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만 하던 ‘이장’, 부녀회장 23년 하니 그제야 내 차례

[여성+농민 개척보고서]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마을 이태영 이장

  • 입력 2021.02.21 18:00
  • 수정 2021.10.22 17:19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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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올해로 여성농업인육성5개년 계획이 세워진 지 21년차를 맞았다. 사회는 성적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발전하고 있지만 보수성이 강한 농촌사회는 더디게 변화하고 있다. 여성이면서 농민인 ‘여성농민’들은 어떻게 기울어진 사회의 수평점을 맞추고 있는지 그 현장을 기록한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마을 이태영 이장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마을 이태영 이장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마을 이태영 이장(68)은 긴 설 연휴 전에는 농사일이 바빠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설이나 지나거든 보자고 했다. 일하는 얘기, 사는 얘기 그리고 여성농민으로 살아온 소회를 듣는 장소가 방울토마토 작업을 하는 바쁜 하우스 안이어도 좋겠다 생각했지만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설 명절 대목장을 지난 뒤 뵙기로 했다.

한층 봄기운이 오른 지난 16일 함안군 군북면 ‘군북역’을 지척에 둔 이태영 이장의 하우스가 인터뷰 장소였다. 일방석을 깔고 앉아 얘기가 시작됐다.

“이장들은 면에서 특히 조심을 시키거든. 코로나로 난리도 아닌데 서울에서 내려온다는 말이 달갑지 않았지.”

속마음 그대로 첫인사를 건네셨다. 설 전에 혹시나 동네에 코로나라도 퍼질까 서울서 온 객을 선뜻 들일 수 없었다고, 투철한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고백 아닌 고백부터 듣게 됐다.

지역의 여성농민단체장 도맡아 하던 ‘대장부 언니’

경남 함안군 가야면이 고향인 이태영 이장은 어릴 때야 부모님 농사를 거들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객지로 나가 회사를 다녔다. 다시 농촌으로 시집온 것은 온전히 부모님 뜻이었다.

“난 촌에 올 생각도 안했어. 농사가 힘든 걸 아니까.”

결혼을 하고 2남 2녀를 두고 농사일을 하면서 참 바쁘게도 살았다. 함안군에서 나보다 바쁜 사람은 없었을 거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 배경엔 지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여성농민단체에 ‘장’을 맡았던 탓이다. 군북면 새마을부녀회장, 생활개선회장에 동촌마을부녀회장까지, 일을 맡으면 몸을 사리는 건 질색하는 성미라고 소개한다.

여성농민회가 뭐꼬?

2003년 함안군에 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함안군농민회는 진작부터 활동을 해 왔지만 여성농민회는 도무지 생소했다.

이웃마을에 사는 한승아 함안군여성농민회 사무국장이 2004년, 그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울로 농민대회 하러 가면 함안군에서 버스 1대가 출발했던 시절이다. 그러다 한-칠레 FTA 반대 투쟁이 거세졌고 서울 여의도 30만대항쟁을 결의할 때는 함안군에서 버스 30여대가 올라갔다. 그 무렵이 함안군여성농민회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할 때였다. 몇몇 활동가들을 제외하곤 구호에 나오는 단어들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이태영)회장님이 한-칠레 FTA가 무슨 말이냐 물어봤었다.”

지난 16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 위치한 방울토마토 하우스에서 이태영 동촌마을 이장이 토마토 줄기를 손보던 중 카메라를 보며 밝게 웃고 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인터뷰 내내 마스크를 착용했던 이태영 이장은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6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 위치한 방울토마토 하우스에서 이태영 동촌마을 이장이 토마토 줄기를 손보던 중 카메라를 보며 밝게 웃고 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인터뷰 내내 마스크를 착용했던 이태영 이장은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한승호 기자

이태영 이장은 고민이 많았다. “행정과 우호적인 단체장으로 활동해 왔었는데, 정부에 반대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농민회는 생소하기도 하고 ‘한나라당’세가 보편적인 지역 정서와도 맞지 않았다.”

