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엄마’ 강다복의 종횡무진 세상바꾸기

[여성+농민 개척보고서]

강다복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 입력 2021.10.24 18:00
  • 수정 2021.10.25 09:20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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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친화력 ‘전국구’인 강다복 회장이 수확을 앞둔 벼 작황을 설명하고 있다.
친화력 ‘전국구’인 강다복 회장이 수확을 앞둔 벼 작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다복 김제시여성농민회장(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을 만나기로 한 김제의 한 식당 주차장 앞에 서성이고 있으니 차 한 대가 들어온다. 문이 열리자 웃음소리가 먼저 땅에 내린다. 분명 하늘이 낮은 흐린 날인데 세 사람의 웃음소리, 인사소리가 화창하다. 김제시여성농민회 회원들이 인근의 토종씨앗 채종포에서 작업을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강다복 회장보다 먼저 도착했다. 단독 인터뷰가 아니라는 데서 살짝 당황했지만, 곧이어 강다복 회장이 남편과 나란히 입장한다. 오늘 강다복 회장 인터뷰는 여러분들의 의견을 종합하기로 했다. 

농민운동가 배우자를 만나다

강다복 회장은 전북 정읍 농촌마을에서 태어났고 부모님 모두 농사를 지었다. 강 회장은 6남매 중 ‘두막둥이’라고 소개를 했다. 끝에서 두 번째라는 뜻이다. 부모님 모두 ‘공부 잘 해서 농사짓지 말고 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소원대로 전주 시내에 취업을 했고, 서울서도 3년간 직장을 다녔다. 외지생활이 싫어질 즈음 다시 고향을 찾았다. 집에서 쉬는 내내 작은 시골마을은 ‘왜 그 좋은 서울 직장도 그만두고 내려왔는지’ 하도 물어보는 통에, 대답하기도 진력이 난 엄마는 ‘놀아도 서울 가서 놀라’고 당부를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다시 찾은 일자리가 완주에 있던 기독교농촌개발원이었다. 독일 선교사들이 이른바 농촌계몽운동을 할 목적으로 1970년대 초부터 운영해 온 농민운동 활동가 양성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물론 동네 사람들 입방아를 피해 잡은 ‘직장’이었고, 남편 박용환씨를 만나게 됐다.

“그곳에서 강의하고 교육하는 거 돕는 실무자로 근무를 했지. 국가보안법 얘기도 처음 들었고. 그 시절에는 방송에서도 ‘농민들 조금만 참으시라, 나라가 부강해지면 농민들도 좋은 시대가 온다’ 이런 멘트가 나왔거든. 근데 박정희정부 때 왜 이농을 많이 하는지 농촌이 왜 힘들어지는지 옆에서 듣다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거야. 저임금 인력이 도시에서 필요하니 농촌에서 사람 끌어가고 저곡가 정책도 쓰고. 우리 부모님이 ‘농사짓지 말고 외지로 나가라’고 한 근본 원인이 농민들이 게으르고 잘못한 탓이 아니라 나라에서 정책을 잘못해서라는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박용환씨 부탁도 참 많이 들어줬네. 교육자료 같은 거 복사 좀 해달라, 그러면 5부, 10부도 좋고 … 수백 부 복사해 줬어.”

오토바이 타고 마을마다 전단지 돌리는 ‘새댁’

1987년 결혼을 했다. 남편도 ‘두막둥이’다. 공부를 잘해 서울대 농대를 갈 때만 해도 남편은 농사짓는 어려운 집안의 기대주였다.

“남편이야 농민운동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특별히 농민운동을 하겠다, 이런 각오를 한 건 아니었지. 결혼하기 1년 전에 남편은 지금 사는 김제에 농촌개발원 소유 땅과 소를 빌려 터를 잡은 거고. 우리 집에서 반대는 말도 못했지. ‘썩을 년, 너는 농사짓지 말고 편히 살라고 공부시켜 논게 농사짓는다’고 엄마는 울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어서 내가 좋다니까 결국 보내준 거지.”

신혼의 부부는 오토바이를 타고 전단지를 뿌렸다. “남편을 만나면서 농민회가 뭔지도 모르고 따라다녔어. 오토바이 뒷자리 타고 마을에 들어가면 각자 전단지 들고 반대방향으로 마을을 돌아. 내가 낯가림이 없는 편이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읽어보시라고 권하면서 다닌 거지. 그렇데 한참 다니다보면 이장이 방송을 해. ‘동네 불온유인물이 돌고 있으니 습득하신 분은 신고하시라’ 이런 내용으로. 그럼 유인물 뺏길까 싶어 부랴부랴 오토바이 타고 도망가고.”

농민운동을 한다는 의식을 따로 한 것도 아니지만, 남편이 하는 일이 옳다는 생각에 같이 다니다보니 어느새 농민운동 활동가가 돼 있었다. “어릴 때부터 농촌에서는 자식들은 외지로 보내려고 하잖아. 더이상 어렵고 못사는 농촌을 내버려 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던 것 같아.”

