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날들

  • 입력 2012.08.27 10:19
  • 기자명 최용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체 어쩌자고 날씨가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가뭄에 폭염이 이어지더니 마치 장마철처럼 구구장창 비가 쏟아진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여, 지난주에 큰 비가 내릴 때만해도 이제 해갈이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햇빛 한 번 제대로 나지 않고 비가 이어지니 오히려 가뭄이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물면 물이라도 퍼서 위급을 면할 수 있지만 속절없이 내리는 비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한창 복숭아를 따는 때인지라, 수분을 빠르게 흡수하는 복숭아나무 특성상 비는 몹시 해로운 존재이다. 복숭아의 당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소비자들도 비가 많이 올 때 복숭아를 샀다가는 오이만도 못한 맛을 감수해야한다는 것을 안다. 당연히 값은 폭락하고 복숭아 과수원을 하는 나 같은 농민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값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물기를 노상 머금고 있는 열매에는 무름병이 번지기 십상이고 꼭지가 약해져 땅에 떨어지는 복숭아도 숱하다. 그래도 수확기에 접어든 과수원에 농약을 칠 수가 없어 두 손 놓고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이른 아침부터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복숭아를 따고 대형 선풍기로 복숭아를 말려가며 작업을 한 후, 경매장까지 트럭에 싣고 가는 일이 요즘 하루 일과다. 비가 오면 일이 두어 배는 더 힘들다. 수확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인데도 왈칵 짜증이 일기도 한다. 어제는 잠시 하늘이 개는 듯해서 택배로 보낼 복숭아 스무 박스를 트럭에 싣고 우체국에 가다가, 그러니까 고작 오 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를 가다가 비를 만나고 말았다. 아주 많이 젖지는 않았지만, 우체국 안에서 드라이어로 박스를 말리는, 평생 처음 하는 짓을 하기도 했다. 습도가 높으면 마음이 불쾌해진다고 하여 불쾌지수라는 게 있다더니, 어쨌든 유쾌하지 못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는 요즈음이다.

게다가 이번 주에는 더욱 불쾌한 일들을 연이어 겪었다. 지난 월요일, 이른 점심을 드신 아버지가 왠지 내 눈치를 보며 시내엘 다녀와야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는 이미 얘기가 된듯 서로 미묘한 눈짓까지 교환하는 게 아닌가. 아직 복숭아 작업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내게 말 못할 갑작스런 일이 있을 리 없었다. 마지못해 꺼내는 말씀이 하, 기가 막혔다. 새누리당의 선거인단이 되어 대선 후보 선출 투표를 하러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즉에 전화를 받고 선거인단으로 등록되었으면서도 아들이 그 당을 원수 대하듯 한다는 것을 잘 아는 터라 내게 숨겨온 모양이었다. 족히 수십 년은 이어진 언쟁과 설득이 무위로 돌아가고 이제 서로의 정치성을 인정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 이상 싫은 소리를 할 기운도 없었다. 잘 다녀오시라고, 그 대신 전직 대통령 딸에게 한 표를 던지는 일만은 말아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녀 외에 누가 있기라도 한지 의아한 기색이었다.

다녀온 아버지는 투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럼 그 까짓 것들 쇼하는데 사람들이 줄이라도 설 줄 아셨냐고 퉁을 주었더니, 웬일인지 아무 말씀도 없다. 독재자의 딸이 선출되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는 자신감 때문인 듯했다.

복숭아 작업을 마치고 흠집이 난 것들을 아이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마음은 영 유쾌하지 않아 단골로 가는 식당에 들러 밥과 소주를 시켰다. 젊은 부부가 종업원도 쓰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는 식당이었다. 주위의 식당들 간판이 일 년에도 두어 차례씩 바뀌는 불황속에서도 칠년 넘게 한 자리에서 버티는 곳이었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식당 안에는 나밖에 없는데,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역시 새누리당의 후보선출 이야기가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푸 소주잔을 뒤집는 중에 식당 주인 부부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부부가 바로 아버지가 찍은 그녀를 찬양하는, 무지몽매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입맛이 떨어진 나는 서둘러 남은 소주를 마시고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