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가공법인 운영을 앞두고서 농업기술센터에서 법인설립 교육을 여러 날 동안 진행했습니다. 사실 법인이라는 것이 5인 이상 구성만 해놓고서는 운영은 개인이 알아서 하면서 형식적인 이사회 운영구조가 허다하니 설립에서부터 운영 전반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고자 여러 날의 교육과정을 잡았나봅니다.그 과정에 자기소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꾀 많은 강사가 주문하기를, 자기소개를 하되 농사작목은 무엇이고 어떤 식의 농가공을 희망하며 얼마의 소득을 기대하는지를 중심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상대의 요구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중심으로 말하는
휘영청 밝고 둥근 보름달이 떴다. 대보름달이라 역시 크고 밝다. 대보름은 농촌에선 농사의 시작, 마을공동체에는 한 해 동안 몇 안 되는 큰 행사이다. 달집을 만들어 태우고, 지신밟기에 풍물소리까지 들리는, 그리고 마을에 설거지를 하러 가야 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살짝 들뜨기도 하는 등 대보름을 기다리는 감성은 여전하다.풍물소리와 마을 어른들의 어깨춤을 지켜보다 흥에 겨워 얼렁뚱땅 어깨춤을 따라 해보기도 하고 달집태우기, 쥐불놀이에 대한 아득한 기억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빨갛게 달아오른 숯을 넣은 찌그러진 깡통을 손에 쥐고 싶었던 때였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성격 좋고 무던하고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사람일까? 모나지 않고 둥글게 사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때로는 성격 좋은 사람 때문에 여럿이 힘들 때가 있다. 상대적으로 무엇을 하려면 성격 좋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밀고 나가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 마련이다. 성격 좋은 사람은 그냥 따라오거나 별말 없이 가면 된다.그래서 성격 좋지 않은 내가 종종 억울해지는 일도 있지만 나는 내가 맘에 든다. 악착같이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도 잘 살았다고 얘기할 수 있고 앞으로도 나는 잘 살 것이다. 할 말 다하고
내 나이 쉰셋의 설은 태어나 처음으로 차례상 없는 설이었다.어릴 적 종갓집이었던 우리집은 일 년 열두 달 제사가 없는 달이 없었다. 없는 살림에 배를 곯던 날이 허다했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제삿날이나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몇 해 이후 맏며느리인 엄마는 제사를 하나로 줄이겠다고 선언하셨다.작은아버지와 고모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제사상을 준비해야 하는 이의 선언을 누구도 막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도 지금까지 엄마는 며느리가 없는 덕에 혼자서 제사와 명절 차례상을 차리신다.신혼 초,
한국농촌경제연구원(농경연)에서 농업·농촌의 대내외적 여건과 주요 현안들을 고려하여 2020년 10대 농정이슈를 선정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농경연은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우리 농정의 방향을 끌어간다고 보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농정당국이 농경연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농정을 수립하거나, 농정당국이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의 내용을 농경연이 연구 조사해서 사업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주기 때문이지요.그렇다면 정작 최대의 이해당사자인 농민들은 매년 발표하는 농경연의 농정이슈를 찾아보느냐?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간 농정당국의 정책이 현장의 농
새해가 밝았다. 성큼 성큼 가는 세월, 멀게만 느껴지던 2020년이 오고야 말았다. 물론 새해라고 특별해지는 것도 달라지는 것도 없다. 아니 없어야 했다. 새해 첫 주말부터 불만덩어리가 마당에 들어앉았다.별안간 무슨 바람이 분건지, 남편은 합의도 없이 태양광발전시설을 마당에 설치해버렸다. 남편의 섣부른 판단에 영업하는 분의 조급함이 합쳐져 단 하루 만에 이 모든 것이 악몽처럼 벌어졌다. 남편과 영업하는 분은 차례로 나의 쓴소리, 큰소리를 들어야 했고 화가 난 압도적인 내 기세와는 달리 이미 태양광 패널은 마당의 대부분을 덮어버리고
마을회관에 가보면 여자들이 쓰는 방과 남자들이 쓰는 방이 각각 따로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 여자들이 쓰는 방은 방이라기보다 부엌을 많이 쓰는 편이다. 여성농업인센터에서 마을 프로그램을 들어갔더니 엄마들이 부엌에서 프로그램을 하자고 했다.너무 좁기도 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가 마땅치 않다고 했더니 그럼 남자방에서 하자고 하신다. 남자방은 훨씬 더 넓었다. 여성이 훨씬 숫자도 많고 이용횟수도 더 많은데 왜 좁은 부엌을 방이라고 하면서 쓰시냐고 했더니 당연히 우리가 좁은 거 쓰는 게 편하다고 하신다.공동급식도 남성은 가만히 대기하고 있다
