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1년만에 경영정상화, 실력파 재선 여성조합장

[여성+농민 개척보고서]

안정숙 충북 청주 청남농협 조합장

  • 입력 2021.04.18 18:00
  • 수정 2022.01.03 14:38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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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올해로 여성농업인육성5개년계획이 세워진 지 21년차를 맞았다. 사회는 성적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발전하고 있지만 보수성이 강한 농촌사회는 더디게 변화하고 있다. 여성이면서 농민인 ‘여성농민’들은 어떻게 기울어진 사회의 수평점을 맞추고 있는지 그 현장을 기록한다.
첫 선거에서 ‘여자가 무슨 조합장이냐’는 면박을 들었지만 2015년에 이어 2019년 재선에 성공한 안정숙 청남농협 조합장.
첫 선거에서 ‘여자가 무슨 조합장이냐’는 면박을 들었지만 2015년에 이어 2019년 재선에 성공한 안정숙 청남농협 조합장.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교수인 ‘재러드 다이아몬드(<총, 균, 쇠> 등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함)’는 최근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의 문제 3가지 중 하나를 ‘여성차별’로 꼽았다. 한국 여성들은 다른 어떤 부유한 선진국들에 비해 더 불평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인구 5,000만의 국가이면서 실제로는 2,500만 인구의 나라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절반의 인구, 남자들이라고 모든 기회가 고르게 주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적 지위가 남성들 중심으로 돌고 도는 것만은 분명하다. 지역농협도 마찬가지다. 전국에 1,118개의 지역농협이 있고 1,118명의 조합장이 있지만 그중 0.7%인 8명만 여성 조합장이다.

8명의 여성조합장들은 지난 2019년 ‘여성농협조합장협의회’를 통해 뭉쳤다. 그 산파역할은 충북 관내 ‘첫 여성조합장’이자 ‘첫 여성 재선조합장’인 안정숙 청남농협 조합장(충북 청주시)이 맡았다.

‘부녀지도직’으로 농협 재취업 성공

안정숙 조합장은 보험업에 종사하다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이자 엄마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 남편과 사별하면서 갑자기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 가장’이 됐다. 1986년 당시 문의농협(현 청남농협은 1998년 문의·가덕·남일농협 합병 조합) ‘부녀지도직’을 뽑는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내 35살에 농협 직원으로 다시 사회에 나왔다.

“지금은 여성복지직이라고 하는데, 부녀지도직 직원은 농촌여성들의 문화·교육 등 계몽사업들을 담당했다. 현재도 도시에 비해 문화적 기반이나 경제적 기반이 부족하지만 1980년대는 더 차이가 컸다. 주부대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취미교실과 교육활동을 통해 문화적인 지위향상을 고민했었다.” 면 단위 최초의 ‘주부대학’이었다.

스스로를 ‘중성적’으로 살았다고 표현하는 안 조합장은 스스럼없는 성격 탓에 동료들과 큰 어려움이 없었다. 분위기를 주도할 뿐 아니라 농협에서 내건 예금이나 보험 목표량도 쾌속으로 달성했다. 사무실에 할당된 사업목표도 혼자서 절반을 해결하니 동료들 부담이 대폭 줄었다. 전국단위 ‘세일즈왕’으로 뽑힐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다. 비결을 묻자 ‘농민조합원들과의 친밀도’라고 답했다. 덕분에 승진도 빨라 입사 13년차에 상무 자리에까지 올랐다.

안 조합장은 농협 지점장을 할 당시 여성이 지점장이 됐다고 격한 항의를 받았다. 심지어 경운기·트랙터를 몰고 조합장한테 가서 ‘인사를 취소하라’고 시위까지 벌어졌다. 당시 전국 최초 여성 지역농협 지점장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지역에서 지점장으로 4년 일했다. 재밌는 건 선거에서 몰표가 나온 곳도 그 지역이라는 점이다.

