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전환시대, 투쟁 아닌 대안 만드는 농민운동 해야

[전농 창립 30주년 기획 좌담회]

  • 입력 2020.12.13 18:00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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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지난 19904월 창립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전농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불릴 만큼 농업·농촌·농민을 위해 30년을 싸워왔다. 그동안 청년 농민운동가들은 경로우대할인을 받아야 할 만큼 지긋한 연배가 됐다. 전농 창립부터 현재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문경식·강병기·김기형·박형대 4명의 전농 활동가들과 지난 9일 서울 용산 본지 회의실에서 농민운동 평가와 전망을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정리 원재정 기자·사진 한승호 기자

농민운동 30년 역사를 평가하고 앞으로를 전망해 보는 좌담회가 지난 9일 서울 용산 본지 회의실에서 열렸다.
농민운동 30년 역사를 평가하고 앞으로를 전망해 보는 좌담회가 지난 9일 서울 용산 본지 회의실에서 열렸다.

 

심증식(본지 편집국장) : 오늘 참석한 분들 모두 전농 창립부터 최근까지 농민운동 일선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전농 창립 당시의 회고담부터 농민운동 의미 등에 대해 얘기해 달라.

문경식 전농 고문
문경식 전농 고문

전농, 30년 역사 거치며 우리 농업 버팀목으로 자리해

문경식(전농 고문) : 이전부터 농민들은 불의한 세상에 목소리를 내 왔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수세투쟁이 본격적인 농민투쟁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기독교농민회, 가톨릭농민회, 전농민운동협회 등이 전국 조직으로 활동했는데 하나의 농민조직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졌다. 19904, 3개 전국 농민조직이 전국농민회총연맹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하게 됐고, 이후 수입개방 반대 투쟁을 주도했다. 2002년 여의도에서 30만 농민대투쟁을 조직할 때는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각 지역의 농민단체가 함께 준비했다. 대여할 관광버스가 부족할 정도로 전국이 들썩였었다.

강병기(전농 부의장) : 군부독재 시절 어쩔 수 없이 종교적 외피를 입었던 농민운동은 1985년 고성 소머리투쟁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종교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자각이 확대됐다. 이후 19876월 항쟁을 거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논의가 이어지고, 1990년 전농이 창립했다. 전농이 30년 동안 멈춤 없이 투쟁을 할 수 있었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자주·민주·통일이라는 노선을 지키기 위한 전통이 우리 조직 안에 있었다. 때론 지도부의 신임을 묻는 투표를 할 정도로 변혁적 원칙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상당했다. 또 중앙 지도부 중심으로 도연맹, ·군농민회 체계 속에 중앙의 결정에 복무하는 전통도 흐트러지지 않은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김기형(전 전농 사무총장) : 전농 창립 무렵 대학에서 농민대회가 많이 개최됐다. 농민회원은 아니었지만 함께 싸우는 학생입장이었다. 이후 졸업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레 농민회에 나갔다. 그땐 나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도 했었다. 같이 천렵도 하고, 농민대회도 나가는 일상조직이었다. 올해로 28년 농민회에 몸담았는데, 여전히 지역에서는 농민회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30년을 농민들이 싸웠는데 왜 농업^농촌^농민이 이 모양이냐는 말도 하는데, 반대로 30년을 헌신하며 싸웠던 농민회가 있어서 우리 농업이 버텼다는 말도 듣는다. 전농 창립 초기에 받았던 겨울철 장기 농민활동가 교육은 특히 인상 깊다.

박형대(전 전농 정책위원장) : 노동자(전노협), 대학생(전대협), 농민(전농) 세 주체가 19876월 항쟁의 중심에 섰는데, 이름과 강령을 30년 째 유지한 곳은 전농뿐이다. 인류 역사상 큰 사건 중 하나가 예수의 부활인데, 농민 입장에서는 동학농민군 전봉준 정신이 다시 부활한 것이 1990년 전농 창립이라고 생각한다. 농촌현장은 관료와 기득권을 가진 토호세력들이 정책과 제도를 좌지우지 했는데 전농 등장 이후 우리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게 됐다. 몇몇 활동가 중심이 아닌 농민 대중 속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는 것도 매우 의미 있다.

