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출혈 후유증 딛고 론볼 선수로…“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효신 2016 전봉준투쟁단 서군대장

  • 입력 2025.03.16 18:00
  • 수정 2025.03.19 08:32
  • 기자명 원재정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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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편집국장]

2024년 12월 21일 전봉준투쟁단의 ‘남태령 대첩’을 유튜브로 지켜본 많은 이들 중엔 2016년 1기 전봉준투쟁단 서군대장이었던 이효신 전 전농 부의장도 있었다. 농민회 소속이거나 농민운동을 하는 이들이라면 전봉준투쟁단 연관검색어로 그를 빼놓을 수가 없으리라. 농민운동 역사상 ‘전무후무’ 할 것 같았던 전봉준투쟁단이 8년 만에 또 등장하는 어지러운 시절에 이효신 부의장을 전봉준의 고장, 전북 정읍에서 지난 11일 만났다. 건강상의 이유로 농민운동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그는 8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후유증을 딛고 론볼 선수로, 한우를 키우는 농민으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인터뷰는 수월했고, 아내인 박연희씨가 마음속을 들여다보듯 덧붙여 준 설명과 이효신 부의장의 말을 종합해 정리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근황을 궁금해하는 전국의 농민들이 정말 많다

지난 1월에 환갑 기념으로 고마운 이들을 초대해 밥 한 끼 같이 먹었다. 처음엔 70~80명 규모로 준비했는데 윤석열퇴진 촉구 상경집회가 잡히는 바람에 못 오시는 분들이 많았다. 아쉬운 대로 토요일과 일요일로 나눠 사람들을 만났다. 제일 멀리서 와주신 분이 김영호 의장님이다. 환갑 이전에도 매년 생일에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아플 때 물심양면 도움을 주신 분들께 식사를 대접했었다. 사람들 만날 생각에, 답례품을 전달할 생각에 올해 환갑은 더 즐거웠다. 뇌출혈로 몸이 불편하게 된 지 올해로 8년째다. 아프기 전에는 벼농사와 한우를 키웠는데, 지금은 한우만 사육한다. 사육두수는 120여두. 축사 관리는 아내와 내가 60대 40의 비율로 일하고 있다. 70대 30이었는데 더 늘어난 거다(웃음).

8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던 이효신 전 전농 부의장은 농민운동과 전봉준투쟁단 활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한승호 기자
8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던 이효신 전 전농 부의장은 농민운동과 전봉준투쟁단 활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한승호 기자

운전을 직접하고 오셨는데, 몇 년 전보다 몸 상태가 굉장히 좋아진 것 같다. 운동선수로도 활동하신다고 들었다

운전 때문에 아내와 많이 다퉜다. 처음엔 운전하는 것 자체를 만류하는 분위기였고, 내 고집을 꺾지 못하겠으니 이후엔 대전 장애인운전지원센터에 가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라고 채근했다. 왼손만 사용하니 옆에서 운전하는 걸 보는 이들은 불안할 수밖에. 하지만 큰 문제 없이 운전하며 이곳저곳 자유롭게 다닌다. 운전이 능숙해지기 전부터 트랙터 몰면서 축사관리도 했다. 물론 조심해야 한다는 걸 명심하고 있다. 재활치료를 받을 때부터 노력했지만 운동은 매일매일 절대 빼먹지 않는 일상이다. 지금은 론볼(공을 목적지에 최대한 가깝게 굴려 넣는 운동 종목) 선수로 크고 작은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실제 지난 1일, 전남나주론볼경기장에서 치러진 제9회 영·호남 장애인생활체육론볼대회에 ㈜건화 소속 선수로 활약했다). 3년 전에 ㈜건화의 장애인운동선수 자격으로 정직원이 됐다. 매일 론볼경기장으로 출근해 단체 경기도 하면서 사회적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직원이니 월급도 받는다. 같이 경기하는 분들이 한턱내라는 얘기도 종종 한다. 론볼뿐만 아니라 탁구도 잘 친다. 탁구 선수로 나가라는 얘길 많이 듣는다(인터뷰는 3곳을 돌면서 했는데, 그중 장애인체육센터에서 확인한 탁구 실력은 정확도, 속도 모든 면에서 프로선수 같다).