밤낮, 주말 가릴 것 없이 맹렬직원으로

어려운 점도 많았다. 농협 직원 시절 복지제도가 마땅치 않아 주 5일 근무라든가 하루 8시간 근무 같은 개념이 없었다. 출장비나 조금 나올 뿐 시간 외 수당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농번기에는 주말·평일 가리지 않고 일했고, 대출금 이자 회수에 밤에도 조합원들을 만나러 다녀야 했다. 어린아이들은 엄마를 기다리다 잠들고, 아침 출근 시간마다 또 집을 나서는 엄마를 붙잡지 못해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골목까지 뒤따랐다.

“애들이 어리니 출근 시간마다 눈물바다였다. 친정엄마가 봐주셔서 맡기고 나섰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농협 퇴직 후 군의원 출마

농민들을 살갑게 찾아다니고 싹싹하게 만난 시간들이 밑거름이 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파묻혀 살다 퇴직이 코앞에 다가오니 주변에서 ‘군의원’ 출마를 적극 제안했다. 2010년 정치인이라는 새롭고 낯선 길을 결심하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한 결과 당선의 기쁨도 누렸다.

“군의원 시절 청주와 청원이 통합됐다. 통합된 시의원을 한 번 더 해볼 계획이었는데 농민조합원분들이 그러지 말고 농협을 위해 일해보라고 권유해왔다. 잘 아는 것, 잘 하는 것 해보라는 응원이었다.”

학연·혈연 없이 ‘조합장 선거’ 도전

농협에서 23년간 근무했다고 하지만, 현직 조합장을 비롯해 2명의 남성 후보와 선거전을 치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진천이 고향이고 청주에서 학교를 나온 안정숙 조합장은 선거에선 외지인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성이 ‘감히’ 조합장을 한다는 것에 어르신들은 대놓고 면박을 줬다. ‘여자가 무슨 조합장이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부터 더 험한 말도 들었다. ‘앉아서 오줌 누는 년이 왜 나왔냐’까지.

“조합장 출마를 하겠다고 결심한 건 농민조합원들한테 더 잘하는 농협을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이 가장 컸다. 하지만 농촌지역은 학연과 혈연, 지연이 50% 이상 영향을 주는데, 23년 농협에 근무했다는 것 외에 내가 유리할 게 하나 없었다. 농촌은 가부장적인 보수성이 짙어서, 당시엔 이장도 여자를 안 시키는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2명의 남성 조합장 후보를 제치고 47% 득표율로 당당히 당선됐다. 여성조합원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탓만도 아니다. 전체 조합원의 34%가 여성인데, 그 비중보다 훌쩍 높은 표심을 얻은 것이다.

안정숙 조합장이 지역 특산품인 딸기를 고설재배하는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 청남농협 제공
안정숙 조합장(왼쪽 두번째)이 지역 특산품인 딸기를 고설재배하는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청남농협 제공

당선 후 1년, 적자관리농협을 흑자로

1986년 부녀지도직 직원으로 농협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30년만인 2015년 청남농협 조합장이 됐다. 하지만 당선 후 1년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기억을 꺼냈다.

“농협 경영상태가 최악이었다. 2015년 7억3,000만원 적자결산을 봤고 관리대상 농협으로 편입됐다. 53억원 가량의 부실채권이 있을 뿐 아니라 출자배당도 못할 정도로 위기였다. 선거가 끝나고 농협을 되살리는 일도 벅찬데 상대 후보측의 비방도 심각한 지경이었다. 농협이 곧 망하니 출자금을 빼가라는 현수막도 걸리고, 대출문제로 법정소송도 벌어졌다. 너무 고마운 건 단 한 사람도 출자금을 빼가지 않았고, 직원들은 상여금까지 반납하면서 헌신했다.”

출자금을 돌려달라고 조합장실을 찾아온 이도 있었다. 안정숙 조합장은 “우리 농협은 부도날 일이 절대 없다, 농촌이 부도나야 농협이 부도가 나는 것이다, 농민조합원들한테 손해가 없도록 전 직원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설득한 끝에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고 되돌아갔다. 직원들 사이에선 대출담당인 대부계를 회피할 정도로 문제가 크고 복잡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직원들과 상임이사까지 적극 나서서 ‘대출을 해야 먹고 산다’는 일념으로 서울, 강릉 심지어 제주까지 발품을 팔았다. 조합장 취임 1년 만인 2016년 적자농협이었던 청남농협은 6억3,000만원 흑자결산으로 정상화됐다.