농민투쟁, 쌀은 지켰으나 농촌공동체 붕괴엔 소홀

심증식 : 전농은 역사는 투쟁의 역사였다. 쌀투쟁, 수입개방 반대투쟁 등 . 여기 계신 분들이 그 현장에 있던 터라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다.

박형대 : 농민투쟁은 농촌사회까지 포함해 굉장히 범위가 넓다. 오죽하면 지역 투쟁에 농민회가 없으면 연대투쟁이 안 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전농 모든 투쟁의 핵심은 신자유주의반대였다. 전농 창립 이후 2000년대는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즉 자본가들이 최고의 이익을 창출하면서 엄청난 탐욕을 이뤄내는 시기였고, 전농은 가장 정면으로 맞섰던 조직이다.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농민들에게 소위 진보진영에서 조차 그럼 쇄국을 하란 말이냐타박을 할 정도로 자본가들의 입김이 우리 사회를 장악해 갈 때도 민중세력 중 유일하게 전농만 맞받아쳤다. 판을 크게 확대해보면, 강력한 신자유주의와 한국 농민이 맹렬히 싸운 시기였다. 그 과정에 농민들은 죽기도 하고 구속되기도 하고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세계화에 묻혀버릴 것 같았는데 지금, 파열음이 나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자각들이 생기고 전농은 그 대안을 이미 얘기해 왔던 것이다. 다른 모든 작물은 개방됐지만 내용적으로 주식인 쌀만큼은 지켰다는 것도 의미있는 성과다.

강병기 전농 부의장
강병기 전농 부의장

강병기 : 전농의 투쟁은 농산물 가격보장과 수입개방 반대 양대 축으로 나뉜다. 앞서 얘기들은 것처럼 1990년대 신자유주의가 몰아치면서 수입개방 반대투쟁으로 힘을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 수입농산물이 국내 농산물 값에 치명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이라도 농산물 수요에까지는 개입을 못했는데, 농산물 수입으로 막강한 무기를 하나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구조가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농민들은 2~3년 한-칠레 FTA 싸움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나 중국과 바로 FTA를 시작하지 않은 것도 반발을 고려한 전략일 수 있다. 결국 우리 예측대로 일사천리 FTA가 체결됐다. 지금까지 전농 투쟁 역사를 살펴보면, 농민들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김기형 : 가장 중요한 투쟁은 쌀투쟁이었다. 정부수매제가 있었고 수매가에 대한 국회 비준이 있던 시기, 농민들은 가을마다 국회 앞에서 수매가를 높이고 전량수매를 하라고 외쳤다. 쌀농사를 짓건 안 짓건 주식으로 먹는 농산물이라는 점에서 국민적 공감대까지 얻으면서 단일구호가 됐다. 이후 수입개방 반대 투쟁으로 옮겨졌는데, 사회적 조건도 많이 달라졌다. 식생활이 변하면서 쌀 소비량이 과거보다 대폭 줄었고, 이 과정에서 경자유전은 사문화 된 채 농지까지 무너지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완성되는 시대에 농업도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전농의 개방농정 반대 투쟁으로 쌀은 지켰다.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식량과 주식 문제, 농업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았다. 과거 전농의 투쟁력을 볼 때 앞으로도 농업회생 가능성을 확신하는 바다.

문경식 :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지난한 투쟁을 해 오면서 우리 농촌은 구조조정이 돼 버렸다. 축종별로 계열사에 편입됐고 규모화 됐다. 쌀농사는 아직 소농이 짓는데 그마저도 10년 안에 2만평이 소농인 시대로 바뀔 것이다. 투쟁을 지속해 왔으나 아쉬움이 남는 대목은 또 있다. 전농이 농산물 가격문제에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농촌공동체 유지 문제에는 소홀했다. 농업은 자본한테 넘어갈지언정 소멸되지는 않을 거고, 농촌은 붕괴 기로에 서 있다. 과거처럼 대거 상경하는 농민투쟁은 불가할 정도로 농민들은 나이가 들었다. 지금 수입개방,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며 상경투쟁을 가자고 하면 도덕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의무감으로나 서울집회에 나설 뿐이다. 전농의 투쟁은 옳았으나 농촌소멸 문제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때다.