달력 한 장이 팔랑거린다. 엊그제 얻어온 새 달력으로 바꿔 걸릴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여태껏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은 ‘새로운 계산법’이 제시되면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란 말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기에 충분했다.새로운 길과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 보자 했던 2019년은 어떠한 계산법도 제시되지 못한 채 이렇게 가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한다며 시작했던 통일품앗이 운동을 위한 트랙터는 아직도 길 위에서 대북제재라는 굴레를 뚫지 못하고 찬 서리를 맞고 있다. ‘평화’라는 두 글자에 대
사람은 같이 생활하며 많은 것을 나누게 되면, 서로 어울리기가 쉬워지잖아요? 멀리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가까이서 겪게 되면 절로 알아차리게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짐작으로도 납득이 되는 것처럼요. 그렇지만 요즘은 남들과 섞여서 평등하게 일하는 자리가 그다지 많지 않으니 서로를 깊이 헤아리며 닮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이와는 달리 바다를 낀 우리 지역에서는 겨울철이면 곳곳에서 공동체로 엮여 같이 굴을 까곤 합니다. 하여 이 시기에는 때에 맞춰 점심을 함께 먹습니다. 집에서 찬을 해오거나 식전에 준비한 찬으로 밥을 먹는데 매
12월이다. 한해 농사가 끝이 났다. 11월은 추수를 통해 걷어 들인 농산물을 팔고 정리하며 한해살이 살림을 다시금 살펴보게 된다.쌀농사, 사과농사, 농사소득에 대한 셈법은 이렇다. 우리 집 농민은 “그냥저냥 농사가 이런 것이지”라며 체념하고 우리 집 여성농민은 “요리조리 꼼꼼 따져보면 농사가 이리 답답한 것인가” 걱정만 된다. 젊어서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퇴직금이 쌓이는 것도 아니고 연금이 쌓이는 것도 아닌 농사. 15년간 희망고문 하듯 시작되고 낙담하고 희망하고 절망한다.작년부터 포도농장을 만들어 포도농사를 시작한
시급 1,000원짜리 노동, 건고구마순을 만들기 위한 노동이 쯔쯔가무시로 마무리됐다. 첫날 뭔가에 물린 느낌이었지만 싱싱한 순들을 서리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속력을 냈다. 몸에 이상이 생긴다 해도 ‘곧 죽는 건 아닐 거야’ 자가 진단을 내린다. 미룰 수 없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다.“그러다 죽는 사람 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쿨하게 한마디 하며 지금 당장 입원을 권한다. 전남에서만 한해 1만명 정도가 이 진드기에 물려 병원을 찾는단다. 예방을 위해선 풀밭에 주저앉아 일을 하지 말라 한다. 엉덩이 방석을 끼고도 어
날이 추워지니 몸도 마음도 오그라진다. 아직 못다한 밭작물들을 거둬들이는 농촌의 어머니들은 가뜩이나 꼬꾸라진 허리가 더 휘여 보이고 무릎이 썽썽하지 못해 성근지게 걷지도 못하면서 일은 우찌 그리 잘하시는지, 젊다고 치는 중년인 우리들은 그저 감탄할 지경이다. 가을일이 끝나기 무섭게 겨우내 병원 다니시는 게 일생 일대 제일 중요한 일과 중 하나로 치고 매일같이 병원을 다니시는 어머니들을 보면, 그것이 어머니들의 낙이자 위안이 된다는 게 참 씁쓸하기만 하다.요즘엔 카페가 점점 늘어난다. 여가생활이라고 해봐야 사람들과 분위기 좋은 카페에
농민수당 조례제정을 위한 농민들의 활동이 전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미 서명을 마치고 조례 제정 청구를 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아직 한창 서명운동을 진행 중인 지역도 있습니다. 아 물론 경기도처럼 기본소득을 청년에서 농민까지 확대하겠다는 지자체도 있으니, 그 이름이 농민수당이든 기본소득이든지 간에 전체 농민들에게 뭔가 사회적 지원을 하는 것이 바야흐로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이곳에서도 진즉부터 그런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연초 농민단체의 총회장에 ‘농민수당 쟁취’ 현수막이 걸려서 위용을 자랑하고, 농민단체 회원들은 듣도
지난겨울 친구 영득이가 “논 5평만 구해줘, 토종벼 좀 심어보게” 하는 말에 “내랑 같이 해보자. 우리 신랑이 벼농사 짓는데 좀 도와주면 안 낫겠나?” 그렇게 토종벼를 심어보겠다는 일은 시작됐다. 토종벼 채종포 120평이 확보되고, 이왕 하는 것 채종포는 먹을 양도 안 될 터이니 맛이라도 보기 위해 150평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고, 둘은 다섯이 되어 벼꽃모임이 됐다.황사가 뒤엉켜 먼지를 날리던 봄날, 그전에 구입하거나 증식용으로 얻은 나락 한 톨을 놓치지 않고 모판에 손으로 뿌리고, 섞이지 않도록 이름을 쓰고, 옮기고 하는 작업이
산등성이로부터 시작된 단풍이 서리 한번 맞지 않은 덕에 빨갛게 노랗게 마을 안까지 선명하게 물이 들어온다. 안개 자욱한 아침을 지내면 높고 파란 하늘이 열린다. 가을이 가고 있는 것이다.막바지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 덕에 한가했던 시골길이 차들로 그득하다. 길 건너에 논밭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다. 양편의 차들을 다 보내야 하니 마음만 급해진다. 덕분에 단풍이라도 눈망울 가득 넣어볼 수 있는 잠깐의 쉼의 시간을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지겹도록 내리던 비가 한 달 여가 지나도록 내리지 않는다.
