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단일 농민조직, ‘전국농민회총연맹’ 출범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 30주년 특별기획 ①]

  • 입력 2020.06.14 18:00
  • 수정 2020.06.15 13:01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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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1990년 4월 24일 창립돼 올해로 30년간 농민운동의 역사를 일궈왔다. 전농 30년 투쟁사는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이 어떤 길을 걸어 현재에 이르렀는지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전농 창립 그리고 이후 굵직한 역사적 투쟁기록을 매월 1회 연재해 앞으로의 30년을 밝힐 농민운동의 좌표를 확인해 본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지난 1990년 4월 24일 건국대학교 학생회관 중강당에서 창립식을 열고 ‘700만 농민'을 대표하는 전국 단일 농민조직으로 우뚝 섰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지난 1990년 4월 24일 건국대학교 학생회관 중강당에서 창립식을 열고 ‘700만 농민'을 대표하는 전국 단일 농민조직으로 우뚝 섰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지난 1990년 4월 24일 서울 건국대학교 학생회관 중강당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700만 농민’을 대표하는 전국 단일 농민조직으로 우뚝 섰다. 당시 전농 창립을 보도한 <건대신문(1990년 5월 7일자)>에는 “8개도 72개군 대의원 230명 중 216명을 비롯한 농민과 학생·재야인사 등 약 6백여명이 참석”했으며 “(전농이) 정식 창립대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농민운동 역사에 새로운 장을 펼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농이 창립하기까지 우리 사회는 격변했고 농민들은 농업문제에 집중하던 투쟁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 나갔다.

농민들, 사회문제에 목소리 내다

1970년대는 농민운동이 싹트는 시기였다. 당시 농민운동의 주요 과제는 소작농 문제, 농산물 가격 문제, 관료주의적 횡포에 대한 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앞서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행되면서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정책으로 농업 중심이던 한국사회에 균열이 생겼다. 농촌은 값싼 농산물과 저임금 노동력 공급처로 전락했고, 농가마다 부채가 증가했으며 이농현상도 두드러졌다. 1960년 전체 인구의 58.3%였던 농가인구는 1975년 37.5%까지 급감했다. 수출중심 국가로 성장목표를 세운 정부는 1970년대 후반 농산물 시장 개방조치도 처음 시행했다.

농업·농촌·농민을 옥죄는 정책들은 곳곳에서 농민 저항을 일으켰다. 1960년대 후반 가톨릭농민회(가농)가 창립됐고, 1970년대 후반엔 기독교농민회(기농)가 출범했다. 그 사이 1976년 함평 고구마 피해 보상 투쟁, 1978년 노풍 피해 보상 투쟁, 1979년 가농 안동교구 위원장 오원춘 납치사건 등이 벌어지는 가운데 농민운동도 양적으로 팽창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거치면서 농민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윤금순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은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활동가들의 헌신 속에 농민운동은 지평을 확대해 나갔다. 농민들도 자발적이고 비약적으로 저항운동에 동참했는데, 소몰이투쟁이나 수입개방 반대투쟁, 민주헌법쟁취투쟁 고추 등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 등이 대표적이다”고 설명했다.

전국의 폭발적인 농민투쟁은 1980년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농민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1980년대 후반에는 기농, 가농, 자주적 시군농민회가 탄생했고, 그 중 일부는 ‘농민협회’ 등으로 활동했다. 사안에 따라 연대투쟁을 했지만 단일조직이 아니다보니 한계도 분명했다.

한편으론 1984년부터 3년간 소·마늘·고추값이 폭락했다. 개방농정의 후과였다.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 1986년 한미통상협상이 체결되면서 무차별 개방시대가 본격 막을 열었다.

국내 농업기반을 뒤흔드는 개방농정이 가속화 될수록 전국 농민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점점 무르익을 수밖에 없었다. 1987년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민주화 투쟁은 농민들의 투쟁의식, 민주화 의식도 함께 달궜다.

‘단일조직’ 가능성 엿본 2.13 여의도대회

1989년 여의도 2.13 농민대회에 대해 농민들은 전국농민회총연맹 출범의 기폭제가 됐다고 증언한다. 1987년 하반기부터 수세폐지 투쟁이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불붙었고 1988년 경북 영양군에서 시작된 고추생산비 투쟁은 농산물제값받기투쟁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1989년 1월 26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수세폐지대책위’에서 전국투쟁이 모색됐다. 전농 20년사 기록에는 전국수세폐지대책위에서 여의도 전국투쟁을 결의했고, 다음달인 2월 13일 여의도 농민항쟁이 확정됐다.

2.13대회는 성공적이었다. 90여개 시·군 2만여명의 농민들이 하나로 똘똘 뭉쳤고, 농민운동의 통일·단결된 힘을 경험하면서 전국 단일 조직 논의도 훨씬 구체화 됐다. 그 결실이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연)’이다.

