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승장구하던 남편의 수입콩사업, 독립운동하듯 우리콩으로 바꿔

함정희 함씨네토종콩식품 대표

  • 입력 2021.08.22 18:00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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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올해로 여성농업인육성5개년계획이 세워진 지 21년차를 맞았다. 사회는 성적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발전하고 있지만 보수성이 강한 농촌사회는 더디게 변화하고 있다. 여성이면서 농민인 ‘여성농민’들은 어떻게 기울어진 사회의 수평점을 맞추고 있는지 그 현장을 기록한다.

 

전북 전주시에 있는 함씨네토종콩식품 사무실에서 ‘콩박사’ 함정희씨가 우리콩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있다.
전북 전주시에 있는 함씨네토종콩식품 사무실에서 ‘콩박사’ 함정희씨가 우리콩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있다.

‘함씨네토종콩식품’ 함정희(69) 대표는 유명인사다. 방송으로 유튜브로, 신문기사로 소개됐고, 인터넷 검색만 해도 정보가 많다. 함정희 대표를 만난 건 지난 9일, 전북 전주에 있는 함씨네토종콩식품 사무실에서였다. ‘대한민국 콩 자주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토종콩 제품을 만들고 있다’는 그의 소신은 우여곡절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시간들로 꽉 차 있었다.

8남매 중 둘째, 대학가고 싶었지만 면사무소에 취업

8남매 중 둘째 딸인 함정희씨는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면사무소에 취업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집에선 절대 안된다고 펄쩍 뛰길래 내 손으로 학비 감당하면서 공부하겠다고 우겼지만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자식도 많은데 딸을 더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옛날 분이라 더 고집을 부리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대학까지 나오면 내 성격에 이혼할 게 뻔하다는 것도 반대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면사무소 공무원 자리는 고등학교 졸업장만으로도 갈 수 있었다.”

공부하고 싶은 욕구를 꺾고 ‘완주군면사무소’ 직원이 된 함정희씨는 ‘모범공무원’ 상을 탈 정도로 의욕적으로 일했다.

“부녀회장님, 이장님들하고 말도 잘 통하고, 일하는 게 즐거웠다. 민원인들이 면사무소에 오면 내 업무가 아니어도 일이 빨리 처리될 수 있도록 나섰다. 밀가루 타러 오는 사람들이나 쌀 타러 오는 사람들 이런 생활보호대상 주민들이 수시로 오는데, 추운데 밖에 뻘쭘하게 서 있으면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난로 앞으로 모시고 일을 편히 볼 수 있도록 챙겼다. 인사 잘한다, 친절하다, 칭찬도 참 많이 들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시골의 대중교통 여건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하긴 마찬가지인데, 어느날 비가 오는 컴컴한 저녁에 인근 중학교 학생 하나가 울고 있는 걸 봤다. 사연을 들어보니 학교가 늦게 끝나 집에 갈 버스가 끊긴 상황이었다. 집까지 걷기엔 2km 거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트럭을 세우고 사정얘기를 했다. 공무원복을 입은 이가 사정사정하니 기사들도 거절하지 못하고 학생 동네로 차를 몰았다.

며칠 뒤 고사리를 잔뜩 갖고 한 민원인이 함씨를 찾았다. 학생 어머니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들른 것이다. 그렇게 미담의 주인공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대학 진학 대신 택한 공무원의 길이지만 결혼 생각도 없을 정도로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 살았다. 25살이면 ‘혼기를 꽉 채운’ 나이로 여기던 시절이었지만 27살 다소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면사무소도 그만뒀다.

“지금은 결혼을 해도 직업을 계속 갖지만, 그땐 선생님 하던 내 친구들도 결혼하면서 다 일을 그만두고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했다.”

유난한 콩 사랑, 평생 두부 먹을 생각으로 결혼

“나는 좀 단순하다. 이것저것 충분히 생각하면서 결정해야 하는데, 좋으면 바로 결정한다. 사람이 좋아서 결혼을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시댁이 두부공장을 한다는 말에 결혼했다. 어릴 적부터 콩을 너무 좋아해서 콩만 있으면 밥을 먹었다. 두부공장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평생 두부를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제일 컸다.”

1979년 결혼을 하고 20여년 두부사업 실무를 도맡았다. 남편은 너무 바빠서 주로 외부에 있었다. 두부·청국장 사업은 승승장구, 돈이 쑥쑥 쌓였다. 하지만 한켠으로 수입콩으로 만든 두부말고 국산콩으로 두부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식구들 먹이려고 국산콩 두부도 만들었지만, 수입콩에 비해 너무 값이 고가라 국산콩으로 사업을 하는 것은 엄두도 못냈다. 4남매를 낳고 키우는 동안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높아졌다.

“1980년에 첫애 낳고 신문을 계속 구독했다. 중앙지와 지방지 두 개는 꼭 읽었다. 기사 중에 먹거리 관련 소식은 더 집중해서 봤다. 멸종돼 가는 우리밀을 살리기 위한 운동본부가 생겼다는 소식부터 회원제로 우리밀을 사먹을 수 있다는 얘기도 확인했다. 회원가입은 물론 우리밀로 음식을 만들었다. 화장품, 가방 이런 관심은 하나도 없는데 좋은 먹거리 욕심은 크다. 우리 아이들이 먹을 음식이 좀 더 좋은 재료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GMO·식품첨가제, 우리를 망치는 음식들

수입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팔면서 국산콩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 구체적인 문제의식은 없었다. kg당 600원 하는 수입콩과 kg당 5,000~6,000원 하는 국산콩, 원가만 10배 차이가 나서 손익을 따져보는 게 무의미했다. 소비자가격도 달라질 텐데 비싸도 좋은 걸 사줄 거라는 기대를 하기엔 무모했다.