농민회와 농사, 둘 다 어깨에 짊어지고

하지만 농사일은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말도 마. 우리 남편 말이 고생 안 시킨다더니, 죽을만큼 고생했구만. 옛날에 나락을 3시간 베면 그거 짊어지고 나르는 데 4시간이 걸리는 거라. 힘드니 남편은 몇 개 나르다 담배 한 대 피고 오고. 보다보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나도 하겠다고 한 거지. 나중엔 나도 어깨에 메달라고 해서 남편이 10개 나를 때 내가 5개 정도 나르니 훨씬 수월하게 됐어. 그 이후엔 으레 같이 메려니 한다니까.”

‘그래서 잘 살았지 뭐’, ‘고생을 언니 혼자만 한 것처럼 말하면 안 되지, 고생해도 행복했지?’, 강다복 회장 부부를 오래 지켜봐 온 김제여농 분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그러게 내가 내 발등을 몇 번 찍었네. 남편은 농민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다 보니 대학생들 농활 오면 거기 챙긴다고 나가선 안 들어오는 거야. 애 셋 낳고 살아보니 생활은 팍팍했지. 봄에 영농자금 대출은 많이 나와야 500만원, 그렇잖으면 300만원 나오는 게 고작인데 애들하고 먹고 살랴 영농비 쓰랴, 6~7월이면 다 떨어졌어. 나락은 가을에야 나오는데 그때까지 손가락을 빨 수도 없고, 남편이 반대하는 하우스농사를 1995년, 우리 딸 두 살 때부터 우겨서 시작한 거지. 가온하지 않는 선에서 오이, 호박 이런 거 봄에 심으면 가을까지는 따서 팔 수 있으니까. 그런데 하우스농사 시작할 무렵이 농민들이 한창 투쟁할 시기였어. 집회 나가고 농활오면 나가고, 오이 딸 일은 까마득한데 남편은 농민회 사무실에 한번 가면 볼 수가 없고. 혼자서 하우스 농사에 얼마나 진이 빠지든지, 남편 옷가지 가방에 우겨넣고 농민회 사무실에 집어 던지기도 했다니까.”

“우리 딸은 나를 오이엄마로 불렀다”

강다복 회장은 세 아이의 엄마다. 지금은 다 큰 삼남매라 각자 자기 인생을 살고 있지만 아이가 어릴 때 농사와 농민회 활동 둘 다 건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농활을 오면 일이 더 많아져. 이것저것 챙겨줘야 하니까. 마을 어르신들 저녁에 교육도 하고 노래도 배우는 문화활동을 할 때 나오시라고 애 업고 학생들하고 같이 다녔어.” 농민회도 열심이었지만 농사일도 소홀할 수 없었다. 밭농사를 할 때는 사람 손이 필요하니 인건비는 그때그때 필요했고, 밥때마다 실어나르는 것도 고됐다. 막내인 딸이 3살 적에는 하우스 농사가 시작되는 봄부터 가을까지 생이별을 했다. 큰아주버님댁에 맡겼다가 겨울에 잠깐 보고, 아이는 큰집에 갈 때마다 눈물바람이었다.

“같이 차 타고 가는 척 하다가 금방 온다고 거짓말 하고 내리면, 차에서 엄마 찾으며 울다 잠들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한 거지. 우리딸은 큰엄마한테 ‘엄마’라고 하고 나는 오이밭에서 일한다고 ‘오이엄마’라고 불렀어. 3년간 그렇게 지냈나봐.” 삼남매 모두 ‘방목’하다시피 저희들끼리 어울렸고, 엄마아빠 일하는 거 기다리다 담벼락에서 잠든 애들은 옆집 할머니가 데려다 자기 집에 눕히거나 씻겨서 저녁 먹였다는 연락을 받은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땐 살아야 하니까, 힘들다 생각도 없이 살았어.”

농민운동 선배인 남편 박용환씨와 집앞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농민운동 선배인 남편 박용환씨와 집앞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한여름 고추밭엔 여자들이, 모정엔 남자들이

김제는 당시 여성농민회가 따로 없었다. 김제시농민회 내에 여성위원회가 있어서 성별 구분 없이 활동을 같이 했다. 전국적으로 여성농민회가 출범하고 독자적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도 10년간 여성위원회로 있었지만, 전국 어느 지역 못잖은 여성농민 저력을 보여줬다.

그동안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은 점차 세상을 보는 눈을 날카롭게 했다.

“결혼하고 마을에 와보니 참 이상하다 싶은 게, 도대체 한여름 고추밭에서 고추 따는 일을 여자들만 하는 거야. 친정동네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밭일 다 같이 했는데, 더구나 아주머니들이 뜨거운 훈김에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시피 고추를 따는 동안 아저씨들은 뭐했는지 알아? 모정(마을 정자)에서 윷놀이 하고 막걸리 마시면서 놀아. 해가 지는 오후에 고추 거두러 오는 게 다여.”

더 기막힌 건 고추를 판 돈도 모두 아저씨 통장으로 입금되는 일이었다.

