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에서 농민운동까지, 제주 역사엔 그가 있다

[여성+농민 개척보고서]

김옥임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 입력 2021.12.19 18:00
  • 수정 2021.12.22 09:14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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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대학 4학년 졸업식을 일주일 앞두고 총선 합동유세장에서 동급생 2명과 반정부 선전전을 해 당시 제주학생운동 진영을 깜짝 놀라게 한 김옥임 전 전여농 회장은 30여년 농민으로 살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일에 적극 나서왔다.
대학 4학년 졸업식을 일주일 앞두고 총선 합동유세장에서 동급생 2명과 반정부 선전전을 해 당시 제주학생운동 진영을 깜짝 놀라게 한 김옥임 전 전여농 회장은 30여년 농민으로 살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일에 적극 나서왔다.

전국이 ‘민주화’ 열망에 휩싸였던 지난 1980년대, 제주 학생운동사에 기록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미디어제주>가 지난 2007년, 6월 항쟁 20주년 특별기획으로 제주의 민주화 운동을 조명했다. 민주화 운동 태동기의 내용을 기록한 기사에서 제주대학교가 ‘1985년 5월 광주학살 규명시위와 횃불시위’를 하면서 학생운동의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횃불시위의 도화선이 된 건 이보다 3개월 앞에 있었던 ‘제주대 여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었다.

제주 학생운동의 주역, 농촌으로

1985년 2월 9일 ‘장은심, 김옥임, 오옥만’ 이렇게 3명의 제주대 4학년 여학생들이 졸업을 일주일 앞두고 제주시 광양초등학교 제12대 총선 합동 유세장에서 반정부투쟁을 벌인 것이다. <미디어제주>는 “이 사건이 제주대 학생운동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면서 “1980년을 전후해 소위 ‘언더’라는 학습조직을 만들어 물밑에서 활동해 오던 학생들이 드디어 수면 위 정치투쟁으로 나서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고 썼다.

총선 합동 유세장에서 반정부 선전전을 한 여학생 3명의 활약은 이후 학생운동 진영에 파장을 줬고 그해 5월 제주대학교 학생운동사에 처음 있는 일로 기록된 전경과의 첫 투석전, 첫 최루탄 발사, 그리고 제주시 도심 한복판에서의 횃불시위까지 일파만파 번졌다.

4학년 여학생들의 유세장 반정부 선전전의 장본인 중 한 명이 바로 김옥임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회장이다.

김옥임 전 회장은 전국단위 회장 임기를 끝내고 다시 제주로 내려와 농민으로, 여성농민운동 활동가로 또 분주한 일상을 살고 있다. 지난 13일 서귀포시 대정읍 자택에서 만난 김 회장은 “요즘은 홍미향(만감류) 하우스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올해가 4년 차인데 내년부터는 수확할 수 있다”고 기뻐했다.

농사 번듯하게 지으니 비로소 공동체 일원으로 안착

밭농사 2,000평과 650평 감귤 하우스 농사를 지어왔지만 중앙단위 회장을 맡고 혼자 농사를 짓는 것은 무리였다. 밭농사는 이웃 지인에게 임대를 줬고 현재는 감귤 하우스에만 집중하고 있다.

김옥임 회장은 잘 알려진 ‘부부 농민활동가’였다. 남편인 허창옥 전 제주도의원이 지난 2019년 갑작스런 암 선고와 투병 끝에 운명을 달리해 안타까움을 샀다. 도의회 일과 농사를 병행하겠다고 남편이 심어놓은 홍미향 하우스는 이제 전적으로 김 회장이 관리하고 있다. 중앙단위 빽빽한 일정을 소화해 내고 깜깜한 밤에 제주에 도착해서도 홍미향 하우스에서 잠깐이라도 일을 했다. ‘여기서 일할 때가 참 좋다’고 말할 만큼, 심신의 긴장을 풀고 회복하는 공간이다.

