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형’ 성평등 강사단, 그들이 뛴다

[여성+농민 개척보고서]

1기 강사 김지숙·윤정원·한영미씨

  • 입력 2021.06.18 18:00
  • 수정 2021.10.22 17:19
  • 기자명 원재정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올해로 여성농업인육성5개년계획이 세워진 지 21년차를 맞았다. 사회는 성적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발전하고 있지만 보수성이 강한 농촌사회는 더디게 변화하고 있다. 여성이면서 농민인 ‘여성농민’들은 어떻게 기울어진 사회의 수평점을 맞추고 있는지 그 현장을 기록한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수년 전만 해도 농기계 광고에 반라의 여성들이 등장했다. 그 광고에 눈살을 찌푸려본 이들은 안다. 농기계 혹은 농자재를 구매하는 중심 소비자들이 남성이구나, 광고주는 구매자들의 눈에 띄기 위해 농작업복으로는 어림도 없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혔구나. 농촌의 가부장적인 성향을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다.

1기 농촌형 성평등 강사, 21명 탄생

도시보다 평균연령이 높은 농촌은 그만큼 변화에 더디다. 도시에서 ‘성평등’ 문제는 상식이 됐지만, 농촌에서는 ‘남자일’과 ‘여자일’ 구분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남녀와 노소, 모두 동등하게 살기 위한 농촌만들기를 위해선 농촌의 특성을 아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오래 전부터 절감한 이가 오미란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여성정책팀장이다. 2019년 농식품부에 농촌여성정책팀이 신설되고 과장직 공모로 뽑혀 업무를 시작한 오 팀장은 농촌에 뿌리를 둔 그간의 경험을 정책에 고루 녹여 실행에 돌입했다. 그중 하나가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이다.

농촌지역 내 성평등 문화를 전파하는 활동가를 양성하고자 도입한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은 지난해 1기가 탄생했다.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까지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40명이 신청해 80시간의 교육을 받고 1차 필기시험, 2차 강의시연평가 등을 통해 최종 21명이 1기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으로 위촉됐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복병이었다. 대면교육 기회가 대폭 줄다보니 강의할 자리도 당연히 가뭄에 콩 나듯 귀했다. 농식품부 농촌여성정책팀에서도 아쉬운 부분인데, 최대한 농식품부 사업 영역 안에서 강의활동을 하도록 고민하고 있다.

올해도 지난 5월 2기 강사단을 모집했고, 40명이 교육을 받고 있다. 올해 지원자 중엔 남성도 1명 포함됐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해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 사업을 시작하면서 21명의 1기 강사가 최종 강사자격을 얻었다. 사진은 1기 농촌형 성평등 강사 김지숙(충남 부여)·윤정원(경기 수원)·한영미(강원 횡성)씨.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해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 사업을 시작하면서 21명의 1기 강사가 최종 강사자격을 얻었다.
사진은 1기 농촌형 성평등 강사 김지숙(충남 부여)·윤정원(경기 수원)·한영미(강원 횡성)씨.

 

남자가 왜 빨래를 널어?

충남 부여군 여성농민 김지숙씨도 지난해 1기 강사로 위촉장을 받았다. 지난 10일 전북 익산성당포구농악보존회 60~70세 혼성회원들 앞에서 첫 강의도 했다. “긴장도 하고 걱정도 하고, 강의안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성평등이란 말에 팔짱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경계심을 풀 수 있는 강의소재에 중점을 뒀다.” 일상을 보여주고 익숙한 TV 프로그램을 소재로 삼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삼둥이’ 아빠로 유명한 남성 탤런트가 혼자서 세아이 육아를 도맡는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불편하시냐?”고 물었다. 마을회관 완공식에 찍은 남성들만 있는 사진과 여성들은 상 없이 주방에서 밥 먹는 모습을 교재로 사용했다. 본인 경험담도 훌륭한 소재가 됐다. 서울 토박이로 자라 농활로 인연을 맺은 부여에 농사짓고 살면서 ‘농가경영체’에 공동경영주도 등록했다. 하지만 농협 대출을 받으러 갔다가 ‘경영주는 남편이라 안된다’는 거절. 농민임을 증명하는 서류가 부적합하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말에 강의를 듣던 어르신들이 이구동성 ‘그럴 리가 없다’고 교육장이 술렁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지숙씨는 농협조합원이다. 16년 농사를 지었던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 주변인들의 농민인증을 통해 농협 대출 문턱을 겨우 통과했다.

