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늉과 커피

  • 입력 2012.08.27 09:17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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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대왕 때 서유문이란 사람이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온 후 쓴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 보면 숭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밥을 먹고 체했는데 숭늉을 마시고 체증이 내려갔다는 이야기다. 숭늉과 관련한 이야기는 임원경제지나 개인 일기들에서 많이 나타나는걸 봐서 중요한 음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신으로 북경을 다녀온 사람들의 기록에는 숭늉이 자주 등장하는데 중국의 기름기 많은 음식에 지친 위를 개운하게 하는데 숭늉만한 것이 없었나 보다. 숭늉은 밥의 전분이 열을 받아 분해돼 ‘포도당’과 ‘텍스트린’이 생기면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소화를 돕는다. 바로 ‘텍스트린’이 소화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숭늉이 우리 음식에서 사라진 것이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다. 누룽지가 눌지 않는 전기밥솥의 등장이 숭늉문화를 없애버린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파고든 것이 커피다. 커피가 우리에게 익숙하게 된 것은 자본의 놀라운 광고술이 빚어낸 작품이다. 우리나라 작년 10월 기준 커피 수입액은 5억 달러로 경제활동인구 1인당 하루 한 잔 반 꼴로 마시는 셈이다. 이는 작년 농민들이 수출한 사과, 배 등 신선과일류 대외수출총액 1억 달러 보다 5배나 많은 것이다.

정부가 농산물 수출에 목을 매고 있는 이유는 농가소득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안다. 경제이론엔 문외한이라서 잘 알진 못해도 농산물 수출은 국내 순수상품이 달러로 변하여 들어오기 때문이다. 즉 60년대 어머니들의 머리카락을 수출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수출물류비용을 지출하고라도 정부입장에서는 수출을 독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커피를 수입하는데 들어가는 외화는 농민들의 피땀과도 연결 되어 있다.

신문사 근처엔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커피전문점이 있고 점심식사 후에는 커피전문점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커피는 오래전부터 생산과정에서 노동착취가 문제 돼 왔다. 하루 1달러정도의 노임으로 노동을 착취하며 자본력으로 시장을 장악하여 농민들의 생산품을 헐값에 매입한다는 것이다. 또한 거대한 플랜트농장들의 개발로 남미의 숲이 황폐해진다는 비난이 있었다. 모두가 불편한 진실처럼 커피에 묻어있는 반노동, 반인권, 반생태에 대한 의식을 회피하려 한다.

통합진보당에 불붙은 커피 논쟁을 바라보며 개인의 욕구와 사회의 욕구는 대치 할 수밖에 없는가를 고민해 본다. 진보의 가치는 개인의 욕구가 사회의 욕구로 상승해야 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유시민 전대표의 취향을 가타부타할 이유는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본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길들여졌음을 고백해야 한다. 바로 그 커피 맛에 뇌를 저당 잡히고 있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조그만 검은 콩알에 촘촘히 박힌 자본의 음흉한 착취구조가 보이는 것을 왜 외면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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