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어촌개벽대행진에서 시작된 농어촌주민수당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2021년 10월, 도올 김용옥 선생과 함께 두 달 동안 전국 8개 도, 16개 시·군을 순회하며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개벽대행진’을 진행했다. 우리는 각지에서 민회를 열고, 국민 모두가 행복한 농산어촌의 새로운 전환을 위해 ‘3강 5략(3대 강령과 5대 방략)’을 제시했다. 3대 강령은 ①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촌 ②먹거리위기에 대응하는 농촌 ③지역위기에 대응하는 농촌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5대 방략으로는 ①농촌주민 행복권 보장 ②농업의 공익기여 직불금 확대 ③먹거리기본법 제정 ④농어촌주민수당 지급 ⑤농촌 주민자치 실현을 제안했다.
우리의 3강 5략은 전국 각지 민회에서 큰 지지를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반향이 컸던 것은 ‘농어촌주민수당 지급’이었다. 정부는 내년에 인구감소지역 6개 군 24만명에게 매월 15만원의 ‘농어촌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시범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정부의 시범사업 실시를 환영하면서, 이것이 조속히 본 사업으로 되어 지역위기의 소방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정명(正名)의 문제, ‘기본소득’ 아닌 ‘주민수당’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농어촌주민수당’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고, 국정기획위원회는 이를 ‘농어촌기본소득’이라고 했다. 농어촌주민수당인가 농어촌기본소득인가. 같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이름 하나가 수용성과 정치적 운명을 갈라놓는다. 공자는 “정명(正名)이 아니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기본소득’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논쟁적이다. 보편성 원칙 때문에 “부자에게도 줄 필요가 있느냐”, “막대한 재정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반발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실제로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보편적 기본소득에는 회의적이다. 그는 무상교육·무상의료·주거보장·고용안정 같은 보편적 서비스 강화가 불평등 완화에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부자에게까지 같은 금액을 주는 것은 재정낭비라고 보았지만, 아주 적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의 소득을 개선하는 기본소득은 지지했다.
나는 보편적 기본소득엔 회의적이지만 보완적·부분적 수단으로서의 기본소득은 찬성한다. 그런 점에서 농어촌주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것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 정책명이 반드시 농어촌기본소득일 필요는 없다.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사람은 말할 나위 없고 찬성하는 사람조차도, 왜 특정 지역(농촌) 거주민에게만 지급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내년은 시범사업 예산으로 1700억원이 투입되지만, 본 사업은 적어도 수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격렬한 논쟁이 예상된다.
정책의 명칭은 실질과 일치해야 한다. (농어촌)기본소득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 농어촌기본소득의 취지를 살리면서 정책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농어촌주민수당’을 정책 용어로 사용하기를 제안했다. 우리가 ‘농산어촌개벽대행진’에서 제안한 농어촌주민수당의 정식 명칭은 “국토·환경·문화·지역 지킴이 수당”이었다. 약칭 농어촌주민수당이다. 이는 단순한 현금 보조가 아니라 국토와 지역을 지켜내는 공공적 기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모든 농산어촌 주민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그러한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고, 지킴이 수당을 지급함으로써 농산어촌주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하고, 나아가 그 역할을 더 잘하도록 독려할 수 있다. 그리고 농어촌주민수당은 ‘지역위기’가 심각한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확대해 가자고 제안했다.
왜 농어촌주민에게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가-농촌주민은 ‘국토·환경·문화·지역 지킴이’
유럽에서는 농민을 흔히 “국토의 정원사(gardener of the land, gardener of the nation)”라고 부른다. 농민은 단순한 농업 생산자가 아니라, 경작을 통해 들판·숲·하천·마을 풍경을 가꾸고, 토양·물·생물다양성을 지키며, 공동체의 생활양식과 전통문화까지 유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이러한 농민의 다원적 기능을 인정해 직불금, 환경·생태농업 지원, 경관·문화유산 관리 수당, 소규모·고령 농민 특별수당 등 다양한 형태의 보상을 지급한다. 또한 농민이 농촌에서 지역경제·공동체 활동, 전통음식 생산·판매 등을 수행할 때도 지원한다.
오늘날 농촌은 농민만이 아니라 농촌주민 전체가 국토·환경·문화·지역의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농촌은 혼주화가 진행되어, 농민보다 비농민이 더 많다. 실제로 농촌(읍·면) 인구는 970만명이지만, 농가 인구는 210만명에 불과하다.
모든 주민이 의식적으로 지킴이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그곳에 살며 지역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지킴이 기능이다. 하지만 농촌주민들이 떠나면서 수도권 집중은 더욱 심화했고, 많은 농촌 지역이 공동체 유지조차 어려운 수준으로 인구가 줄어 ‘소멸위험’에 처해 있다. 이는 곧 중소도시와 대도시의 쇠퇴로 이어지고 있다.
농촌주민이 지킴이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국토와 환경은 파괴되고, 전통문화와 공동체는 붕괴하여 결국 도시민의 행복까지도 해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농촌주민이 지역을 지키며 다원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농어촌주민수당의 의의와 효과
농어촌주민수당은 농산어촌 주민이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누리며 지역을 지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지금 농촌경제는 너무 피폐하여 어떤 정책도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물고기가 놀 물이 있어야 하듯, 농어촌주민수당으로 농촌경제에 물을 채워야 한다. 농어촌주민수당은 ①지역경제 활성화 ②주민 생활 안정 ③공동체 유지와 정주 기반 강화 ④국토·환경·문화의 다원적 기능 보존에 기여할 것이다.
경기도가 2022년부터 연천군 청산면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한 농촌기본소득(월 15만원, 지역화폐)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인구 증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했고, 마을공동체 회복에도 긍정적 영향을 줬다. 무엇보다 주민 스스로 삶의 안정감을 느끼며 가족관계까지 개선됐다.