행정과 오랜 안면이 있는 사이라 더 불편했다. “군수님 보기도 미안터라. 결의문을 읽어야 할 때 얼마나 어렵든지, 군수한테 미리 사정 얘기를 했을 정도다. 군수가 괜찮다고 하더라. 단체장 활동을 여러 해 하고 있었기에 잘 알고 있던 사이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람들이 여성농민회라면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다.” 하지만 집회참석에 이력이 생기다 보니 단어들도 입에 착착 붙었다. 지금은 ‘함안군여성농민회’가 토종종자사업이나 꾸러미사업 등 지역에서 활동이 널리 알려지고 행정에서도 인정해주는 자부심 있는 단체로 뿌리를 내렸다.

부녀회장만 23년, 마을 사정 제일 잘 알아

1992년부터는 동촌마을 부녀회장을 맡게 됐다. 외부활동만 열심히 한 게 아니라 마을 일에도 두 팔을 걷고 앞장섰다. 부녀회장을 23년 줄곧 도맡았는데, 그 세월 동안 온 마을의 ‘며느리’이자 ‘딸’ 노릇을 한 셈이다.

“내가 마을 이장을 하려고 마음 먹었으면 진작했을 텐데, 남자들한테 죄다 양보했다. 마을 할머니들이 연장자가 되면서 나보고 이장하라고 권유도 했지만, 하고 싶은 이들을 밀어줬다.”

54가구가 사는 동촌마을에는 중장년 주민들도 대부분 여성들이라고 귀뜸한다. 더러 젊은 남성농민들도 있지만, 지난 2016년 연말 만장일치 단독 이장 후보가 된 뒤에야 ‘동촌마을 이장’직을 수락했다. 옛날부터 남자들이 해 왔던 이장 자리를 ‘잡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줄줄이 남자 이장만 있던 동촌마을에 5년 전 여성이장이 선출된 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뭐 크게 달라진 게 있겠나. 부녀회장 때도 내내 하던 일이라. 마을방송을 하는 게 좀 달라졌을까. 근데 나는 방송만 하진 않아.”

행정에서 주문하는 일이나 공지할 사항, 복지물품 등을 “신청하시오, 찾아가시오” 하고 방송안내하는 걸로 끝맺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고령의 어르신들은 ‘찾아가는 서비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집집마다 잘 찾아다닌다. 나눠줄 물품이 있으면 우리집에 찾으러 온 사람들은 그들대로 분배하고, 명단 작성해서 못 받은 사람들은 그 집에 가져다준다. 정책이 바뀌어서 신청서류를 내야 하는 것도 싹 모아서 내가 면사무소에서 일괄처리 하고 있다.”

농촌마을 교통사정은 도시와 달라 집에 차가 없으면 기한 내 면사무소를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 복잡한 서류를 갖추는 것도 어르신들에겐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한승아 함안군여성농민회 사무국장은 “이런 직접적인 도움이 농촌에서는 정말 요긴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을 이장님들은 방송 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긴다. 그러다 보면 꼭 필요한 정책사업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태영 이장님 사는 마을분들은 자기한테 필요한 정책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된다”고 자랑했다.

지난해 공익직불제 신청도 서류를 모두 이태영 이장이 챙겼다. 마을에 6가구 소규모 농사를 짓는 할머니들도 한 분 빠짐없이 소농직불금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사실 중앙정부에서 농업정책을 하나 만드는 일은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은 전국에서 시행되는 ‘여성농민바우처’ 사업의 경우 농식품부가 대대적인 홍보를 하더라도 경남 함안군 어느 마을에 사는 여성농민 모두 바우처 혜택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제 지자체에선 예산을 세웠어도 불용예산이 생길 때가 많은데, 조건에 맞지 않아 바우처 신청을 안하는 게 아니라 ‘잘 몰라서’ 불용되는 예산이 상당하다. 한승아 사무국장은 “맨 처음 바우처사업이 시작됐을 때 이장님들이 개별 연락을 해서 신청을 적극 독려했는데, 제작년부터인가 면사무소에 직접 신청하라는 얘길 들었다. 전화로 이런 사업이 있다 정도로 설명하면 끝이다”고 아쉬워했다.

이태영 이장의 활약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이런 ‘세심함’에서 나온다. 면사무소에서도 동촌마을 이장님을 환대한다. 업무가 간단명료하게 정리되기 때문이다.