론볼 선수로 활약 중인 이효신 부의장이 경기장에서 볼을 굴리고 있다. 한승호 기자
론볼 선수로 활약 중인 이효신 부의장이 경기장에서 볼을 굴리고 있다. 한승호 기자

전봉준투쟁단이 지난해 남태령에서 기적을 만들었는데 8년 전 전봉준투쟁단 서군대장으로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

지난 이야기를 하자면, 2016년에 전봉준투쟁단을 조직하자는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반대했다. 지금이야 전봉준투쟁단 2기가 맹활약을 하고 투쟁담을 나누지만, 그땐 보름 동안 트랙터를 몰고 남녘에서부터 서울까지 대행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걸 해낸 농민들이 위대하다. 걱정도 많았지만, 그만큼 정권교체, 농업문제가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걸 돌파할 힘이 필요했다. 전농 의장 2명이 동군대장(최상은)과 서군대장을 맡아 해남과 진주에서 각각 트랙터를 운전했는데 시민들의 호응이 컸다. 안성에서 동·서군이 합류했고, 지금이나 그때나 경찰병력이 농민들 앞을 막았다. 농민들은 길이 막히면 몸을 사리지 않고 뚫었고 서군대장인 내가 대장트랙터를 몰고 전진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안성에서 길이 막혔을 때, 온라인을 통해 농민들을 돕자는 여론이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우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면서 농민회원들에게 이곳으로 모여달라고 외쳤다. 이불·생수·라면 등이 쌓였던 것도 기억에 남고, 비가 내려서 비닐을 덮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새벽녘에 육중한 트랙터에 시동을 걸던 것도 기억난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트랙터를 몰고 국회 앞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전봉준투쟁단은 두 차례 행진을 했었다. 서군대장으로 인터뷰도 많이 했었는데, TV조선 기자가 동행취재를 요청했었던 일화도 있던데

그때 연락한 사람이 최원희 기자였다. 다른 언론도 아니고 ‘TV조선’이란 말에 천부당만부당하다며 한마디로 취재를 거절했는데, 현장으로 오더라. 정권 퇴진·쌀값 폭락 등의 문제에 진실을 말하고 싶다며 취재하겠다고 하면서 자기 차로 우리 일정을 따라다녔다. 나중에 보니 취재한 내용과 상반된 내용이 뉴스로 나왔다. 지금은 앵커가 돼 있더라. 내 사정 모르고 전화했다가 아프다는 얘기를 전한 기억도 있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선고를 2017년 3월 10일에 했는데, 그 이틀 전 뇌출혈로 투병 생활을 하게 되셨다. 모두가 걱정했고 모두가 미안한 마음이었다

박근혜정권 퇴진 투쟁이 정점에 달했고,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신 뒤 전봉준투쟁단이 결성된 건데, 전국 대행진을 이끌어야 할 서군대장만 맡은 게 아니었다. 당시 직책이 전농 부의장, 전국쌀생산자협회 회장, 전북 삼락농정위원회 집행위원장 등 중첩된 과부하와 스트레스가 있었을 거다. 몸에 이상증상이 있었지만 당장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니 활동 중단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쓰러지던 날 하루 전에 일정이 빽빽했었다. 서울 회의, 충청도 장례식장까지 들러 밤늦게 정읍 집에 왔다.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서 새벽에 소밥 주고 전남 무안에서 진행한 기자회견까지 하고 난 뒤 점심 먹고 귀가하던 중에 쓰러졌다(농민운동으로 몸을 사리지 않고 활동하다가 쓰러진 남편에게 아내 박연희씨가 ‘혹시 농민운동 한 걸 후회하지 않냐’ 물어봤다고 한다. 농민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를 하면 괴로울 수도 있겠다 싶어 되레 선수를 쳤다고 해야 할까. 원망할 법도 한데 남편은 주저 없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박연희씨는 ‘그럼 됐다. 후회하지 않는다니, 회복에만 전념하자’고 다독였다고).

이효신 부의장은 농민운동을 하는 모든 분들께 "건강을 챙기면서 싸워라"는 말을 꼭 당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승호 기자
이효신 부의장은 농민운동을 하는 모든 분들께 "건강을 챙기면서 싸워라"는 말을 꼭 당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승호 기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건강을 챙기면서 싸워라, 이 말은 꼭 당부하고 싶다. 그리고 전농이 잘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란 수괴 윤석열을 끌어내는데 끝까지 싸워달라. 뉴스를 보면 화가 도진다. 어휴,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이 모양이 됐나 답답하다.