김옥임 회장의 고향은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이다. 결혼을 하면서 이곳 대정으로 왔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한 사람들이 졸업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때 선택지는 노동운동 또는 농민운동이 일반적이었다. 김 회장은 제주가 농업 중심인 지역이라는 점에서 농촌에서 농민으로 살아가기로 전망을 세운 것이다.

“지금은 여성 혼자 귀농·귀촌하는 일이 흔하지만, 30년 전에는 여자 혼자 농사지으며 산다는 건 뭔가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컸다. 그래서 졸업한 선배들에게 농촌으로 시집가야 하니 좋은 사람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

내년에 첫 수확을 하는 홍미향 하우스에서 가시를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년에 첫 수확을 하는 홍미향 하우스에서 가시를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 뜻이 맞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88년 마침내 허창옥 전 의원과 결혼해서 시댁 동네에 정착했다. 마침 대정은 가톨릭이 종교적으로 번성했고, 청년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농사를 짓고 아이를 키우고 시어른을 봉양하면서도 ‘어떻게 농민운동을 실천하며 살 것인가’의 화두는 늘 날카롭게 품었다.

대정읍에 농민회가 결성된 계기는 ‘송악산 군사비행장 반대 투쟁’이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동네에 그것도 송악산을 깎아내 군사비행장을 만든다니, 대정읍민 모두 반대투쟁에 나섰다. 그 계기로 만난 사람들이 1989년 즈음 대정읍농민회를 결성했다. 여성농민회를 별도로 만들지는 않았고 농민회 내 여성농민위원회로 활동하면서 지역 여성농민들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농사짓느라 한 고생은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다. 내 땅이 없는 데다 초기에 농사기술도 서툴러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리 같은 조건에서는 주로 수확을 많이 하는 하우스 농사를 짓는다. 그래서 옆 동네 토마토 하우스를 얻었는데 딱 3년 차가 되니 큰 수익이 날 정도로 농사가 잘 됐다. 실망만 하던 농사에서 처음 맛본 성공이었다.”

‘농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마을 공동체 일원이 되는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3년 차에 성공한 토마토 농사 덕에 마을 활동에도 전보다 생기가 돌았다.

부부 농민활동가도 넘기 어려운 가사분담

농촌에서 여성들이 감당해야 할 것은 많지만 여건이 너무 열악했다.

“여성농민들 스스로 움츠러들고 나서지 못하는 건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을에서 부녀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부녀회 회의 진행에 회원 남편들이 거들고 있는 모습을 봤다. 회의를 진행해보고 참가해 본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남자들이 돕고 있었던 것이다. 서툴러도 우리끼리 해보자, 의견을 냈다. 회의순서를 칠판에 적는 것부터 사회를 보는 요령, 회의안건을 올리고 진행하는 방법까지 우리끼리 묻고 반영해 보고. 남편들이 보조진행자가 됐던 부녀회 회의 문화를 바꿨다.”

하다못해 앞에 나서서 인사말 한마디 하는 것도 부끄러워하던 여성농민들을 다독이고 격려하면서 경험치를 늘려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변해야 했지만 깊이 뿌리박힌 남녀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진보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도 농촌의 가부장적 문화를 바꾸는 일에 쉽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마당에 빨래를 너는 일도 마을분들이 오며가며 보다 보니 남편한테 집안일을 똑같이 나누자는 말을 못했다. 나 스스로도 남자들 농삿일이 더 과중한 농업노동이라는 생각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지금 생각하면 옳지 않지만 남녀가 평등하게 집안일을 나눠야 한다는 것은 부차적인 일로 치부했었던 것 같다.”

자연스레 농민회 내에서 여성농민회가 분리돼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다. 여성위원회 활동이 부족해서 분리하자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남자들이 육아·가사·탁아 등의 일에 전적으로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엄마만큼 고민하지 않는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농촌 아이들의 탁아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농민회 안건에 올리면, 적극적이거나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민우회와 연대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농촌마을에서 한달 동안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공감대를 키워나갔다. 대부분 엄마들이니 농촌마을의 아이들 챙기는 것은 능숙하기도 했지만 정서적 교감도 깊어졌다.”

