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2.3 내란 사태’는 대한민국 헌법의 여러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순서에 관한 조항이다. 헌법 제71조에서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라서 윤석열 탄핵소추 이후 한덕수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았지만, 탄핵소추 됐다. 그래서 그다음 순위인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인 최상목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그러나 최상목 부총리는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것도 아니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된 것도 아니다. 장관 임명 시에 인사청문회를 거치지만, 국회의 동의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부통령이 권한대행을 맡고, 부통령도 이를 맡을 수 없는 경우에는 하원의장이 권한대행을 맡게 돼 있다. 부통령은 대통령과 함께 선출된 사람이고, 하원의장도 국회의원이니 유권자들로부터 선출된 사람이다. 최소한 선출직인 사람이 대통령 권한대행의 앞 순서에 있는 것이 맞지 않을까?
최상목의 선별적 권한 행사
최상목 권한대행은 내란수괴인 윤석열에 의해 임명된 임명직 공무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가 몇 달 동안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행정부를 총괄하며 군을 통수한다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헌법 개정을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대통령 권한대행의 순서에 관한 조문도 손을 봐야 한다.
게다가 한덕수, 최상목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권한을 자의적이고 선별적으로 행사해 왔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은 적극적으로 행사하면서, 헌법재판관 임명을 하지 않는 행태가 대표적이다. 한덕수 전 권한대행은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을 전부 거부했다. 최상목 권한대행은 3명 중 2명의 헌법재판관만 임명하고, 나머지 1명의 임명을 거부했다.
또한 국회를 통과한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은 매우 적극적인 권한 행사인데도, 이를 선별적이고 자의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내란특별검사법, 김건희특별검사법만 거부한 것이 아니다. 한덕수, 최상목 권한대행은 국회를 통과한 농업 4법, 고교 무상교육 국비 지원 연장법 등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도대체 기준을 알 수 없다. 경제관료 출신인 자신들의 입맛에 맞으면 괜찮고, 자신들의 주관적인 생각과 맞지 않으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인가?
기후위기에 무대책인 ‘농업 4법’ 거부권 행사
특히 ‘농업 4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국민들의 생존과 직결된 식량주권 확보를 어렵게 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미국 대통령에 트럼프가 취임하면서, 기후위기는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는 취임과 동시에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겠다고 했고, 화석연료 사용을 더욱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세계 2위인 미국이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은, 그나마 실효성이 약한 협약조차 유명무실하게 될 우려가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앞으로 기후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고, 극단적인 기후로 인해 농사짓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야말로 기후위기가 낳을 식량위기에 대한 대책이 절박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한덕수 전 권한대행은 양곡관리법,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법(농안법), 농어업재해대책법, 농어업재해보험법 개정안에 대해 모두 거부권을 행사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농안법 개정안은 농산물 가격폭락으로 인해 농민들이 입는 피해를 줄이기 위한 ‘농산물가격안정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농어업재해대책법과 농어업재해보험법 개정안은 기후위기로 자연재해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생산비용을 고려한 피해보상이 이뤄지도록 하고, 농민들이 부담하는 재해보험료 할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가 농민들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한덕수 전 권한대행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농업 4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한덕수 전 권한대행이 한 것이지만, 기획재정부 장관이자 경제부총리였던 최상목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기획재정부는 양곡관리법 개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표명해 왔기 때문이다.
최상목의 ‘무개념’ 먹거리 4법
권한대행 체제의 정부는 이렇게 ‘농업 4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면서도, 자신들이 임의로 만든 ‘먹거리 4법’이라는 기묘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일부 법률을 밀어붙이고 있다. 최상목 권한대행은 지난 13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 ‘미래 먹거리 4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얘기했다.
그가 말하는 ‘미래 먹거리 4법’은 반도체특별법(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 성장을 위한 특별법), 전력망특별법(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 고준위폐기물특별법(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 해상풍력특별법(해상풍력 계획입지 및 산업육성에 관한 특별법)이다.
개별적으로 필요한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법률들을 ‘미래 먹거리’로 부르는 것은 도대체 누가 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먹거리’라는 단어가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사람이 먹을 수 없고, 고준위 핵폐기물은 먹으면 큰일나는 것이다.
사람이 먹는 ‘진짜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은 외면하고서, 실제로는 먹지도 못하는 재화를 생산하거나 핵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한 법률들을 ‘미래 먹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법률마다 따져봐야 하는 것이 있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무조건 통과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잘못된 것이다. 누가 최상목 권한대행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했는가?
특히 전력망특별법은 매우 심각한 악법이다. 지금도 정부와 한국전력이 송전탑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투명성과 민주성이 결여돼 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에 제정된 ‘전원개발촉진법’은 절차를 너무 간소화·형식화해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수도권 일극 집중이 심각한 상황인데도, 수도권으로 전기를 송전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새로운 초고압 송전선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전력망특별법은 초고압 송전선 건설을 더 쉽게 하겠다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보더라도,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전기를 생산하여 초고압 송전선을 건설해서 수도권에 소재한 대공장으로 전기를 보내는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전력계통의 안정성도 떨어지고, 재난이나 테러 위협에도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수도권은 전기만 공급해주고, 일자리가 생기는 대공장을 수도권에 짓는 방식은 수도권 일극 집중만 심화시킬 뿐이다. 출산율이 가장 낮은 곳이 서울인데, 서울 중심의 수도권 지역으로 인구가 집중되는 것을 방치하면 초저출생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고민해야 할 지점들이 많은데도, 경제관료 출신인 최상목 권한대행은 ‘미래 먹거리’라는 말로 많은 검토·논의가 필요한 법률들을 강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진짜 먹거리’, 조기 대선 과정에서 논의 필요
이번 내란 과정에서 경제관료 출신인 한덕수, 최상목 권한대행이 보인 여러 가지 문제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반드시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내란에 동조 내지는 묵인했는지에 대해서도 수사·조사가 필요할 것이고, 이들이 자의적이고 선별적으로 권한을 행사한 것에 대해서도 평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먹지도 못하는 먹거리’가 아닌 ‘진짜 먹거리’에 대해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기후위기가 심화되면 국제정세는 더욱 불안해질 것이다. 쌀을 제외한 곡물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먹거리도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식량위기가 닥쳤을 땐 대처가 불가능하다. 농지도 모자라고 농사지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식량을 증산할 방법은 없다. 그런 점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농업은 국방과 같은 위상으로 국가가 재정을 투입하고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 전혀 없는 기득권 경제관료들이 정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계속돼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