강병기 : 전농 투쟁에 대한 현재상황을 정확히 진단해야 투쟁방향도 바로 세울 수 있다. 과거엔 투쟁의제가 명확했다. 수입개방, FTA 반대하면 됐는데 지금은 대부분 제도화 돼 있어서 투쟁과제가 불분명하다. 반면에 새로운 대안운동으로 전남지역에서 농민수당운동이 시작됐는데, 새로운 농민운동 의제로 굉장히 효과적이면서 중요한 사안이다. 어떻게 농촌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그야말로 농민들이 치열하게 고민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된 사례이기도 하다. 전농이 최근 요구하는 농민기본법 제정도 마찬가지다. 농업문제는 이제 어느 하나를 고친다고 해결될 수 없는 굉장히 종합적인 해법이 필요하게 됐다. 이젠 옛날처럼 돈 없고 배경 없는 사람들이 실직하면 농사나 지으러 내려갈 만큼 농업이 만만하지 않다. 초기투자비용이 굉장하다. 전농 창립 이후 30년 동안 뚜렷하게 달라진 것이 농업에 진입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농사지어서 별 볼일 없다는 문제도 있지만 수억원을 들여 농사지을 사람은 또 누가 있겠나. 농업이 맞닥뜨린 새로운 변화, 이런 것들을 냉정하게 보면서 농민운동의 방향도 설정해야 한다.

통일운동의 한길, ‘종북공세프레임도 굴하지 않아

심증식 : 농민들은 경제투쟁을 해왔지만 정치투쟁이기도 하고 또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투쟁을 해 온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전농의 통일운동도 빼놓을 수 없는 투쟁이다.

문경식 : 농민활동가 중에서 내가 평양을 제일 많이 다녀왔다. 통일운동은 전농이 창립되면서부터 지켜온 노선이다. 신자유주의 개방 투쟁을 하면서 통일운동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치부된 면도 있다. 전농에서 본격적인 통일운동을 시작하게 된 건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다. 남한보다 못자리를 빨리 해야 하는 기후조건 속에 못자리용 비닐이 부족하다는 말에 비닐보내기 운동을 하고, 통일쌀 보내기 운동도 다 연계됐다. 2004년 전농 부의장 시절에 평양에 특히 많이 오갔는데, 남한의 보수적인 농민단체들도 하나 된 마음으로 남북농민 통일대회를 치렀다. 최근 힘들게 통일트랙터를 준비했는데 북에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가슴 아프다. 쉽게 풀릴 전망이 없어 더 아쉽다.

강병기 : 한반도 농업의 정상화는 통일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었다. 남과 북은 농사짓는 환경적 조건이 서로 달라 둘이 하나 되면 상승효과는 크기 때문이다. 2001년 남북농민통일대회를 치르면서 실무준비를 담당한 사람으로서 남북문제는 현재 상황으로 판단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남한의 농민들이 행사 하루 전 묵은 북의 숙소에 편차가 커 불만이 극심했었다. 과연 내일 행사가 제대로 치러질까 싶을 정도로 격앙된 사람도 있었는데, 남북농민이 상봉하는 순간 모든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했다. 통일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그저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얼싸안고 흥에 겨운 시간을 보냈다. 민족이란 게 뭔지 확인한 시간들이었다. 그 감동 속에 행사를 치르면서 진짜 통일이 멀리 있는 게 아니고 기회가 주어지면 순식간에 정서적으로 뭉칠 수 있겠다고 느꼈다. 현재는 완전히 어긋나 있는데, 통일은 공부하고 이론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김기형 전 전농 사무총장
김기형 전 전농 사무총장

김기형 : 사실 신자유주의 운동과 통일운동은 미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농민운동 진영이 자연스레 반미투쟁을 더 잘 받아들였던 것 같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대의원대회를 비롯해 통일사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전농이 중심이 된 비닐보내기 운동부터 최근의 통일트랙터 사업까지, 정권마다 기복은 있었지만 남북 교류협력의 맥은 놓치지 않았다. 전농이 제기하는 통일담론은 감성적 통일논의가 아니라 실질적 농업문제 해결이라는 실태적 통일운동이라는 자부심이 크다. 앞으로도 통일운동은 전농의 핵심 사업일 수밖에 없다.