결국 여성농민 문제는 여성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고, 지역의 여성농민회를 조직해 나가면서 1996년 전여농 제주도연합이 탄생했다. 여성들끼리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농민운동 추진 속도도 눈에 띄게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대정읍여성농민회, 25년 만에 현판식 열어

대정읍여성농민회는 최근 사무실에 현판을 걸었다. 여농 출범 이후 25년 만이다. 지난 2004년 김옥임 회장이 대정읍여성농업인센터장을 맡으면서 공간 한쪽을 여성농민회 용으로 ‘더부살이’를 했었다. 최근 대정읍여성농업인센터가 인근으로 새터를 마련하면서 여성농민회도 비로소 번듯한 사무실을 사용하게 됐고, 25년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여성농민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정읍여성농민회’라고 적힌 현판을 걸면서 기쁨을 나눴다.

“회원들 모두 지난 25년을 복기하면서 울컥했으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또 살아야 할 이유를 꼽는 굉장히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2019~2020년까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을 하면서 참 많은 일을 했다. 서울 강서구 KBS 아레나홀에서 전여농 30주년 행사를 열어 전국 곳곳에서 활동하던 여성농민 1,700여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큰 행사도 치렀다. 전국 여성농민운동의 30년을 기록한 전여농 30년사 발간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김 회장은 1년이 마치 10년을 산 것처럼 분주하고 빽빽한 날들이었지만, 코로나19로 경험해보지 않은 시간을 지내면서 ‘그때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현재 코로나19 시국은 모든 게 제한되는 척박한 시기라고 얘기했다.

“전여농 회장을 하고 제주에 돌아오니, 마을 분회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꼈다. 제주는 특히 도연합 아래 시·군·읍·면 그리고 마을분회까지 촘촘히 조직돼 있는 모범활동 지역이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서로 버팀목이 돼 주는 세월이 이제 굳은살처럼 단단해졌다. 특히 제주 여성농민들이 대안을 만드는 운동을 했다는 것은 자랑거리 중 하나다. 토종종자를 지키는 활동을 일찌감치 시작했고, 생산자들이 공동체를 만드는 활동도 자랑하고 싶다. 결국 이런 것들이 식량주권운동이자 대안적 농민운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김옥임 회장은 제주 여성농민들의 다양한 활동 자랑에 눈빛까지 반짝이며 열심히 설명했다. 공부하는 여성농민이 아름답다는 말을 직접 실천하는 학습 소모임은 페미니즘, 역사, 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배우고 실천하고 있다. 생산공동체부터 장터공동체까지 구체적인 상을 만들어 내는 일도 제주여농이 앞서고 있는데, 장터공동체는 제주 전역에 개별 혹은 공동체에서 생산한 농산물, 가공한 농산물로 장터를 만들어 판매하고 소비자를 만나는 활동이다. 농업인회관 앞마당, 한살림 매장 가두판매대 등이 장터공동체가 주로 활용하는 공간이다.

“장터공동체는 작년부터 협업으로 판매활동을 하고 있다. 대정장터공동체의 경우 토종던덕깨, 토종푸른콩, 토종보리를 공동으로 농사짓고 판매까지 한다. 농생태적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지향점으로 공동체를 구성했고 우리 스스로 생산부터 판매까지 해 나간다는 점에서 건강한 대안농정 모델이 되고 있다. 서울에서 2년 활동하고 제주에 와보니 이전에 하던 일들의 진면목을 깨닫게 됐다.”

30여년 전 제주학생운동의 판을 흔들었던 김옥임 회장은 “학생 때는 무식하게 용감했다. 농민으로 살면서 그 시기시기마다 주어진 일에 비켜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근저에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것 그리고 ‘운동’이라는 변화 발전을 확신하는 것이 기준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김옥임 회장은 트럭을 몰고 하루가 멀다 하고 ‘홍미향 하우스’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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