견학차 온 것이었다. 마침 복숭아를 따던 날이었고 얼추 작업도 끝난 시간이었기에 시장에 가지 못한 흠집 난 복숭아를 한 바구니 씻어와 원두막에 둘러앉았다. 학교선생을 하다가 일찌감치 퇴직한 이도 있고 도저히 무슨 일을 하며 평생 살았는지 요령부득인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농사일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귀농을 꿈꾸는 이들이라 그런지 복숭아를 먹으면서 연신 농사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가만히 들어보니 영 초짜들은 아니었다. 토양이니, 미생물이니, 효소제재니 하는 전문(?) 농업용어들을 스스럼없이 구사하며 대
누구나 그럴 테지만 내게도 정체불명의 이메일이 오곤 한다. 개인정보가 숱하게 유출되었다니 아마 그렇게 흘러나간 메일 주소로 오는 듯하다. 나는 불행히도 소통을 잘 하지 않고 사는 쪽이어서 오는 메일 대부분을 열어보지도 않고 지운다. 진짜 중요한 일은 결코 편지로 오지 않으며 인간은 평생 동안 한두 통의 꼭 필요한 편지를 받는다는 소로우의 말을 충실하게 믿는 독자인 탓이다. 그렇긴 하지만 제목이 일단 낯익으면 클릭을 하여 열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물론 그런 것들도 대개 그냥 지웠어도 좋을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내가 속한 한 작가 단체에서 온 메일을 무심코 열었다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용은, 박정희를 다룬 영화를 제작하는데 제작을 돕거나 홍보위원으로 참여해달라는 것이었다. 저명한 인사
저는 곶감으로 유명한 경북 상주시 내서면 서원리에 살고 있는 두 딸의 엄마이자 3년차 농촌 초보새댁 유미경 이라고 합니다. 처음 제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땐 아침저녁으로 들리는 개구리소리가 시끄러워 밤잠을 설쳤는데 요즘은 매미 개구리 소리가 안 들리면 어색하기까지 하네요. 대도시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상주 시내에서 살다가 곶감농사를 짓는 남편을 따라 시내와 20분 거리인 내서면 서원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곳에서 생활하기 전까진 낭만적인 전원생활처럼 쉽게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볼 일이 있을 때면 시내와 20분 거리니까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농촌생활이라는 게 그리 넉넉하지 못해 치솟는 기름 값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생각만큼 외출하기가 힘듭니다. 시내에
태풍이 자주 몰려오는 듯하다. 7월에 불어 닥친 ‘카눈’은 별 피해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번 8월 28일 태풍 ‘볼라벤’은 많은 농민들의 가슴을 쥐어뜯어 놓았다. 게다가 먼저 발생한 14호 태풍 ‘덴빈’이 대만에서 머무르고 있다가 다시 북상하며 비바람을 쳐 설상가상 피해가 늘어날까 걱정이다. 태풍이 불면 걱정근심으로 밤을 지새우는 이들이 과수재배 농민들이다. 특히 배나 사과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근심걱정은 같이 있기 불편할 정도로 깊다. 그래선지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여기저기 안부와 위로 전화가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넓은 과수원에 즐비하게 떨어진 사과나 배의 모습이 대단히 선정적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추석을 가까이 두고 수확을 눈앞에 둔 상태여서 한 개만 떨어져도 아까운데 절반 가까이 떨어지고 나
대체 어쩌자고 날씨가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가뭄에 폭염이 이어지더니 마치 장마철처럼 구구장창 비가 쏟아진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여, 지난주에 큰 비가 내릴 때만해도 이제 해갈이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햇빛 한 번 제대로 나지 않고 비가 이어지니 오히려 가뭄이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물면 물이라도 퍼서 위급을 면할 수 있지만 속절없이 내리는 비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한창 복숭아를 따는 때인지라, 수분을 빠르게 흡수하는 복숭아나무 특성상 비는 몹시 해로운 존재이다. 복숭아의 당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소비자들도 비가 많이 올 때 복숭아를 샀다가는 오이만도 못한 맛을 감수해야한다는 것을 안다. 당연히 값은 폭락하고 복숭아 과수원을 하는 나 같은 농민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값이 떨어질
5,60년대의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들, 특히 농촌에서 겪었던 사람들은 대개 끔찍했던 가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 고통받은 이야기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겠다. 나 역시 농촌에서 태어나 아버지나 주위 어른으로부터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극도의 가난과 고통의 세월을 거창의 표만수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절하게 느꼈다. 마치 찰스 디킨슨의 소설에 등장하는 근대 초기 영국의 가난한 소년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선생이 살아온 내력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가난과 고통을 뚫고 농민운동가로 거듭난 선생의 모습은 단단한 바위와도 같았다. 선생을 만난 것은 거창의 한 병원이었다. 교통사고를
나는 서울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서울깍쟁이다. 유년기까진 친구들 거의 서울태생들이었고 서울 사람인 것이 우월한 것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며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다른 환경에서 땀 흘리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번 여름에 지리산둘레길 함양, 산청 구간을 걸었다. 뙤약볕 아래를 혼자 걷다 논과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운지 수줍음 많은 내가 먼저 인사 건네고 말붙인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는데 서울에서 왔다는 말이 선뜻 나오질 않는다. 당신은 뙤약볕 아래 일하고 계신데, 왠지 미안하다.서울여성회에서 ‘횡성으로 떠나는 즐거운 초록 휴가’를 다녀왔다. 언니네 텃밭 횡
정조대왕 때 서유문이란 사람이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온 후 쓴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 보면 숭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밥을 먹고 체했는데 숭늉을 마시고 체증이 내려갔다는 이야기다. 숭늉과 관련한 이야기는 임원경제지나 개인 일기들에서 많이 나타나는걸 봐서 중요한 음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신으로 북경을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에는 숭늉이 자주 등장하는데 중국의 기름기 많은 음식에 지친 위를 개운하게 하는데 숭늉만한 것이 없었나 보다. 숭늉은 밥의 전분이 열을 받아 분해돼 ‘포도당’과 ‘텍스트린’이 생기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소화를 돕는다. 바로 ‘텍스트린’이 소화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숭늉이 우리 음식에서 사라진 것이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다. 누룽지가 눌지 않는 전기밥솥의 등장이 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