그러다 2001년 전주시청에서 열린 우리콩 연구가 안학수 박사의 강의를 우연히 들으면서 함정희씨는 충격을 받았다.

“유전자 변형 콩이 뭔지도 몰랐는데 수입콩이 대표적이라고 했다. 지엠오(GMO), 몬산토, 글리포세이트… 이런 단어들을 접하고, 우리나라가 지엠오 농산물 수입 1위라는 말, 치매, 난치병 등이 성하게 된 원인도 이런 오염된 먹거리가 한 원인이라는 말을 들으니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전쟁은 회복되지만 지엠오 먹거리 피해는 소멸만 있을 뿐이고 5,000년 역사가 문을 닫을 수 있다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20년을 수입콩으로 두부를 만들어서 사업을 키워온 장본인으로, 양심의 가책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더 이상 수입콩으로 두부를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대형 유통업체, 공공기관 등에 두부류를 납품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가업이 하루아침에 사업중단을 선언한 셈이다. 당시 남편은 수입콩업자들의 협의체인 전북연식품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우리가 몰라서 지금까지 수입콩 사업으로 잘 먹고 잘 살아왔지만 이제는 사는 모습을 바꾸는 게 당연하다.”

2001년 개업을 하면서 본인 성씨인 함씨와 남편 성씨인 박씨를 합해 ‘함박식품’이라고 지었다. 이것조차 남편은 ‘왜 여자이름을 먼저쓰냐’면서 ‘박함’을 우겼지만 어감도 이상해 ‘함박’이라고 지었다. 결국 나중엔 ‘박’자도 빼고 ‘함씨네’로 바꿨다.

‘잘 나가던 사업가’ 였던 남편의 반대는 극심했다. 거친 언행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혼 얘기는 입버릇처럼 나왔다. 부부싸움이 극에 치달으면 4남매를 데리고 집을 도망쳤다. 앙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작업장 입구 벽면에 함씨가 그동안 받은 상장이 빽빽하다.
작업장 입구 벽면에 함씨가 그동안 받은 상장이 빽빽하다.

 

국산콩 확대 일념으로 ‘세바시’ 출연 자처, 5년만에 성사

옳은 일이다 생각하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부도위기까지 몰리는 경영위기는 숱하게 찾아왔다.

“한번도 콩값을 깎아서 사본 적이 없다. 좋은 콩이라면 전국 어디든 찾아다녔다. 남편은 나보고 사업의 ‘사’자도 모른다고 몰아붙인다. 건강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보자고 ‘함씨네밥상(2009년)’이라는 식당도 10년 운영했다. 각종 장류부터 유기농채소로 제대로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못하고 있지만, 와서 밥을 먹은 사람들 중에는 몸이 좋아졌다는 사람도 있고, 간장 맛이 살아있다고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산콩의 우수성, 수입콩의 유해성을 얘기하고 다닌 세월이 쌓여갈수록 체계적인 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52살에 전문대에 진학했다. 만학도지만 공부도 열심히 했다. 성적장학금, 과수석 등 쉽지 않은 일을 해나갔다. 20대 동기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래방 책의 번호까지 적어서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의 최종학력은 박사다.

공부에 사업에 ‘미쳐서’ 다니느라 아이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컸다. 하지만 옳은 일에 대한 엄마의 신념을 아이들도 적극 응원해줬다.

‘우리콩 독립운동가’로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 방송국 출연요청도 이어졌다. KBS의 프로그램 ‘아침마당’에도 나가봤고, 올해는 ‘세상을 바꾸는 15분’ 일명 ‘세바시’에도 출연했다. 사실 5년 전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나서 ‘세바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송국 대표를 찾아 서울에 왔었다. 국산콩을 알리는 데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비영리로 운영하는 프로그램 성격에 비춰 사업을 하는 함정희씨 출연은 부담스럽다면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생각해 보자고 미뤄진 출연약속이었다.

'국산 콩박사' 함정희씨가 연구개발한 '쥐눈이콩 마늘청국장환'은 건강식품으로 특허를 받았다.
'국산 콩박사' 함정희씨가 연구개발한 '쥐눈이콩 마늘청국장환'은 건강식품으로 특허를 받았다.

“우리콩 살리는 일,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국산콩 사느라 돈은 항상 쪼들릴 수밖에 없었고, 정 돈이 없으면 공장 한 귀퉁이를 팔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올해 코로나19로 학교급식이 막히니 위기는 더 바짝 따라붙었다. 급식 매출이 90%니 배겨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속내도 풀어놨다.

“암(癌) 자를 보면 병든 음식을 산처럼 먹는다고 풀어볼 수 있다. 사람을 살리는 음식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쥐눈이콩(약콩)을 선택했다. 문헌을 보면 약콩은 모든 독을 없앤다고 돼 있다. 농약 안주고 로열티도 안주는 우리 토종콩으로 청국장을 만들고 거기다가 항암 1위 식재료인 마늘을 첨가했다. 그렇게 탄생한 제품이 2007년에 특허를 받았을 때 한없이 울었다.”

이 제품을 본 원광대 교수가 깜짝 놀라면서 박사과정을 밟으라고 추천해줬고, 널리 알려야 한다고 응원해 줬다.

우리콩을 살리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함정희씨의 남은 소원 하나는 자신이 개발한 제품으로 ‘노벨생리학상’을 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함정희씨는 콩꽃의 꽃말을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고 소개했다. 콩 자급률이 27%에 불과한 우리 실정에 함정희씨의 콩 독립운동도, 그의 마지막 소원인 노벨상도 행복한 결말로 반드시 찾아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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