기농, 가농, 자주적 시군농민회 등은 1989년 3월 1일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연)’을 결성하고 보다 큰 단일조직을 만드는 데 힘을 모은다. 자료에 따르면 15개 시군의 결합체였던 농민협회는 농민연맹이라는 보다 높은 조직력을 원했기에 다소 입장차가 있어 전농연에는 결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1980년대 후반 농민운동은 ‘전국농민협회’와 ‘전국농민운동연합’ 두 축으로 대별됐다.

1년 ‘전농연’ 결성, 전농 준비단계 돌입

1989년 3월 결성된 전농연은 각 지역 사무국장들을 중심으로 대전 가톨릭농민회에서 전국 단일 농민운동 조직 준비단계에 돌입했다. 당시 충남지역 사무국장이던 이재욱 경기농식품유통진흥원 이사장은 “경북 최진국, 전남 김성인, 경남 서동석 등 활동가들이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준비단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0년대 초부터 이미 전국 단일조직에 대한 큰 그림은 그려지고 있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지역의 기농 소속 농민들과 학생출신 농민들이 결합해 새내기 농민들을 키우고 농민운동을 ‘계급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계획이 논의됐다는 것이다. 전국 농민조직과 각지에서 터전을 잡은 학생출신 농민들은 지역농민들과 접점을 만들면서 농민운동 세력을 불려나갔다. 종교를 넘어 농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 농민운동 진영으로의 전환은 나주지역 수세싸움이 성공을 거두면서 농민운동 확장을 견인해 나갔다. 경제적 보상이 뒤따르는 투쟁에 농민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전농연의 회의는 전농 창립이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열려 각지의 활동가들은 대전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지역대표들 역시 수시로 모였다. 지역에선 여전히 가농과 기농, 자주농 체제가 유지돼 있기 때문에 간격을 좁히기 위한 회의가 밤낮없이 열린 것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으로 뭉친 농민들

1990년 4월 24일 드디어 서울 건국대학교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식이 거행됐다. 당시 건국대학교 축산경영학과 2학년 학생이었던 충북의 한 농민은 “건국대와 고려대는 농촌출신들이 유난히 많았다. 나 역시 농촌출신이라, 우리 학교에서 전국 단일의 농민조직이 탄생한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컸다. 그때 학생들 간 분임토의도 참 많이 했다. 왜 전농이 필요한가, 농민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그런 회의가 주를 이뤘다. 출입구가 막힐 것을 우려해 학생들이 조를 짜 2박3일간 대회성사를 위해 뛰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중간고사 기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축대학장과 면담을 해서 3일 동안 축대의 전체 수업 중단도 결의하는 모범을 보였다”면서 “우리 학교에 손님이 오신다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학교에 오신다는 마음으로 학생들도 열심히 참여했던 것 같다. 행사의 성공을 모두 기원했고, 3일 밤낮 순찰을 돌았다”고 오래된 기억을 꺼냈다.

전농 결성대회가 실린 1990년 5월 7일자 건대신문.  건국대민주동문회 제공
전농 결성대회가 실린 1990년 5월 7일자 건대신문. 건국대민주동문회 제공

 

경북 상주에서는 전농 창립일 하루 전에 ‘상주시농민회’가 창립했다. 농민회 창립으로 대의원자격이 생겼고, 다음날 관광버스 한 대로 건국대로 향했다. 하지만 농민들을 맞아준 건 정문을 에워싼 경찰들이었다.

상경대열에 함께했던 전성도 상주시농민회 회장은 “경찰과 농민 간 밀고 당기는 와중에도 창립행사 진행 상황을 계속 들으면서 싸웠다. 결국 행사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면서 “우리 지역 가농, 기농 회원 모두 전농 창립을 반겼다. 성당 내에 농민회 사무실까지 마련해 줄 정도로 신부님들도 적극 도왔다”고 회상했다.

전국 단일 농민조직 결성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다. 전성도 회장은 “2.13 여의도 투쟁에 상주에서 기농, 가농 다 같이 참여했다. 전국 농민이 하나로 싸움을 해 나가니 성취감도 어느 때 보다 컸다”면서 “지역에서 농민회 활동을 하지 않는 분들도, 농민회라면 뭔가 한다는 확신을 준 때였다. 2.13대회를 치른 농민들은 이후 전농 창립과 농민회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고 전했다. 농민들에게 전농은 농업·농촌·농민문제를 앞장 서 해결해 나가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자리했다.

전국 단일 조직으로 출범한 전국농민회총연맹은 향후 농민운동의 지도와 투쟁의 구심점이 됐다. 또 이전 종교의 틀을 벗고 농민들이 주체가 돼 대중집회를 비롯한 농업·농민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자주성을 확보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이후 전농은 노동자와 함께 사회변혁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농민들의 역할을 높여나갔다.

전농 창립을 보도한 <건대신문>은 권종대 초대 의장의 발언을 통해 전농의 농민운동 방향을 설명했다.전농은 농민의 생존과 민족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나가 기필코 자주·민주·통일의 그날까지 마지막 승리를 위해 모든 민족민주 운동 세력과 어깨 걸고 함께 나가야 한다.

전농 30년의 역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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