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농민은 언제까지 ‘을’이어야 하는가!

  • 입력 2021.03.14 18:00
  • 기자명 백혜숙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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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혜숙
백혜숙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전문위원

 

 

2018년 서울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 유통실태 조사’에 따르면 농민이 생산한 일반 농산물 중 생산자단체(전체 유통물량의 49.4% 담당)를 통해 도매시장으로 출하되는 비율은 24.4%고, 대형유통업체로 직접 출하하는 비율은 18.9%이다. 이때 생산자단체는 동등한 위치에서 가격협상과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까?

올해 초, 유통 과정에서의 농민의 의사결정권 및 갑을관계와 관련된 법 개정안이 각각 발의됐다. 하지만 ‘을’의 위치인 농민의 출하선택권, 가격협상 및 의사결정권을 보장하는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개정은 농식품부 반대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못하고 있는 반면, 갑을관계 문제 해결을 위한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은 의결됐다.

사실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은 유럽연합(EU)이 지난 2019년 4월 30일 제정한 ‘농식품 유통에서의 불공정거래행위 규율에 관한 2019년 EU 지침(농식품 유통거래 공정화 지침)’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EU 지침의 제정 배경을 살펴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편이었다. 농식품 유통시장은 단기의 유통기한과 수급 불안정성으로 인해 대규모 구매업자에 대한 중소농가의 거래의존도가 높았고, 각종 불공정거래관행도 만연해 이를 근절하기 위한 EU 차원의 통일된 규범을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국회 입법조사처에서는 농식품 유통과 관련해 ‘일본의 농산물 도매시장 관련 입법동향 및 시사점’, ‘EU 최초의 B2B 불공정거래 규율 입법례’라는, 일본과 EU 두 가지 입법 사례와 분석을 내놓았다. 일본의 경우 「도매시장법」 개정은 산지와 소비지 전체를 아우르는 일본 농정의 전면적인 개혁 정책과 노선을 함께 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시장의 활력과 창의성 제고를 목표로 삼은 특징이 있다고 했다. 이와 함께 일본의 농정당국이 자국 내 다른 농업정책과의 관계를 고려해 도매시장 정책을 설계하는 태도나 도매시장의 대내외 여건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모습은 급변하는 우리 농정당국과 도매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밝혔다.

이 지점에서 묻고 싶다. 우리 농정당국은 급변하는 농산물 유통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혁신의 방향과 적극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는가? 가락시장에는 지난 2005년 7월 1일 이후부터 ‘시장도매인제’ 도입이 가능함에도,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은 고사하고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도입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시장도매인제에 대해 알리는 것을 등한시하고 있다. 고언을 하자면, 컨설팅에 의존하지 말고 농업·농촌 현장 및 농민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며 함께 농정을 이끌어가야 한다. 시기상조니, 산지 조직화가 안 돼 못한다느니 하는 핑계보다는 조직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개발하고 국민에 알리려는 적극 행정을 펼쳐야 한다.

현장에서는 경매제의 가격 불안정성, 높은 유통비용 등의 문제를 보완하고 출하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해 시장도매인제 도입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시장도매인제 도입을 위한 농민 릴레이 인터뷰’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가락시장에 ‘지자체 참여형 공익시장도매인제’ 도입을 위한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가락시장 모 도매시장법인(경매회사)의 팀장이 생산지에 머물면서 농민들에게 왜곡된 내용을 유포하며 윤재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농안법」 개정안 반대 서명을 받고 있다고 한다. 농민들은 불안에 떨면서 서명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농민에게 경매회사는 또 다른 ‘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매제 독점에 의한 농산물 가격 급등락은 생산자의 계획영농을 저해한다. 소비자 가계에 미치는 영향도 폭력적이다. 우리 농산물에 대한 애정결핍까지 유발한다.

생산비에 대한 소비자의 알 권리는 물론, 생산자의 가격협상권(출하선택권)과 안정적인 농사가 보장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가락시장에 시장도매인제 도입을 위한 TF를 구성해 생산지 수급정책과 소비지 유통(소비)정책이 연결되는 담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농림축산식품부 고시(제2017-9호)를 반영해 시장도매인 정가수의거래에 의한 계약재배를 늘리는 방안도 구체화해야 한다. 고시에 의하면, 농안법 제6조, 제8조 및 같은 법 시행규칙 제9조에 따라 계약재배 채소류에 대해 계약재배를 활성화하고 참여농가 경영안정을 유도하기 위해 하한가격을 예시하도록 명기하고 있다. ‘무·배추·대파·당근 등 비저장성 품목의 하한가격은 해당연도 기준 농촌진흥청 소득자료집 5개년 경영비의 평균치를 적용’하고, ‘고추·마늘·양파 등 저장성 품목의 하한가격은 해당연도 기준 통계청 생산비 통계 5개년 직접생산비의 평균치를 적용’한다.

가락시장에 공익시장도매인제가 도입되면 이러한 ‘하한가격 예시’가 보편화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갑을관계 청산과 함께 도매시장 유통 민주화 바람이 일어날 것이며, 귀농·귀촌 의향을 가진 도시민이 안정적으로 정착해 국가균형발전도 앞당겨질 수 있다. 더불어 도시 집값도 안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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