“김제여성농민회에서 꾸러미 사업을 하는데, 꾸러미작업을 하는 어머니들도 돈을 타서 쓰는 게 익숙하던 분이라 자기 통장이 없는 분도 있고 돈을 찾는 걸 안해봐서 어려워하는 분들도 아직 있어. 그러면 내가, 그러지 말고 직접 해보자고 그래. 밤에도 돈 찾을 수 있으니까 기계에서 천천히 해보면 된다고 알려주고 그러지.”

마을이장 투표권 논란에 ‘인권위’ 문의까지

마을 ‘이장’을 한 것도 가부장 정서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수년을 한 분이 이장을 맡아왔는데,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방송으로 ‘이젠 이장 안 한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밭에서 일하다가 마을 분한테 “아저씨들은 저 얘기를 들으면서도 왜 맨날 저분만 이장을 시키냐고, 시집와서 저 소리 숱하게 들었다”고 했더니 다음 총회 때 한번 나가보라고 권하더라는 것이다.

2004년, 안 한다던 분도 총회 때 또 이장으로 나왔고,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결국 첫 선거에선 4표차로 졌다. 2년 뒤 이장선거에서는 투표권에 문제를 제기했다.

“마을총회인데 이장선거 투표권은 한 집에 한 표야. 그럼 대부분 아저씨들이 투표하고, 마을에 남자가 다 죽었냐, 웬 여자 이장이냐는 말들을 하니 내가 또 승산이 없는 거지. 그래서 아주머니들 총회에 다 나오시라고 하고, 총회 당일날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 투표하게 하자고 했어. 처음엔 반발하던 사람들이 우리 남편이 논리정연하게 말하니까 마지못해 수긍하더라고.”

4표 차로 이장이 됐다. 하지만 선거에서 진 측에서 반발했다. 김제시 조례까지 확인해야 한다고도 하고 읍사무소도 시끌시끌해졌다. 그래서 나중엔 국가인권위원회에 물어봤다. “하도 말이 많으니 인권위에 요청했어. 투표권이 있으면 누구나 다 행사하는 게 맞다는 공식적 답을 듣고서야 잠잠해졌다니까.”

공과금 내는 개인적 심부름부터 정책사업 챙겨야 할 일 등을 ‘똑 부러지게’ 해냈다. 2006년에 재선 이장도 하고, 김제시에서 시범사업으로 도입한 ‘그룹홈’ 사업도 마을에 유치했다. 그룹홈은 홀로사는 어르신들 식사와 잠자리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사업이었는데, 마을회관이 그룹홈 장소가 됐다. 그것도 초기에 남자주민들에게 얘길 들어야 했다. 마을회관의 주공간을 내주게 생겨서였다.

“큰방은 남자들이 차지하고, 회의실 겸 부엌은 여자들이 주로 썼는데, 잠자는 곳을 큰방으로 쓰다보니 자연스레 장소가 바뀌었지. 그룹홈도 처음엔 혼자 살던 분들이 장시간 같이 있으니 불협화음이 생겼지만, 나중엔 늦게 오는 분 밥도 따로 챙겨놓고 어우러지는 게 보여서 좋았어. 근데 코로나19로 그룹홈도 문을 닫고… 마을에 외지사람이 올 일도 별로 없는데 행정은 융통성이 참 없는 거지. 어르신들이 갈 때가 없으니 마을회관 앞 긴 의자에 쪼로록 앉아 계시다가 또 집으로 가고 그래. 안타깝지.”

마을활력소로 살아온 30여년

자연스레 단체인터뷰를 해야 할 만큼 친화력이 ‘전국구’인 강다복 회장은 김제시여성농민회장, 전국여성농민회 전북도연합회장 등을 거쳐 여성농민들의 전국 결집체인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까지 하게 됐다. 외부활동한 세월만 20여년.

“남편 고생도 참 많았어. 전여농 회장 제안을 받았을 때 농사규모도 이전보다 2배 정도 많았을 때 였거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래.”

농민운동 선배로서 부인 강다복씨의 종횡무진 활약을 묵묵히 지켜봐 온 남편 박용환씨에게도 한마디 청했다.

“여러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죠. 끈기, 추진력, 친화력 나무랄 데가 없고 그런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장점이 지금까지의 ‘강다복’을 만든 거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을 하면서 농민운동사에 남을 굵직굵직한 사건을 치러낸 강다복 회장은 현재 김제시여성농민회 회장을 맡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을까.

“농촌에 사는 사람들 챙기는 일 계속 해야지. 아직도 밥솥 고장나면 나한테 전화하는 어머니들이 있으니까 부지런히 다녀야지. 마을에 노인회장을 어머니 한 분 시키고 나는 거기 총무하는 것도 좋겠어. 마을에 남자노인보다 여자노인이 더 많은데 노인회장을 남자들만 하면서, 일은 대충대충 하는 것 같아.”

속도는 늦지만 한번 바뀌면 변화는 삽시간에 시작된다는 걸 아는 강다복 회장은 오늘도 분주히 마을 안팎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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