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주를 다녀오는 길은 멀고 험하다. 광주로 나가 비행기를 탄 뒤 자동차를 빌려 타는 보편적인 방법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가지 않는다. 3시간을 운전해서 가야 하는 완도항을 통해 배에 자동차를 실어서 가는 어려운 방법을 택해 간다. 지인들을 만나면 건네고 싶은 것들도 챙기고, 가서 읽을 책, 갈아입을 옷 등을 내 차에 잔뜩 실어 가고 싶어서다. 돌아올 때는 제주만의 특별한 식재료들을 사서 챙겨오는 재미가 참 좋고, 내 차라서 운전하고 다니기도 편하다.
그렇게 제주엘 가면 누구나 가보는 동문시장이나 제주민속오일장 말고, 현지인들이 즐겨 찾고 애착을 가지는 오일장을 둘러보고 싶었다. 표선이나 모슬포 같은 곳이 그런 곳이라 생각됐지만 일정이 잘 맞지 않아 중문향토오일장으로 갔다. 중문오일장은 아주 작은 시장이다. 천천히 걸으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주 시시하게 느껴지는 정말 작은 시장이다.
언제나 장터의 국밥으로 아침을 먹는 우리 일행들이 밥 먹을 식당도 제대로 찾지 못할 정도로 장이 작다. 정말로 현지인들이 집에서 아침 먹고 잠깐씩 장을 보러 나오는 장인가 보다. 시장 바로 앞 호텔 1층에 보말칼국수집이 보였다. 아침 8시부터 문을 연다기에 들어갔는데 나쁘지 않았다. 들러서 한 끼 해결하고 가라 권할 만했다. 제주의 시장에서 보말을 만나기는 어렵다. 식당으로 모두 팔려나가 개인에게 팔 것이 없는지 제주의 여러 시장들에서 보말을 파는 상인들을 만난 기억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식당에서 사먹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해먹는 것 같은 맛을 내는 식당을 찾아다닌다. 아무튼 중문오일장에서 만난 보말칼국수는 꽤 높은 점수를 줄만 했다.
보말은 없는 오일장이지만 한치는 지천으로 널려있다. 성게는 끝났다고 한다. 은갈치 비늘의 반짝임에 눈부시기도 하고, 묵은지 넣고 지지고 싶은 고등어도 보인다. 육지와는 색이 다른 조피볼락(우럭)과 참게라 불리는 바다게, 해동한 옥돔, 말린 생선들로 가득하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 온갖 생선들로 넘쳐난다. 생청각도 산더미처럼 보인다. 김치에만 사용하는 육지와는 달리 나물로 국으로 다양하게 먹는 해조류다. 제주로 살러오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작지만 풍성한 시장이다.
9월의 중문오일장은 하우스감귤의 천국이다. 노란색이 아직 덜 든 하우스귤은 짙은 초록이 노랑과 어울려 여름 더위쯤은 날릴 기세로 시원해 보인다. 인심도 후해 지나가는 사람 불러 세워 한 개씩 마구 맛보인다. 새콤하고 달콤한데 단맛과 신맛이 과하지 않아서 좋다. 맛도 보이는 색처럼 시원하니 참 좋다. 육지에서는 고가로 팔리는 애플망고들도 사먹을 만한 가격이 붙어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칼로 얇게 저민 조각을 내민다. 훅 하고 들어오는 망고의 단향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한 조각 먹고 나면 어느새 서너개 사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만큼 맛있다. 가족이나 같이 오고 싶었던 지인들 생각으로 더 살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남아 안 가도 되겠다 싶은 맛이라 우리 농부들의 노고가 그저 고맙고 또 고맙다.
열무는 참 실하고 좋다. 제주의 검은 흙이 뿌리에 잔뜩 묻은 열무로 김치를 담그고 싶어 나는 안달이 난다. 그러나 사면 안 된다. 덥고 습해 돌아가기 전에 다 녹아 물이 흐를 것이다. 저장해두었던 배추와 겨울 제주무도 보인다. 제주의 일부 들판엔 이제 무 파종을 시작하고 있으니 무가 필요하면 저장무를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지엔 벌써 추석을 겨냥해 지었을 햇무가 나왔지만 맛은 별로다. 9월 초의 이 시기에 맛있는 무는 없다. 그러나 곧 정말 맛있는 무가 나올 것이다. 아직 오일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삼보다 낫다는 가을무가 나올 것이다.
중문장엔 자연의 속도로 자란 비름나물과 곁순이라 내몰린 고춧잎이 나와 있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나물인데, 외가에 가면 늘 해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나는 나물인데 살 수는 없어 안타깝다. 노각과 호박, 붉은 고추, 가지의 색들이 이제 곧 더위 없는 가을인가 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한경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상인이 눈길을 끈다. 구멍가게 하나를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의 좌판이 정말 재미나다. 나도 이런 좌판 앞에 앉아 하루하루 일한 만큼만 먹으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각종 기름들과 곡식, 말려서 빻은 고춧가루, 장아찌와 과일청, 생채소와 건나물 등등 없는 것이 없다. 간장과 청국장도 있고 차를 끓여 먹을 볶은 보리와 옥수수도 있다. 본인의 노력 없이 남이 생산한 것들을 가져다 비싸게 파는 재미 하나 없는 상인들에 비하면 이런 상인은 감사의 인사를 받아도 된다.
작아서 너무 빠르게 장터를 돌아 다시 입구로 돌아오는 곳이 중문향토오일시장이다. 긴 시간 자동차를 타고 다시 배를 이용해 찾아온 보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지만, 말로 표현이 어렵고 쉽게 떠나올 수 없는 마력이 숨어 있으니 또 다시 찾을 곳이다.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지리산 뱀사골 인근의 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제철음식학교에서 봄이면 앞마당에 장을 담그고 자연의 속도로 나는 재료들로 김치를 담그며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해 50여 가지의 밥을 한다. 쉽게 구하는 재료들로 빠르고 건강하게 밥상을 차리는 쉬운 조리법을 교육하고 있다. 쉽게 장 담그는 방법을 기록한 ‘장 나와라 뚝딱’, 밥을 지으며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밥 짓는 법과 함께 기록한 ‘밥을 짓다, 사람을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