박형대 : 의미 있게 바라봐야 할 것은 높은 수준의 통일관이다. 통일운동의 최대 적은 종북공세, 빨갱이 공세인데 전농은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이적단체라는 공격에도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농과 같은 통일관이 있어야 통일운동도 발전이 있다. 30년 이어온 전농의 통일운동에 대한 일념을 국민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세력화에 대한 논란, 극복해야지 피할 대상 아니야

심증식 : 전농 30년 역사 중 가장 큰 변화는 정치세력화 결정이라고 생각된다. 제도적 정치를 통해, 진보정당을 통해 농민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조직적 결의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소회와 입장도 정리해 달라.

강병기 : 당시 정치위원장이었었는데, 그때의 고민을 말해보겠다. 노동자들은 단위노조가 사용자와 임금 문제 등을 직접 해결할 수 있는데, 농민들은 조합장, 시장군수, 도지사와 싸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국가 권력을 상대해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농민인구가 줄어들고 나이는 더 먹는데 언제까지 거리투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도 있었다. 농민들 모두 1표씩을 갖고 있으니 정치권이 농민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실마리를 풀자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농민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하지 못하고 다른 사회 연대세력과 힘을 모아야 하는데, 그게 민주노총이었다. 거기서 당을 만들었으니 손을 잡는 것이 선택지로 유일했다. 논쟁의 여지는 있는데, 마지막으로 전민항쟁과 같은 방식으로 정권을 잡는다하더라도 투표로 국민들한테 다시 물어야 하는 합법적 단계를 거쳐야만 하는 시대가 됐다는 사실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가지고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말했다. 당시 토론에서 반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결국 200311월 대의원대회에서 70%에 가까운 지지를 받아서 확정했다. 지금 현장에 가면 전농의 회원이 늘지 않고 힘이 줄어드는 기본 요인 중 하나로 정치세력화를 꼽는 분들이 많다. 만약 농민회가 이런 진보정당을 통한 사회변혁방안을 채택하지 않고 농민의 이해와 요구만 일치한다면 어느 정당을 지지하든 용인했다고 치자. 과연 조직이 융성해 졌을 거라고 보장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이 부분은 전농 차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김기형 : 정치방침과 관련한 논란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전농은 진보정당의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농 조직, 시군 농민회는 지역에서 정치세력으로 보고 있다. 지자체 선거 때마다 농민회를 그냥 두지 않는 게 대표적 사례다.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이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분명한 건, 정치방침이 전농 조직을 약화시킨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게 용인됐다면 혼란은 더 가중됐을 것이고 회원 간 갈등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정치방침으로 강화된 전농의 공식 입장, 이를 기반으로 전농 나름의 세력이 뭉쳐졌다고 생각한다. 지방선거 성과가 있을 때 다 같이 기뻐했다. 진보정당이 전국적 힘을 얻는 계기도 됐다. 보수진영의 위기감까지 주다보니 정당해산이라는 사태까지 온 것 아닌가. 어려움이 있어도 전농의 일관된 정치방침은 유지해야 한다.

