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이름

  • 입력 2012.09.03 09:13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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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럴 테지만 내게도 정체불명의 이메일이 오곤 한다. 개인정보가 숱하게 유출되었다니 아마 그렇게 흘러나간 메일 주소로 오는 듯하다. 나는 불행히도 소통을 잘 하지 않고 사는 쪽이어서 오는 메일 대부분을 열어보지도 않고 지운다. 진짜 중요한 일은 결코 편지로 오지 않으며 인간은 평생 동안 한두 통의 꼭 필요한 편지를 받는다는 소로우의 말을 충실하게 믿는 독자인 탓이다.

그렇긴 하지만 제목이 일단 낯익으면 클릭을 하여 열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물론 그런 것들도 대개 그냥 지웠어도 좋을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내가 속한 한 작가 단체에서 온 메일을 무심코 열었다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용은, 박정희를 다룬 영화를 제작하는데 제작을 돕거나 홍보위원으로 참여해달라는 것이었다. 저명한 인사들 여럿이 이미 참여했고 능력 있는 감독이 제작할 영화의 제목은 ‘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였다.

제목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제작자의 변에 따르면 한 시대를 미치게 만든 한 사람의 겉과 속, 생각과 말, 행동과 실천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영화란다. 대선을 앞두고 그의 딸이 유력한 후보인 상황에서 어쨌든 반가운 기획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 이름에 대한 아쉬움

다만 나는 박정희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컸다. 다카키 마사오라니? 그것은 박정희가 진정으로 원한 이름이 아니었다.

시골 소학교 교사였던 그가 ‘멸사봉공 진충보국’이라는 여덟 자의 혈서를 써서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그는 아마 다카키 마사오였을 것이다. 고목정웅(古木正雄)이라는 이름 속에는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나 있으니까. 하지만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그 스펙으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때의 그는, 이미 그 이름이 싫어졌다.

다시 사관학교를 무려 2등으로 졸업하면서, 그는 놀랍게도 두 번째 창씨개명을 한다. 오카모도 미노루(岡本實), 이게 그가 선택한 진정한 이름이었다. 이름만으로도 조선인임을 짐작할 수 있는 다카키 마사오가 아니라, 진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다운 이름, 그것이었다.

두 번씩이나 창씨개명을 한 예는 극히 드물었다. 박정희와 같은 만주군관학교 출신 몇몇이 그 중에 있다. 박정희가 오카모도 미노루로 변신한 1944년 무렵은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해 있었다. 윤동주가 감옥에서 생체실험으로 죽어가고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이재유가 고문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때였다.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 역시 젊은 목숨이 꺾였다. 그 시기에 일본군 장교가 된 자는 유난히 독립군 토벌에 큰 애착(?)을 보였다고 당시 동료였던 일본인은 증언했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다운 이름

이 두 이름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크다. 일본군 장교가 되면서 아예 뿌리부터 자신을 바꾸고자 했던 자, 늘 긴 칼의 피를 믿었던 키 작은 사내가 현대사에 드리운 암흑은 깊고 깊었다.

고문과 살인으로 지탱된 정권 아래 백성들은 숨죽이며 배부른 것이 최고라는 현실도피와 패배의식에 젖어들었다. 갑오농민전쟁과 의병투쟁, 독립운동의 헌걸찬 정신을 처절하게 짓밟은 것이 바로 유신독재였고 결국 그는 부하의 총에 갔다.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에 있음으로서 그가 그토록 원했던 종신 대통령의 꿈도 이루었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내가 만약 그의 자식이었다면 백성들 앞에 자꾸 얼굴을 비치는 일만은 하지 못할 것 같다. 대선이 가까워서일까,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분노에 휩싸이는 날이 많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처절하고 할 말도 많았는데, 어쩌나 짧은 지면은 다하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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