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은 문화유산 답사를 위해 들락거리던 곳이다. 고분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 전부인 고령의 오일장은 과연 어떨지 무척 궁금했다. 3만명 남짓의 사람들이 사는 곳의 오일장이 뭐 거기서 거기겠지, 뻔하게 한적하고 작은 장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달랐다.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늘어선 장은 대가야시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주차장이 여러 곳에 있었지만 주차를 하기 쉽지 않았고 사람도 많아 걸음이 쉽지 않았다. 주말이 장날과 겹치면 떠밀려 다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 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물으니 고령은 대구 달성과 성주, 합천에 접해 있어 이웃지역에서 많이 찾는 장이라고들 했다. 아무튼 오일장은 사람들이 넘쳐나게 많아야 오일장답다. 그런 면에서 고령오일장은 지루하게 걷지 않아도 되는 오밀조밀한 골목과 거리가 어우러져 다니는 재미가 좋은 장인 것 같다.
직업 특성 상 지방을 많이 다니게 되는데 특히 가을에 농산촌 근처를 지나다 보면 시제 지내는 모습을 간간이 보게 된다. 그럴 때면 어린 시절 마을의 시제 음식을 담당하셨던 외할머니 생각이 나곤 한다. 마침 고령장에 간 날이 11월 중순, 아직 고령도 시제를 지내는 마을이나 집안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상설시장 안쪽에 있는 건어물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물건을 사고 있었다. 다른 시장에서 보기 힘들게 마른 문어들이 약간 과장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보통 각종 제사에 올라가는 건어물은 마른 명태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고령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는 마른 문어와 명태, 가오리, 오징어, 합자(홍합) 등을 고루 올린다고 했다. 마른 상태로 그냥 올리는 것도 있지만 문어처럼 오래 물에 담갔다가 삶아 제수로 쓰는 것도 있다고 했다. 대가야의 역사를 품은 지역이라 그런지 기제나 시제가 많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건어물상도 성업하는 것이라 짐작된다. 해안가에서는 생물을 제사에 쓰겠지만 고령처럼 바다가 가까이 없는 지역에서 나름대로 해산물을 올리는 지혜가 만든 장터란 생각이 들어 재미도 있었다.
그곳에서 지역의 특색을 살린 밀키트를 만났다. 남편이 팔고 있는 마른 문어를 이용한 미역국과 죽을 개발해 냉동유통을 하고 있었다. 지역의 오일장이 나가야 할 바람직한 모습이라 여겨졌다. 촬영에도 흔쾌히 응해주셨다. 나도 만들어보고 싶어 밀키트도 사고 마른 문어도 몇 마리 샀다. 아무리 작은 시장이라도 길을 나서기만 하면 배울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음을 느낀다.
오일장이 서지 않는 보통날의 대가야시장은 장을 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불이 꺼져 어둡고 휑한 곳이다. 그런 그곳에 장날이 아닌 날 더 반짝이고, 장날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공간들이 있다. 자기 이름 ‘전홍태’를 걸고 커피를 파는 카페, 그리고 그 부인 이향 시인이 여는 작은책방 ‘오르는 능’이 바로 그곳이다. 장이 서지 않던 날 어둑한 장터 골목에서 처음으로 만난 카페와 책방 때문에 다시 가고 싶은 시장이 된 곳이 바로 대가야시장이고, 대가야시장이 품고 있는 고령오일장이다.
철밥통이라고 부르는 공무원직을 버리고 나와 1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시장과 함께 해온 전홍태 대표가 존경스러웠다. 매달 내는 월세도 부담스럽지만 작은 시장 안에서 작은 책방을 잘 지켜내고 싶은 희망을 키우고 있는 책방주인은 부러웠지만 걱정이 되었다. 책을 한 권 사면 건너편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 쿠폰을 한 장 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이 비슷하고 조금 다른 장터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흥미로움은 오로지 카페와 책방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전국의 장터를 다닐 때마다 그곳의 청년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이 유적처럼 있기도 하고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처럼 훈훈하고 아름다운 카페와 책방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아침을 먹은 국밥집도 괜찮았고, 점심에 들러 먹은 고추장석쇠불고기도 괜찮았다. 정말 만나기 힘든 송기떡을 파는 곳이 여기저기 있는 것도 좋았다. 왜관장에 이어 다시 만난 도토리묵장수도 반가웠고 속이 덜 찬 배추를 팔던 할머니, 어머니가 담갔다는 간장을 들고 나온 상인도 재미났다. 수구레국밥과 볶음, 통발로 잡았다는 자연산 미꾸라지를 만날 수 있는 곳이자 대구 서문시장에서 파는 납작만두도 있다. 없는 게 많은 것 같지만 없는 게 없는 오일장이 고령오일장이다. 시장도 시장이지만 대가야의 유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니 일부러 찾아도 좋을 곳이 고령오일장이다.
고은정 제철음식학교 대표
지리산 뱀사골 인근의 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제철음식학교에서 봄이면 앞마당에 장을 담그고 자연의 속도로 나는 재료들로 김치를 담그며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해 50여 가지의 밥을 한다. 쉽게 구하는 재료들로 빠르고 건강하게 밥상을 차리는 쉬운 조리법을 교육하고 있다. 쉽게 장 담그는 방법을 기록한 ‘장 나와라 뚝딱’, 밥을 지으며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밥 짓는 법과 함께 기록한 ‘밥을 짓다, 사람을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