회복에 더 집중해야겠지만, 앞으로 농민회 활동 계획은 없으신지

지금은 없다. 말만 되면 마이크라도 잡고 싶으나(웃음) 단어 생각도 잘 안 나고, 뇌가 단어를 기억해 낸다 하더라도 입으로 말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내가 가서 뭘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건강도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하는 몸 아닌가. 왼쪽의 신체기능으로 모든 활동을 하는데 이게 망가지면 큰일이니 응원하고 후원하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뉴스도 열심히 보고 SNS를 통해 소식도 계속 확인하고 있다. 전봉준투쟁단 소식도 놓치지 않고 계속 봤다. 농민과 시민이 경찰 차벽을 뚫고 한강을 넘고 대통령 집 앞까지 트랙터를 몰고 가는 모습에 벅찼다. 남태령에 가지 못한 수많은 농민들도 함께 눈물 흘렸으리라 생각한다(이효신 부의장 눈가도 촉촉해졌다).

전봉준투쟁단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농민과 시민들이 연대하는 힘은 8년 전보다 더 커졌는데 농업 현실은 더 어려워졌다

안타깝다. 농민도 줄고 농지도 줄고. 지역의 농민활동가로 나설 사람이 없다는 것도 걱정이다. 이번 투쟁을 잘 마무리해서, 사회대개혁이라는 우리 시대의 과제도 잘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다. 응원한다.

인터뷰하고 싶다고 전화로 연락했을 때, 한참 있다가 ‘안 할래’라고 거절하셨다. 그래도 찾아올 생각이었지만 왜 거절했는지 궁금하다

말을 잘 못 하니 지인들과 이야기하다가도 불편해하는 건 아닌지, 답답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런 마음이 생긴다. 인터뷰한다니 또 그 생각부터 났는데… 인터뷰 말고 같이 밥 먹자고, 정읍에 오라고 하고 싶었다. 여러 의미들이 ‘안 할래’라는 말에 다 섞여 있었던 거다. 저녁 먹고 페이스북, 텔레그램에 올라온 글 보고 아침에 짧게 답글을 쓴다. 생일이면 축하한다고 쓰고(세상과 소통하는 남편만의 방식이라고 박연희씨는 말했다). 내가 불편해할까 봐 전화를 안 한다거나 아내한테 전화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하지 말고 연락해라. 괜, 찮, 아(사회적 활동을 했던 사람이라 사람들 속에서 힘을 받는 건 여전하다고 아내는 또 그의 마음을 해석해 줬다. ‘괜, 찮, 아’라는 세 음절에 사람을 좋아하는 이효신 부의장의 마음이 똘똘 뭉쳐 있었다).

이효신 부의장과 삶의 동반자인 아내 박연희씨. 한승호 기자
이효신 부의장과 삶의 동반자인 아내 박연희씨. 한승호 기자

- 박연희(아내)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철저한 사람이다. 보통의 장애인들은 재활운동만 하는데, 우리는 소 키우는 것 자체부터 노동 강도가 세다. 계획한 일정도 지독하다 싶게 잘 지킨다. 몸이 너무 피곤하면 계획보다 일찍 누워 잘 수 있는데, 밤 10시 취침시간을 지킨다며 꼿꼿하게 앉아서 졸 정도다. 오늘도 인터뷰한다고 출근 시간을 평소보다 30분 당겨 알람을 맞춰놨다. 빈틈이 없이 치밀한 모습이 가끔 징그럽기도 하다(웃음). 학교 다닐 때부터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부지런하면서 성실했는데 변함없다.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운동을 해서, 지금은 내가 필요한 거 사다 달라고 심부름 맡길 정도가 됐다. 존경한다.”

- 박형대(전남도의원, 전 전농 정책위원장)

“전봉준의 고장에서 태어나 자라고 농사지으며 투쟁했고, 전봉준투쟁단의 이름으로 죽창 대신 트랙터로 상경한 늠름했던 이효신 서군대장. 역사는 다시 살아나고 과거는 현재로 이어진다는 말이 그를 보면서 실감났다. 그 정신과 활동을 우리가 잊지 않고 연결해주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 여겨진다.”

2016년 전봉준투쟁단 활동 당시 이효신 부의장이 최고로 뽑은 장면. 2016년 11월 18일 ‘전봉준투쟁단’ 농민들이 수십여 대의 트랙터를 앞세우고 전북 정읍시의 각 면 소재지를 순회하며 서울로 상경하고 있다. 맨 앞 대장트랙터를 이끈 이가 이 부의장이다. 한승호 기자
2016년 전봉준투쟁단 활동 당시 이효신 부의장이 최고로 뽑은 장면. 2016년 11월 18일 ‘전봉준투쟁단’ 농민들이 수십여 대의 트랙터를 앞세우고 전북 정읍시의 각 면 소재지를 순회하며 서울로 상경하고 있다. 맨 앞 대장트랙터를 이끈 이가 이 부의장이다.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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