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소외’라는 응어리 푼 남태령, 마을서부터 폭넓게 연대하자

농민들, 시민들의 연대로 용기 얻고
“농업문제 무관심하다”는 편견 떨쳐

공정함이 사회의 새로운 기준 돼야
도농 간 격차·먹거리 불균형도 해소

‘농업은 공공재’ 인식하에 농정 설계
8만ha 쌀면적 감축정책은 시대 역행

  • 입력 2025.01.12 18:00
  • 수정 2025.01.12 20:58
  • 기자명 원재정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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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편집국장]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국민과함께하는농민의길 상임대표)은 지난해 12월부터 해가 바뀐 1월까지 줄곧 거리에서 살았다. 12.3 내란 사태 직후 대통령 탄핵 정국에 하루가 멀다하고 열린 기자회견과 집회에 참석하느라 그랬고, 또 전봉준투쟁단의 총대장으로 대행진(12월 16일)을 시작하면서 전국을 누볐다. 사회대개혁과 농업대개혁을 목표로 전봉준투쟁단은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향해 트랙터를 몰고 질주했다. 서울 진입로인 남태령에서 경찰 차벽에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고립의 상황을 맞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민들의 거대한 응원 인파가 대치 28시간 만에 길을 열었다. 벅찬 승리의 시간도 벌써 2주가 흘렀다. 지난 8일 서울 용산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의실에서 하원오 의장에게 2025년 농민운동진영엔 어떤 변화와 결의가 필요한지 들어봤다.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 지난 8일 서울 용산 전농 회의실에서 2025년 농민운동진영엔 어떤 변화와 결의가 필요한지 이야기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 지난 8일 서울 용산 전농 회의실에서 2025년 농민운동진영엔 어떤 변화와 결의가 필요한지 이야기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전국 농민들에게 새해 인사부터 해달라

전농 의장을 한 지 3년 차인 지난해엔 계절 가릴 것 없이 찾아온 이상기후와 농산물 수입 확대 농정으로 힘들지 않은 농민이 없었다. 농산물 수급안정에 실패한 정부가 물가안정을 핑계로 마구잡이로 농산물을 수입하면서, 농민들을 물가 폭등의 주범인 양 죄인 취급을 하니 ‘이게 나라냐’는 분노가 느껴지는 한 해였다. 올해는 대통령 탄핵으로 윤석열정권을 퇴진시키고 새 정부가 들어설 것인데, 결국 농업 문제를 얼마나 반영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 꾸준히 노력하겠다. 농민들에게 어렵지 않은 해가 있었나 싶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농사짓는 세상을 함께 열어가면 좋겠다.

농사와 농민운동을 수십년 병행해 왔는데, 농사를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

처음엔 직장을 다녔다. 그런데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면서 해고 대상 명단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사직서를 냈다. 사람 자르는 회사를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서른에 농사를 시작해 내년이면 일흔이 되니 40년 농사를 지었고 평생 내 땅을 갖지는 못했다. 하우스에서 당근, 열무, 시금치 등 채소류를 심었는데, 2000년도에 부산시가 낙동강 둔치에 대형 체육시설을 짓는다고 농민들한테 농사를 그만 지으라고 한 게 계기가 돼 농민들과 대책위를 꾸려서 부산시농민회를 창립했다. 공유지 땅은 수시로 개발예정지가 됐고, 농민들은 수시로 쫓겨났다. 부산시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시민사회단체와도 적극 연대했다. 주로 낙농강변 둔치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4대강 사업에 또 농지를 잃었다. 농사지으러 양산, 밀양 등 경남지역 곳곳을 다니며 떠돌이 농사를 지었다. 여기저기 구경은 잘하고 다닌 셈이다(웃음). 현재는 창녕군농민회 소속이고 한국농어촌공사 소유 땅을 임차해서 벼·채소류 농사를 짓고 있는데 아내도 몸이 좋지 않고…, 올해는 아직 농사 계획을 세우질 못했다.