2015년 조합장 선거에서 충북도 내 첫 여성조합장이라는 화제를 모았던 안정숙 조합장은 2019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역시 도내 첫 ‘재선’ 여성조합장이라는 역사를 썼다.

지난 4년의 초선 조합장 기간이 농협 정상화였다면, 재선 조합장은 여성문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농협은행을 찾은 조합원들과 반갑에 안부를 주고 받는 일은 안 조합장의 일상이다.
농협은행을 찾은 조합원들과 반갑게 안부를 주고 받는 일은 안 조합장의 일상이다.

전국 8명 여성농협조합장, 협의회 꾸려

지난달에 자리를 물려줬지만 지난 2019년 전국에 딱 8명 여성농협조합장들과 협의회를 꾸려 협의회장을 맡았다. 소수라서 뭉쳐야 목소리를 낼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산파역을 했던 안정숙 조합장은 “하나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전국의 여성농협조합장 8명이 모여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역농협별로 30%를 차지하는 여성농민조합원의 소통창구를 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모임에서 다들 반가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행히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여성정책과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고 농협중앙회에서도 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반향이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더 활동반경을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안 조합장은 농협중앙회의 남성 중심 인사체계에도 쓴소리를 했다. “농협중앙회 이사 1명은 여성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 의무화돼야 한다고 김병원 전 중앙회장과 이성희 현 중앙회장에게도 강조했다. 그런데 죄다 남성인 이사들이 자리를 뺏긴다는 생각에서인지 싫어했다. 이사 정원을 늘려서라도 1명은 반드시 여성으로 채우는 것이 합당하다. 뿐만 아니라 농협중앙회 여직원 수가 상당한데 임원 자리는 거의 남성 차지다. 유리천장도 심각한 유리천장이다.”

청주시농협조합장협의회장도 맡아

안정숙 조합장은 올해 농협중앙회 자금지원심의위원으로 선정됐다. 앞서 농협중앙회 290여명의 대의원 중 유일한 여성대의원으로 참석했다. 대의원회가 열리면 대장부 안 조합장도 전체적인 분위기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목소리 큰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 발언하기도 위축되고 발언 기회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여성이사 도입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난 3월엔 청주시조합장협의회 회장도 맡았다. 12명의 조합장 중 역시 유일한 여성조합장이다. “여자라고 협의회장 안 시켜 주느냐”는 농담 반 진담 반 말을 꺼냈고, 70대 연륜으로 배짱 있게 자처했다.

농민들의 어려움 중에서도 여성농민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안 조합장은 과중한 노동부담에 목소리를 다시 한번 높였다.

“여성농민들이 하는 노동량은 숫자로 표현이 안 될 정도지만, 남녀가 4대6 정도면 얼추 맞을 것 같다. 남자보다 한 시간은 먼저 일어나 밥하고, 논밭에서 농사일 똑같이 하고 집에 들어와 저녁을 하는 것부터 차이가 난다. 그것 뿐인가. 집안 살림 챙기랴 아이들 돌보랴 어른들 봉양까지 주로 여성 몫이다. 생활비 번다고 부업하고 집안 시제 챙기고. 지금 많이 좋아져서 여성들이 경제권을 쥐고 농사도 주도하지만, 아직 멀었다. 농협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고민하겠다.”

인터뷰가 끝나고 조합장실을 나서자마자 은행 일을 보러온 조합원들과 마스크 너머로 호탕하게 안부를 묻느라 바쁘다.

“조합장 두 번째 당선되고 첫 출근하는 데 한 어르신이 격려 전화를 주셨다. 지금처럼만 하라고. 그게 그렇게 반갑고 힘이 됐다. 좀 더 많은 여성조합장들이 농촌 구석구석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면 좋겠다.” 안 조합장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을 여성 후배들의 멘토 역할도 충실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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