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 피어난 운동가, 거창의 표만수

  • 입력 2012.08.27 09:3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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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0년대의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들, 특히 농촌에서 겪었던 사람들은 대개 끔찍했던 가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 고통받은 이야기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겠다. 나 역시 농촌에서 태어나 아버지나 주위 어른으로부터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소설에나 나올 법한 극도의 가난과 고통의 세월을 거창의 표만수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절하게 느꼈다. 마치 찰스 디킨슨의 소설에 등장하는 근대 초기 영국의 가난한 소년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선생이 살아온 내력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가난과 고통을 뚫고 농민운동가로 거듭난 선생의 모습은 단단한 바위와도 같았다.

선생을 만난 것은 거창의 한 병원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에 앉은 채로 선생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 셋인데 나이에 비해 깊은 주름이 살아온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 가장

표만수는 1950년 거창읍에서 칠십 리나 떨어진 외진 마을에서 태어났다. 농토가 거의 없는 가난한 집이었다. 학교는 문턱도 가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나무를 해다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했지만 그나마도 여의치 않았다. 툭하면 산림지도소에서 감시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표만수의 집에는 단속이 잦았다. 술을 담그는 것도, 잎담배를 말아 피우는 것도 모두 불법이던 시절, 표만수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서슬 퍼렇던 자유당 시절, 아버지는 늘 감시와 단속 1순위였다. 그걸 보면서 표만수는 어린 나이에 절대 야당을 하면 안 되는구나, 야당을 하면 고통을 받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열네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 가장이 된 표만수는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야 했다. 그 전에 이미 사방공사나 하천공사에 다니기도 하고 남의 집 고용살이까지 경험해 본 표만수였다. 그리고 외삼촌의 권유로 15살 때 부산으로 가게 된다. 무엇이든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작정이었다. 부산에서 처음 다닌 회사는 운동화와 고무신을 만들던 ‘진양고무’였다. 하지만 월급도 너무 적을뿐더러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고 허드렛일만 시켰다.

그곳을 나와 다시 들어간 곳은 비누와 세제를 생산하던 ‘동산유지’였다. 그 회사를 무려 9년이나 다녔다. 거친 공장일과 욕설과 발길질이 난무하고 심지어 몽키 스패너로 사정없이 등짝을 맞기도 하면서 표만수는 조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고향에 돈을 보내며 객지에서 가장 노릇을 하던 표만수가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은 이상한 이유지만 의리 때문이었다. 회사가 경영상의 어려움에 처하자 지금으로 치면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표만수는 해고 대상이 아니었지만, 함께 살며 친하게 지내던 동료가 해고를 당했다. 여러 해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온 친구가 그렇게 되자, 표만수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것이 우정이자 의리라고 생각했다.

친구와 함께 장사를 시작했다가 밑천을 모두 날리고 다시 힘든 공장들을 전전했다. 연탄공장이며 블록공장 등을 떠돌던 표만수에게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왔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독자라는 이유로 보충역을 받고 고향에 정착했다. 곧바로 들어간 곳이 거창고등학교에서 운영하던 거고농장이었다. 말하자면 농장의 고용살이로 들어간 것이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네 살 아래 여동생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다. 워낙 뛰어나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을 정도였다. 동생이 거창고등학교를 무료로 다닐 수 있도록 표만수가 농장에 들어갔던 것이다. 여동생은 이후 한신대에 입학했고 표만수를 운동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운동과의 만남

어렸을 때부터 온 가족이 교회에 다녔다. 장애를 가진 동생을 위한 것도 있었고 교회에서 느끼는 따뜻함과 구호물자 배급을 받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교회의 주일학교에는 절친하게 지내는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백형찬과 장경도라는 친구였다. 날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놀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백형찬이 일주일이나 말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농협에 큰 문제가 있으며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농민들이 조직되어야 한다는 둥. 박정희가 독재정치를 하고 있다는 둥. 남이 들을까 무서운 그런 이야기였다. 그 일주일 동안 백형찬은 서울의 크리스천 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온 것이었다.

듣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야당’을 하자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두 친구에게도 교육을 권하는 것이었다. “경도한테 그랬어요. 너 교육을 갈 것이냐, 만약에 가면 나는 너하고 친구 안 한다. 결국 그 친구는 가지 않았어요. 그만큼 나는 의식도 없었고 반정부라거나 이런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그 무렵 한신대에 다니던 여동생이 방학을 맞아 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오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때 표만수는 지역 국회의원이 운영하는 대규모 사과 과수원에서 일당제로 고용살이를 하고 있었다.

 “오빠, 오빠가 일당 3,500원을 받는데, 과연 오빠는 과수원 주인에게 얼마를 벌어주는 걸까? 적어도 칠천 원이나 만원은 벌어줄 거야. 논을 소작 부치면 절반씩 나누지? 모든 노력은 소작인이 들이는데 겨우 반밖에 차지하지 못한다면 못 사는 사람은 언제까지 못 살고 잘 사는 사람들은 편히 앉아 늘 잘 사는 사회가 돼. 이런 사회는 바꾸어야 하지 않겠어요?” 동생의 말은 솔깃했다.

 서울의 동일방직 이야기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동생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데모에 앞장선다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동생은 집안이 기대를 걸고 있는 희망이었다. 표만수는 눈물을 흘려가며 동생을 말렸다. 과수원 일은 고통스러웠다. 제대로 먹지 못해 바싹 마른 몸으로 온 종일 농약을 쳐야 했다. 겨우 이십대 중반인데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씩 일어나지 못했다. 영양실조에 농약중독이었다.