“자화자찬은 못 하는 성격인데, 동네분들이 ‘다음에 누가 이렇게 이장하겠냐’고 한마디씩 해 주신다. 내가 한 역할이 괜찮았다면 이후엔 누가 하든 이장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기준은 되지 않겠냐 생각한다.”

이태영 이장(오른쪽)과 한승아 함안군여성농민회 사무국장이 토마토 줄기를 고정시키는 작업 도중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승호 기자
이태영 이장(오른쪽)과 한승아 함안군여성농민회 사무국장이 토마토 줄기를 고정시키는 작업 도중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승호 기자

 

 

깡통아지매, 일은 내가 하고 상은 ‘남’이 받고

단체장을 하면서 여성이라서 차별받은 경험은 없는지 물었다. 이태영 이장은 “크게 힘든 것도, 차별받았다는 생각도 없다”면서 “뭐든지 열심히 하자는 책임감이 컸지 서운할 겨를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농촌마을의 보수성에 상처를 받은 일이 왜 없었겠나.

“속상한 적은 있었다. 군새마을회 여성회장을 맡았을 때 남자회장이 진짜 협조를 안해줬다. 내가 군에서 몇 가지 사업을 맡아오면, ‘이 회장, 너 혼자 해라’ 이런 말부터 들었다. 얼마나 속상하든지,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새마을회 여성회원들과 악착같이 일을 해냈다. 그렇게 맡은 일 중 하나가 ‘깨끗한 함안만들기’ 사업이었다. 쓰레기 모으기 농약병 모으기부터 깡통모으기까지. 얼마나 독하게 했으면 함안군에서 나를 ‘깡통아지매’라고 불렀다. 군새마을회 행사에 나가 깡통모으기 성공 사례 발표를 하고 신문기사에 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상 복도 많았다. 내무부장관상을 받으러 서울에 갈 정도로 ‘잘 나가는’ 아지매였다.

결국 함안군에서 깨끗한마을 가꾸기 사업 1등상을 받게 됐다. 군북면새마을회가 받게 되는 1등상은 상금도 500여만원이나 됐다. 시상식 날이 12월 30일이었는데, 날짜가 다가오자 대뜸 새마을회 남자회장이 “이 회장은 바쁜데 오지 마라”고 했다. 기분이 팍 상했으나 두말하지 않고 “가이소”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꽃다발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상을 받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나중에 상을 받아온 남자회장이 상금 20만원을 받은 다른 면 회장들도 꽃다발 받는데 본인은 일절 꽃다발이 없어서 기분이 상했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제야 한마디 쏴 붙였다. “나보고 오지 말라고 회장님이 그러지 않았냐. 무슨 꽃까지 기대하냐. 나도 기분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깡통수집상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일은 죽자고 했는데 상을 타게 해줘 고맙다는 인사말은커녕 고작 꽃다발 준비 안 한 타박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많이 달라져서 다행이라고 이태영 이장은 말한다. “큰 행사에 여성단체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수고를 하지만 남자들도 거들려고 음식 나르고 한다. 인사를 받을 욕심은 없지만 결국 행사준비로 무대 뒤에서 부지런을 떠는 여성단체장들은 행사장 의자에 앉을 틈이 없어서 내빈인사에 주로 생략되기 일쑤다. 하지만 천 명이 먹을 국을 끓이는데 맛이 없으면 되나.”

나를 앞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움직이다 보니 여기저기 감투도 많이 썼다. 지난해부터 농협 이사도 맡았다. 6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 모두 8명의 임원 중에 처음으로 여성조합원이 2명 포함됐다. 여성농업인육성계획 21년차와 비교해 참 느린 변화다. 아직 농협일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지만, 궁금한 건 사전에 물어보고 미리 조율해서 큰소리 내지 않고 일을 처리한다.

이태영 이장은 “마을에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많다. 우리 인근만 그렇지는 않을 거다. 농촌이 더 잘 살기 위해선 남녀 구분하지 않고 힘을 모으는 게 필요하다. 좀 더 많은 여성 이장들이 마을 곳곳을 누볐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고루한 고정관념을 떨쳐내야 하는 것은 도시나 농촌이나 마찬가지지만, 환갑이 넘도록 이장 자리조차 양보해 온 여성농민들의 속깊은 배려가 전국 곳곳의 마을을 평화롭게 유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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