농어촌주민수당, 군 단위 아니라 ‘소멸위기’ 면 주민에게 지급
정부는 내년부터 인구감소 6개 군 주민 24만명에게 월 15만원을 지급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같은 군 내에서도 읍과 면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읍은 도시적 생활 기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만, 면 지역은 인구감소로 공동체조차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 기반 시설이 열악하다. 군 단위로 보면,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에서조차 인구가 면에서 읍으로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인구가 3000명 이하로 내려가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학교, 병원, 쇼핑, 교통 등 지역공동체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서비스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정책의 초점은 ‘군 단위 보편 지급’이 아니라 인구 3000명 이하 면 지역의 선별 지급에 맞춰야 한다. 소멸위험이 가장 큰 곳부터 지원을 시작해야 한다. 형평성 논란은 불가피하지만, 지역화폐 지급을 병행하면 읍 지역 경제에도 파급효과가 생긴다. 나아가 면 지역 이주를 유도해 정주 기반을 회복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농어촌주민수당의 재원, 농촌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으로도 가능
그렇다면 농어촌주민수당을 얼마나 지급하면 좋을까. 정부는 내년에 농어촌기본소득으로 월 15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그런데 월 15만원은 기본소득이라 하기에도 불충분한 금액이지만, 농어촌주민(지킴이) 수당으로도 매우 부족하다.
우리가 월 30만원을 제안한 것은 도시민과 농촌주민의 소득격차가 대략 월 30만원 정도라는 것 그리고 ‘월 30만~40만원 지급이 적당하다’라는 농어촌주민 대상 설문조사에 기초한 것이다. 최근에 국회에 발의된 ‘지역소멸 위기대응을 위한 농어촌기본소득법안’은 월 30만원을 제시하고 있다.
월 30만원을 지급하는 경우 어느 정도의 재원이 필요할까. 우선 공동체 유지의 경계선이라 할 인구 3000명 미만의 지역부터 월 30만원을 지급하고, 그 범위를 점차 확대해 가자. 전국 1182개 면 가운데 인구 3000명이 안 되는 면의 인구수는 645개 면에 123만명이고, 인구수 5000명이 안 되는 960개 면의 인구는 244만명이다.
농어촌주민수당을 월 30만원씩 인구 3000명 이하 지역의 123만명에게 지급한다면, 연간 약 4조4000억원이 필요하다. 이는 국정기획위원회가 월 15만원을 69개 군 272만명에게 지급하겠다는 본사업 예산 연간 4조9000억원보다 적은 액수이다.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지급 대상 선택의 문제다. 어느 쪽이 ‘지방소멸’ 대응 정책으로 더 효과적일까.
4조4000억원도 적은 돈이 아니다. 국민의 공감대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다른 연구에서 농어촌주민수당의 재원 조달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간략히 말하면 우선 효과가 의심스러운 지방소멸대응기금 1조원과 지역상생발전기금(대략 4400억원)을 농어촌주민수당 재원으로 돌리자. 그리고 지역균형발전이니 지역개발이니 농촌마을살리기니 해서 투입되는 천문학적인 재원의 일부만 절감해도 된다. 이렇게 하면 농촌 퍼주기라는 비판도 잦아들 것이다.
‘농산어촌개벽대행진’에서 농촌주민수당에 대해 주민들이 열렬히 호응한 것은 단순히 돈을 받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회 현장에서 주민들은 기존의 사회간접자본(SOC) 중심, 시설 위주의 지역개발·마을만들기 사업이 오히려 농지와 환경, 공동체 문화를 파괴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니 차라리 그런 예산을 줄여서 농촌주민수당으로 달라는 것이다. 이는 기존 중앙정부와 대자본 중심의 지역개발정책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이자 새로운 대안이다.
중앙정부의 융자사업 일부를 이차보전으로 전환하고, 시·군의 순세계잉여금과 재정안정화 기금 등을 활용한다면 주민수당 지급 대상을 인구 5000명, 7000명 등의 지역으로 확대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농어촌 예산의 자연 증가분을 이용하고, 탄소세, 에너지세·환경세, 디지털세, 로봇세를 도입하고 그 일부를 농촌지역에 돌린다면 농어촌주민수당은 전체 농산어촌지역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농어촌주민수당을 도입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중앙정부가 소요 재원의 전액을 부담하여 지역 간 그리고 지역 내 갈등을 줄일 필요가 있다.
농어촌주민수당과 주민자치의 결합
우리는 농어촌주민수당을 월 30만원 지급하되 절반 정도는 현금으로, 절반은 지역화폐로 지급하자고 했다. 그리고 농어촌주민수당의 10~20%는 지역공동체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자고 했다. 주민수당 일부를 공동기금으로 모아 마을이 직접 쓰게 한다면 학교 살리기, 돌봄, 문화행사, 에너지 자립 등 다양한 사업이 가능하다. 예컨대 작은 면 지역이 주민수당을 모아 마을버스를 운영하거나 공동 돌봄 센터를 세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는 주민 자긍심을 높이고, 읍 단위 자치에도 긍정적 파급효과를 줄 것이다.
농어촌주민수당, 지역위기의 소방수
농어촌주민수당은 단순한 복지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위기의 소방수이며 국토와 환경, 문화를 지켜내는 사회적 투자다. 대도시 과밀로 인한 사회적 비용(주거·교통·환경·복지·인프라 부담)이 농촌에 최소한의 인구를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는 연구도 많다. 월 30만원 지급은 전혀 과도하지 않고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이미 부분적 기본소득의 성격을 지닌 노인수당·청년수당이 사회적 합의를 얻어 시행되고 있듯이, 농어촌주민수당 역시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