올겨울엔 남태령부터 한남동까지 밤을 지새우는 집회도 유독 많았는데, 너무 고된 일정 아닌가

농민운동을 하면서 1박 2일 상경투쟁도 하고 천막농성도 수십 차례 해봤다. 추수철 나락적재 투쟁도 일반적이다. 그러나 남태령에서도 그랬지만 한남동 관저 앞에서처럼 눈을 덮어쓰면서 3박 4일 투쟁하기는 처음이다. 맨땅에 앉아서 한겨울 추위를 견디는 게 고통스럽지 않냐고 걱정을 하는데, 전봉준투쟁단 대행진을 포함한 정권 퇴진운동 등은 결국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라서 희망을 갖고 기쁘게 싸웠다. 미래가 보이는 투쟁을 하는데 몸 사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22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 앞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하원오 전농 의장(앞줄 가운데)이 1만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행진 보장을 촉구하며 `윤석열 체포'를 외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해 12월 22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 앞에서 열린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하원오 전농 의장(앞줄 가운데)이 1만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행진 보장을 촉구하며 `윤석열 체포'를 외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전봉준투쟁단과 수만명 시민들이 만든 기적, ‘남태령 대첩’은 두고두고 농민들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전봉준투쟁단 총대장으로서 대행진 시작점과 트랙터로 한강을 넘어선 이후,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

투쟁은 항상 어려움 속에 시작한다. 2016년 1기 전봉준투쟁단의 시작도 그랬고 2024년 2기 전봉준투쟁단도 다소 어수선하게 출범했으나 서울로 향하는 곳곳에서 트랙터가 늘어나고 농민회원들이 결합하면서 점점 힘이 붙었다. 농민들만의 대행진이었고, 남태령에서 머물던 동짓날 그 긴긴밤을 농민들만 지킬 뻔했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와준 시민들이 얼마나 고마운가. 눈물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부산시농민회 창립하면서 농민운동을 시작했고 수십년 진보적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했지만, 남태령과 같은 감격은 처음이다. ‘남태령 대첩’ 이후 농민회원들에겐 ‘농민들을 위해 시민들이 적극 나서 주는구나’하는 고마움이 커져 있다. 큰 성과다. 이를 계기로 농민운동가로서 우리의 자세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업이 소외돼 있고 도시민들이 농업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우리 안에 쌓아둔 편견을 깨야 하고, 다양한 정체성의 시민들과 더 넓고 더 낮게 연대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2030 청년들이 남태령에서 농업 민생 4법을 검색하고 양곡관리법 내용을 파악하면서 자유발언대에 나서는 것을 보지 않았나. 농민들만 외치던 농업 문제가 국민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농민들이 왜 싸웠는지 알리는 중요한 시간을 보냈기에 농업 문제를 범국민운동 과제로 판을 넓혀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본다.

농민들에게 사회대개혁이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공정함이 사회의 기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와 농촌이 공정하게 발전해야 하고, 소득격차도 줄이고, 생산한 농산물에 공정한 가격이 매겨지면서 국민 누구나 기본권으로서의 먹거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국민의 지지가 높을수록 농업 문제 해결도 수월해진다. 농업 문제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확실히 각인시킨 남태령 투쟁을 경험했으니, 강하게 밀어붙이면 좋겠다. 수십년 이어진 개방농정을 비롯해 기후재난이 상시화됐는데 대응 매뉴얼도 없고 땜질식 처방으로 넘어가는 것도 문제고…, 농촌의 의료와 교통 문제 등을 방치하고 농산물 가격에 생산비를 감안하려는 정책적 노력이 하나도 없는데, 농촌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고 살겠나. 새 정부에서는 농업은 공공재라는 인식 아래 국가책임을 높이는 정책과 제도로 재편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 이후 농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농민운동진영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국가 의지가 없으면 농업이 보존되기 힘든 시대가 됐다. 개발이 우선되는 사회이고 기후위기가 상시화된 현재, 한번 훼손된 농지를 복구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의 생명과 연결된 농업의 가치를 국민과 함께 논의하는 일에도 더 적극 나서야 한다." 한승호 기자
"국가 의지가 없으면 농업이 보존되기 힘든 시대가 됐다. 개발이 우선되는 사회이고 기후위기가 상시화된 현재, 한번 훼손된 농지를 복구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의 생명과 연결된 농업의 가치를 국민과 함께 논의하는 일에도 더 적극 나서야 한다." 한승호 기자