“우리가 흔히 성평등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는 문제로 생각하는데, 농업정책 역시 남성 중심으로 짜여있다. 인식, 제도, 정책 등을 하나씩 바꾸지 않으면 젊은사람들이 농촌에 들어와 정착해 살기 어렵다는 공감대도 어르신들과 나눴다.”

1시간이라는 짧은 교육프로그램 이후 한 남성어르신이 “오늘은 내가 가서 설거지를 해야겠다”고 공개약속을 했고, 회원 중 한 분은 “꼭 확인해 보겠다”고 화기애애 강의가 끝났다.

김지숙씨는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직은 보수성이 짙은 곳이 농촌이다. 결혼 초에 남편이 빨래를 널고 있는데 동네분이 지나가면서 ‘남자가 왜 빨래를 너냐’고 한마디 하고, 남편이 아기를 안고 있는데도 ‘애기 이뻐하는 건 집안에서만 표현해야지’라며 못마땅 해 하시더라. 그러면 자연스레 어른들 눈높이로 맞춰주는 경향이 생긴다. 가정폭력 문제도 ‘너만 참으면 다 된다’거나 ‘네가 잘못해서 맞았겠지’라는 말들도 금지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숙씨의 첫 강의는 지난 10일 전북 익산에서였다. 자료화면을 볼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가락의 구음이 적힌 괘도의 뒷면을 활용했다.   김지숙 제공
김지숙씨의 첫 강의는 지난 10일 전북 익산에서였다. 자료화면을 볼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가락의 구음이 적힌 괘도의 뒷면을 활용했다. 김지숙 제공

 

미투, 농촌에서 없는 이유

농촌에서 나고 자랐고 농촌에 정착해 순천여성농민회 초대 사무국장도 했었던 윤정원씨도 농촌형 성평등 강사 1기생이다. 지금은 경기도 수원에 살지만 농업·농촌·농민문제에 앞장서온 평생 활동가다.

“농촌여성들은 일을 죽어라 하는데, 일만한다. 들에서, 집에서, 마을에서 온통 일 천지다. 그렇게 살다보니 ‘자아’가 없다. ‘미투(성폭력 고발운동)’가 최근 많아졌지만 주로 도시가 배경이다. 농촌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왜그럴까. 차별이 없고 폭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박근혜탄핵과 촛불 이후 세상이 변하는데 농촌만은 차별조차 깨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그에게 농식품부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 양성 소식은 반가운 물꼬였다.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교육을 주로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우리는 농촌형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일반적 성평등 교육 외에 농촌마을과 지역의 분위기 속에 조성되는 불평등, 농업정책에 대한 소외 등 짚어야 할 분야가 많다. 하다못해 농촌에서는 여성들이 외부활동을 하는 자체도 싫어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얼마나 남성중심 구조인지를 설명하자면 참 많은데, 이장선거를 하는데 한 가구에 한 명만 나오라고 하면 백이면 백 남자가 대표가 된다. 과거에 수해가 나서 정책자금이 나왔다. 축협조합원이기도 하니 내 이름으로 한번 받아보겠다고 갔는데 통장거래내역부터 대출경력 등 이런저런 조건 모두 반려대상이다. 대학을 나오고 조합원이어도 무용지물이었다. 실제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거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언니네텃밭에서도 오래 활동을 해 왔던 윤정원씨는 농사를 30~40년 지었는데 자기이름으로 된 통장하나 없다는 ‘언니’들의 말에 속상했었다고도 밝혔다.