일전엔 어처구니없이 사고를 냈다. 깜빡이를 키고 차선을 바꾸려다 가벼운 접촉사고를 내버렸다. 앞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내리자마자 전화를 한다. “여보! 내가 가고 있는데 옆에서 차가 들어와서 사고가 났는데 어떻게 해?”참나! 왜 운전하다 사고가 나면 여성 운전자는 보험회사에 전화를 먼저 하지 않고 남편이나 기타 지인 남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조언을 구할까. 여성이 의존하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지만 같은 여성인 나로서는 그리 좋은 모습으로 보이진 않는다.여성이든 남성이든 스스로의 일은 스스로가 해결하는 것이 마
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먼 곳 중 한 곳인지라 한다하는 명사들을 초청해서 좋은 강연을 들을 기회가 드뭅니다. 또 먹고사는 것 외의 문제에 한갓지게 강연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보통의 정서는 아닙니다.도시에서야 더러 음악과 미술을 먹고 역사와 문화를 마시며 하세월을 보내는 한량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바다를 낀 이곳에서는 일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것을 가장 ‘부도덕'으로 간주하는 통에 너나없이 노동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것이 옳은 삶의 방편이기는 하나 한편으로 나와 우리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어렵다
추수를 해야 하는 가을날 노오란 파도를 만들어내야 하는 벼들이 연이은 태풍에 쓰러졌다. 달라붙듯이 땅에 납작하게 누워버린 논도 있고 이리저리 뒤엉킨 논도 있고, 와중에도 말쑥하게 꼿꼿함을 유지하고 시원스럽게 흔들리는 논도 있다.곡물 통을 실은 트럭을 농로에 세워두고 타작하는 풍경을 지켜보자니, ‘또 걸리나’하는 불안과 걱정이 반복된다. 논에 납작하게 누워버린 벼줄기는 든든한 콤바인도 멈추게 한다. 농사지은 논 주인의 미안하고 애타는 표정과 타작해주는 남편의 답답한 표정이 각자의 허공으로 비껴서고 두 사람의 손은 뒤엉킨 지푸라기를 잡
옆 동네 여수에 있는 남해화학은 농협의 자회사이다. 농민들이 사용하는 비료의 50%이상을 생산하는 곳이라고 한다. 바로 그곳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60명을 10월 1일자로 일방적 해고통보를 했다. 비료가격을 낮게 책정해 농민들에게 공급하기 위해서일까?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섞인 비료로 하는 농사가 참도 잘되것다 싶다. 금동댁 손자가 해고를 당했다. 큰 회사에 취직했다며 자랑하던 손주였다.온 가족이 작은 땅덩어리에 매달려 농사를 짓다 보니 그녀의 논밭은 정갈하기만 하다. 밥티를 주어먹을 정도라는 말을 할 정도다. 아들 손자 잘되기만을 바
명절의 부산함과 가을의 풍요가 지나간 뒤에 또다시 바빠지는 계절, 가을이다. 계절의 변화는 비를 앞세우고 온다고 한다. 계절의 변화가 자연과 자연의 충돌을 통해 이루어지듯 인간의 변화는 어떤 충돌을 통해 이루어질까?추석 명절을 앞두고 모인 작은 모임에서 넌지시 농담처럼 “추석 때 우리 여자들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도 갖고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 버렸다. 지친 사람들이 모여 피로를 풀면서 잔잔하고 소소한 일상을 나눌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이지 아니한가!추석 명절 내내 음식과 사람을 돌봐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에서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