농업과 농민을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의 면면을 재정비하는 게 필요하다. 전농을 비롯한 농민의길 소속 단체만 할 게 아니라 농민단체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 농민들이 요구해서 문재인정부 때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가 출범했지만 현재 유명무실하지 않나. 농업기관, 연구자, 학계 모두 정부 눈치만 볼 게 아니라 농업과 농촌, 농민을 살리는 일에 복무해야 한다. 농민보다 농업기관 임직원, 연구자가 더 많은 나라가 말이 되나. 과채류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토마토를 직접 심어보고 밭에서 연구해서 문제가 뭔지, 제대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올바른 정책이 나온다. 숫자로 자급률을 따지는 전문가보다 농사 현장에 밝은 전문가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 국가 의지가 없으면 농업이 보존되기 힘든 시대가 됐다. 개발이 우선되는 사회이고 기후위기가 상시화된 현재, 한번 훼손된 농지를 복구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의 생명과 연결된 농업의 가치를 국민과 함께 논의하는 일에도 더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런데 농업계의 변화가 난망하다. 농업 소외를 외치던 농민단체와 농업전문지들이 남태령의 승리에 침묵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전 농업계가 각성하고 뭉치는 게 시급하다.

농정 현실은 농민들의 열망을 외면하는 것 같다. 올해부터 8만ha 쌀 재배면적 감축, 수입보장보험 본사업 등이 시행되지 않나

전농을 비롯한 농민의길 소속 단체들이 40만8700톤의 외국산 쌀 수입 중단하라고 외쳤더니, 정부가 딱 그 면적만큼인 8만ha의 국내 쌀 생산기반을 없애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식량안보의 관점도 없고 행정력으로 밀어붙이는 행태가 지속되고 있다. 정부가 이달 안에 감축통지서를 농민들한테 보낸다고 하는데, 전농의 기본 방침은 감축 거부다. 그런데 농민 개개인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돼 있어서 굉장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법적 검토부터 시작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다. 8만ha 감축 정책에 대한 의견을 모으기 위해 전체가 모이는 것도 필요하다. 농민단체 간 입장이 달라 쉽진 않겠지만, 농민만 보고 정부와 투쟁해야 한다. 이 문제는 전국 농민 모두에게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므로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렵다고 안 할 수는 없다.

전농의 2025년 사업계획도 궁금하다 

농민회원들 연세도 많아지고 농민운동에 참여하는 기력도 떨어지는 게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농업을 이렇게 방치해선 안 된다는 일념만은 여전히 짱짱하다. 아직 구체적인 사업계획서가 나온 것은 아니나, 남태령에서 다양한 시민들과 연대한 힘을 잊지 말고 농민회원들도 마을 곳곳에서 연대하자고 당부드린다. 집회를 하더라도 여럿이 나설 수 있게 더 노력하고, 마을 행사에도 회원들이 적극 참여해 농민회‧비농민회 가릴 것 없이 함께하는 게 필요하다. 남태령에서 우리가 받은 폭넓은 연대의 힘을 마을에서도 적극 실천하자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다 끌어안는 한 해로 만들어야 한다.

지난 3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 중단 소식이 전해지자 이날 저녁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체포 촉구 집회'에서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 윤 대통령을 체포하지 못한 공권력을 규탄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3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 중단 소식이 전해지자 이날 저녁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체포 촉구 집회'에서 하원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 윤 대통령을 체포하지 못한 공권력을 규탄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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