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이 선택인 도시와 달리 ‘리’ 단위의 농촌에서는 운전 능력이 필수다. 운전을 하지 않으면 내 시간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읍내 하나로마트에 장을 보러 가려면 왕복 40km를 이동해야 한다. 내 차로 다녀오면 40분 정도 소요되는데, 이를 대중교통으로 해결하려면 하루에 몇 대 뿐인 버스 시간표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그마저도 시간대마다 같은 번호의 버스가 다니는 노선이 다르니 종착지가 읍내라 하더라도 마을에서 읍내까지 1시간 만에 갈 수도 있고 조금 더 걸릴 수도 있다.
운전을 하지 않으면 내가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사용하게 된다. 아니면 타인의 시간을 빼앗거나 선심에 기대야 한다. 그것도 한두 번일 때 이야기다.
몇 년 전 읍내로 그림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군에서 운영하는 무료 강좌였는데 수강생이 전부 나처럼 타지에서 와 외로움을 느끼던 사람들이었다. 사는 곳도 다양해서 수업 시간이 되면 주차장이 늘 만차였는데 그중 나랑 동갑이었던 한 사람은 남편이 태워다주고 데리러 왔다. 그래서 남편이 바쁠 때는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를 본 시부모님은 바쁜 아들의 시간을 빼앗는다며 일주일에 한 번 본인을 위한 시간을 갖는 며느리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셨다고 한다. 총 10회의 수업 중 그 분은 고작 4회 정도만 참여할 수 있었다.
또 50·60대 여성이 많이 선택하는 직업 중 하나인 요양보호사도 도시에선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닐 수 있지만 농촌에선 자차 이동이 필수다. 아이돌봄서비스를 받으려는 주변 친구들도 읍내에서 떨어진 마을에 살면 아이돌보미를 직접 태워 집으로 데려와야 한다며 난감해 하고 있다.
장을 보는 일, 출퇴근, 취미생활 등 어떤 일에도 운전 능력이 쓰이지 않는 경우는 없다. 농촌에서 운전이란 생계수단이다. 농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기계 없이 논농사를 짓는 마을 아저씨의 벼를 수확해준 적이 있다. 남편이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나는 1톤 트럭에 톤백으로 나락을 받아서 농협 RPC로 옮기는 일을 했다. 그 때 1톤 트럭으로 RPC까지 2번 왕복하고 아저씨에게 받은 돈이 호미와 낫을 들고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받는 돈보다 좀 더 많았다. 물론 콤바인 삯은 따로였다. 고작 3시간에 그 돈을 벌고 나니 옆밭에 쪼그려 앉아 마늘을 심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눈에 더 들어왔다. 어쩌면 어느 시대의 어느 곳에서는 운전이라는 것이 내려놓을 수 없는 권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게 그 때부터였다.
내 경험상 관리기보다 트랙터를 운전하는 게 훨씬 쉽고, 이앙기에 모판을 싣는 일보다 이앙기를 모는 일이 더 체력적 부담이 적었다. 콤바인 운전석에서 거북목을 빼고 벼를 베는 일이 1톤 트럭 적재함에 오르내리며 톤백에 나락을 받는 일보다 안전했다. 적재함에서 발이 미끄러져 떨어져보니 그랬다.
대형농기계 운전이 위험한 것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데도 여성농민만이 농기구 곁을 떠나지 못하고 농기계와 멀어진 건 애초에 운전대를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기계를 위험해서 못 타는 것이 아니라 타지 않아서 위험해진 것이다. 안전상 위험하고 운전에 부담이 있어서 여성이 농기계와 멀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성농민은 농기계 사용자가 아니었으니 농기계는 여성농민에게 편해질 이유가 없었다.
여성농민도 당연하게 농기계의 운전대를 잡게 했더라면 사용자인 고객에 맞춰 기계에도 알맞은 장치들이 마련되고 조작 구조가 개선되었을 것이다.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특정 성별을 과보호 했던 일이 농업의 발전과 농업 근로 환경 개선에 어떤 제약으로 작용했는지 이제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여성농민들에게 농기계 운전대를 일찍부터 내주었더라면 지금 우리 농업은 어떻게 변화해 있을까? 즐거운 상상이 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