지난 10일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한 동호회 회원 20여명 대상 ‘농촌형’ 성평등 강의를 한 윤씨는 “최근 논란이 된 ‘이중사의 성폭행 사건’ 얘기를 하다보니 과거엔 피해자가 이사를 가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면 이제는 가해자가 처벌받는 사회분위기의 변화를 체감한다고 얘기들을 하셨다. 세상이 바뀌는데 농촌도 차별의 구조를 바꿔야 하고, 우리 스스로 생각을 바꾸는 게 시작이라는 점도 이해했다”고 전했다.

윤정원씨는 “농촌의 성평등 문제 해결의 첫 과제는 여성들의 경제력을 보장하는 구조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지역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 공무원·농협관계자·이장·영농회장·농관련단체장 대상 성평등 교육이 필수교육이 되는 것도 시급하다고 밝혔다.

 

코로나19로 대면 교육일정이 대폭 축소된 가운데 윤정원씨는 경기도 여주의 농촌마을 동호회 회원 20여명을 대상으로 첫 강의를 했다.    윤정원 제공
코로나19로 대면 교육일정이 대폭 축소된 가운데 윤정원씨는 경기도 여주의 농촌마을 동호회 회원 20여명을 대상으로 첫 강의를 했다. 윤정원 제공

 

섣불리 꺼낸 성평등 교육, 판판이 깨지기 십상

강원도 횡성군 한영미씨는 “농림축산식품부 사업 중 성평등마을규약 만들기도 진행하고 있다. 2개 마을 선정도 쉽지 않은 얘기다. 그게 꼭 필요한 거냐부터 썩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다. 우호적인 마을 2개를 찾고 결과물도 만들어내는 것도 지난한 과정이다. 하물며 성평등 교육이라고 섣불리 나서다가는 판판이 깨지기 쉽다. 역공을 당하기도 한다”고 실정을 전했다.

한영미씨도 농사지으면서 마을활동하면서 횡성군여성농업인센터 대표까지 맡고 있다. 그 가운데 지난해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을 지원한 열성 강사다.

“농촌형 성평등 강사는 내가 사는 농촌에서 불편한 것을 해소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을의 문화를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이 목표다. 성평등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부녀회가 마을행사 때 살림을 도맡는데, 의욕적인 부녀회장이 행사의 주인공이 되자며 밥을 뷔페로 주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후임 부녀회에서는 ‘남자들 먹을 밥을 어떻게 사서 먹이냐’ 회의적인 분위기 속에 다시 주방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의욕적으로 변화를 주도했던 그룹들은 맥이 빠지고 거리를 두게 될 수밖에 없다.

한영미씨는 농촌형 성평등 강사로 3번이나 강단에 섰다. 지난해 11월 강원도 정선 화암면사무소 주민자치위원 대상, 지난해 12월 전농 강원도연맹 회원 대상, 그리고 지난달 강원미래농업교육원에서 여성농업인리더 대상 교육이다.

대부분의 반응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면서도 다른 강사들과의 네트워크가 좀 더 밀착운영됐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농업 전반의 기본교육으로 확산돼야

오미란 농식품부 농촌여성정책팀장은 “농촌형 성평등 교육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많이 해왔다. 실제 요청도 많다. 앞으로 더 중요한 것은 농업관련 기관들의 각종 교육에 성평등 교육이 확산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강사단 육성이 1단계라면 교육컨텐츠 개발, 교육기관의 수평적 확대 등도 필요하다. 이외에도 해야 할 일들은 차고 넘친다.

오 팀장은 “농촌형 성평등 강사 대부분이 여성농업인이다. 당사자가 강의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강의를 하면 할수록 스스로 성장·발전하는 것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고 의미를 전했다.

지속적인 강사단 보수교육으로 더욱 탄탄해진 N기, 미래의 농촌형 성평등 강사단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