박형대 전 전농 정책위원장
박형대 전 전농 정책위원장

박형대 : 정치세력화 논의는 2000년부터 20년이나 흘렀다. 정치방침 결정은 2003년이지만 개별적이든 조직적이든 끊임없이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지금 현재의 평가는 사실 회원마다 고심이 깊을 것 같다. 성과가 쌓였다면 평가가 쉬울 텐데 지금은 시련기라 더 어렵다. 하지만 어떤 정치세력도 순탄한 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당선자가 많아져서 성과가 있으면 그리로 관심이 쏠리다가도 시련의 과정에선 어떻게 할지 탓하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다. 강기갑 의원을 전농 조직후보로 내고 2선의 국회의원을 지낸 일련의 과정들은 농민이 협심한 진정성이 발휘된 정치세력화의 결정체였다. 조직적 후보는 모든 결정을 조직적으로 긴장감 있게 논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농은 조직후보였던 강기갑 의원에 대한 평가를 한번쯤이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경식 : 정치세력화에 반대했던 농민들이 나를 미워하다가 강기갑 의원이 당선되면서 수그러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 정치세력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었다. 문제는 진보정당을 합칠 때였다. 전농이 너무 섣부른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조직적 합의를 하는 절차를 거쳤어야 하는데 아쉬운 부분이다. 그 불씨가 상당히 오래갔다. 통합진보당이 성공했으면 그대로 수그러들었을 문제가 결국 정당 해산까지 이르니 결정적인 불협화음을 만들 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치세력화는 당연한 결정이다. 어렵지만 초지일관 가야할 길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정치를 하지 않고 어떻게 농민세상을 만들 수 있겠나.

전환의 시대, 대안 만드는 농민운동

심증식 : 앞으로 농민운동의 방향에 대한 생각도 모아봤으면 한다. 지금까지 투쟁 중심의 농민운동은 투쟁동력도 없는 상태다.

박형대 : 한국농업이 자본 중심 농업으로 변하면서 규모화 민영화 돼 있고 시장중심주의가 팽배해 있다. 개방론자들과 치열하게 싸웠지만 밀렸다. 하지만 자본사회에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가에 대한 물음이 전 세계에 돌기 시작했고 최근 코로나로 시장 중심의 사회가 미래나 인류 생존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확인하고 있다. 30년간 농민들이 주장했던 것들에 대해 현실에서 따져볼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전환의 시대다. 앞선 30년이 저항의 시대였다면, 이후 30년은 창조의 시대다.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농민운동이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운동은 숫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노선으로 하는 것이다. 사상과 노선으로 결집하고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운동을 한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노선과 사상을 전농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지, 준비는 됐는지, 그걸 지금 만들어야 한다.

김기형 : 참 어려운 주제다. 수많은 농민활동가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농업^농촌의 현실이 한계에 와 있다는 것 공감한다. 결국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는 농민운동의 미래는 없다. 전농 강령에 고전적이지만 이미 방향은 나와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농이 농업소득을 통해 농촌에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더 이상 자본이 농업과 농촌을 침식하지 않게 중단시켜야 한다. 가족농 중심의 농정대안을 요구하고, 대규모 전업농으로 살아가는 것을 과감하게 거부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강병기 : 과거의 농민운동 전성기가 아닌 지금 현재에서 출발해야 한다. 반대투쟁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실질화를 시키는 농민운동 시대로 넘어왔다고 나도 생각한다. 아울러 농민운동가들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 현재 농정을 제대로 설명하는 학습부터 필요하다.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은, 세상은 농민만 살지 않는다. 분단이라는 특수성 속에 내가 보는 테두리만 봐서는 전체를 놓칠 수 있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과 바이든 시대의 미국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분명하다. 민주당에서 이재명 경기도지사 같은 사람이 여론조사 1위를 하는 것만 봐도 시대적 요구가 진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렵고 답답한 것에만 눈 돌리면 실패한다. 훨씬 빠른 속도로 한국사회가 변화될 가능성 있어서 농민운동이 이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경식 : 30년 전농의 투쟁은 실로 대단한 역사다. 최근 급부상하는 농민수당은 참으로 획기적인 대안이다. 농민기본법 제정 요구 또한 시의적절하다. 농민수당이든 농민기본소득이든 농촌에서 1년에 600만원만 받으면 농촌사회도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도시 실업문제를 극복하고 농촌 붕괴를 극복하는 일거양득의 방안을 우리가 연구하고 전 국민이 공감하게 해야 한다. 작은 것에 치중하지 말고 지금까지 쌓아온 농민적 국민적 신뢰를 바탕으로 폭넓게 싸우자. 전농은 한국농민의 대표조직이자 미래조직이며 리더조직이다.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토론하고 대책을 세우며 차근차근 길을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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