약을 지어먹는 읍내의 보건약국 젊은 약사가 표만수를 늘 살갑게 맞아주곤 했다. 급할 때는 조건 없이 돈을 꾸어주기도 했다. 그를 만나며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보건약국 3층에서 크리스천 아카데미 학생 환영회를 한다는 엽서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정찬용을 만났다. 정찬용은 품목별 작목반을 만들어 그룹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이나 농민들이 제대로 배워서 권익을 되찾아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표만수는 구구절절이 옳은 이야기라고 느꼈다.

그 무렵 정부지원을 받아 키운 돼지가 가격이 폭락하여 무려 백만 원의 빚을 졌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그리고 아무 가진 게 없던 표만수에게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이었다. “정부가 양돈자금을 지원하기 전에 돼지 값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돼지에 모든 희망을 걸었는데 값이 폭락해서 돼지를 물에 떠내려 보내고 사료가 없어 산으로 내몰기도 했어요. 산에서 다시 집으로 찾아온 돼지를 안고 울기도 했지요. 그 때는 하도 분하고 억울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

결국 표만수는 77년 12월, 난생 처음 서울에 갔다. 아카데미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우재, 장상환, 한명숙 등의 강의를 들으며 표만수는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고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동안 이용당하고 골병 든 세월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4,50명이나 되는 교육생들 누구 하나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교육을 통해 표만수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곧바로 농민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동갑내기 운동가이며 큰 영향을 끼친 정찬용과 함께 농우회를 만들고 다시 표만수의 집에서 ‘아림농민회’를 창립하였다. 70년대에 지역에서 농민회를 탄생시킨 예는 극히 드물었다. 처음 30명이 조직된 아림농민회는 곧 70여 명의 회원으로 불어났고 거창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농민단체가 되었다.

▲ 가장 투쟁적이고 후퇴를 모르는 원칙주의 운동가 표만수.

투쟁의 일선으로

농민회가 한창 세를 늘려갈 때 서울에서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이 터졌다. 가르치던 교수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모습을 보며 표만수는 더럭 겁이 났다. 비록 농민회 회장이었지만 만약에 잡혀간다면 집안이 거덜 나는 판이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뒤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니나 다를까, 형사 셋이 논을 삼고 있던 표만수를 찾아왔다. 검은 세단에서 내리는 그들을 보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내가 너무 떨고 있으니까 오히려 형사가 겁내지 말라면서 담배를 주더라고. 그러면서 아카데미 받았느냐고 묻길래 받았다고 했지. 또 강사가 누구였느냐고 해서 아는 대로 댔어요. 그리고 교육내용이 뭐였냐고 묻는데, 더 이상 떨리지가 않고 나도 모르는 힘이 솟는 거야. 그 사람들 얘기 다 맞다, 왜 나한테 와서 조사를 하느냐, 정말 조사할 데는 농협이나 행정기관이다, 그 놈들 때문에 농민들이 살 수가 없다, 하고 막 말이 쏟아져 나와. 그리고 너무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예요. 나중에는 막 형사들한테 욕을 하고 분에 못 이겨 쇠스랑을 휘둘렀어. 그랬더니 그냥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거예요.”

그 일을 겪고 표만수는 가장 투쟁적이고 후퇴를 모르는 원칙주의 운동가로 다시 태어났다. 얼마 후 수배 당한 서울대 운동권 학생 하나가 표만수의 집으로 피신을 왔다. 물론 운동선상에 있던 여동생을 통해서였다. 같이 일을 하면서도 밤이면 되들이 소주를 비우며 괴로워하던 학생이 어느 날 새벽에 마당으로 뛰쳐나와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죽었다! 박정희가 죽었다!” 바야흐로 서울의 봄이 찾아왔고 위축되었던 농민회원들도 90여 명으로 늘어났다. 짧았지만 신이 나던 시절이었다. 당시 정찬용은 거창읍내에서 두레서점이라는 책방을 열고 있었다. 늘 모여서 장기도 두고 시국 이야기도 하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광주 오월 항쟁 소식을 접했다.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농민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협박과 회유, 영농자금 따위의 압박 등에 못이겨 회원들이 떠나고 결국 세 명만 남았다.

세 명은 농민운동에 호의적인 가톨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성당에 나가 청년들을 만났고 결국 가농 거창지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첫 사업으로 농가부채실태 파악에 들어갔다. 빚에 짓눌려 있던 농민들의 호응은 컸다.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면밀하게 파악한 실태를 가지고 보고대회를 열기로 했다. 1차 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실패하고 다시 경남도연맹 차원의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표만수를 비롯한 핵심활동가들은 대회 전날 성당에 들어가 준비를 하고 새벽부터 각지에서 온 농민들이 모였다.

보고대회를 마치고 시가로 진출하기로 했다. 거창에서 최초로 가두 투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표만수는 경운기를 몰고 겹겹이 둘러싼 경찰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경찰서장을 체포(?)했다. 서장의 불알을 잡고 끌고 온 것이었다. 꼼짝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는 서장에게 일장 훈시를 했다. 고운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일자무식인 농민이 서울대를 나온 경찰서장을 돌대가리라고 부른 이 사건은 거창에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다.

“나는 정말 배운 거 없고 무식합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있어요. 언젠가 마을의 노인이 내게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라고 그러더라구요. 내가 그랬어요. 맞다. 하지만 모난 돌이 사회에 나가서 정도 맞고 망치도 맞으며 제대로 된 쓸모 있는 돌이 되는 거 아니겠느냐, 나는 기꺼이 모난 돌이 되겠다. 그랬더니 계란으로 바위 치는 거래요. 하지만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 박정희가 왜 죽었느냐, 수많은 국민들이 던진 계란에 맞아서 죽은 거다, 이렇게 말했어요.” 가난하고 고통 받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삶의 지혜를 얻어낸 표만수는 비록 학교에서 배우지는 못했지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운동가였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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