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살리는 정치실현, 진보정당과 농민정치세력화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 30주년 특별기획 ⑤] 농민정치세력화

  • 입력 2020.10.17 19:00
  • 수정 2020.10.18 20:32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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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1990년 4월 24일 창립돼 올해로 30년간 농민운동의 역사를 일궈왔다. 전농 30년 투쟁사는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이 어떤 길을 걸어 현재에 이르렀는지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전농 창립 그리고 이후 굵직한 역사적 투쟁기록을 매월 1회 연재해 앞으로의 30년을 밝힐 농민운동의 좌표를 확인해 본다.

2003년 11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전농은 찬반투표 결과, 당시 유일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조직적으로 지지하는데 뜻을 모았다. 농민투쟁만으로 세상을 바꾸기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봄, 민주노동당 농민비례후보 ‘강기갑’과 ‘현애자’ 당선을 위해 전국의 영농발대식은 잔치판이자 선거유세장이 됐다. 농민회원은 물론이고 농민들은 ‘들어보니 꼭 당선돼야 할 사람’이라고 손을 잡았다. ‘농민 정치인’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지만 복잡한 정치판은 ‘농민’에게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이 당면한 현실이다.

‘원 외’ 농민운동을 ‘원 안’으로 들여놓는 농민정치세력화는 고단하지만 중단할 수 없는 여정이다. 2016년 4월 20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충북 옥천군 안내면 안내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지역주민들이 투표용지를 받기 전 본인 확인을 위해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다. 한승호 기자
‘원 외’ 농민운동을 ‘원 안’으로 들여놓는 농민정치세력화는 고단하지만 중단할 수 없는 여정이다. 2016년 4월 20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충북 옥천군 안내면 안내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지역주민들이 투표용지를 받기 전 본인 확인을 위해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다. 한승호 기자

2003년 11월 4일 대전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 임시대의원대회가 단일 안건으로 열렸다. ‘민주노동당을 조직적으로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원포인트 대의원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날을 기억하는 조병옥 함안군농민회장은 “아주 뜨거운 토론이었다. 찬반투표가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 찬반투표는 민주노동당 조직적지지안을 일반안건으로 처리할 것인가 특별안건으로 처리할 것인가, 였다. 일반안건은 과반수 찬성이면 통과되고 특별안건은 3분의2 이상 찬성표를 받아야 통과된다. 두 번째 투표가 민주노동당 조직적지지에 대한 찬반 결정이었다. 전농 회원들이 대단한 게 상대측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기주장을 논리정연하게 밝혔다. 주옥같은 말들이었다. 수준 높은 토론이 아직도 인상 깊다”고 말을 꺼냈다.

당시 채경희 경북 정치위원장 기억이 많이 난다는 조병옥 회장은 “투표결과 일반안건으로 처리하게 됐는데, 채 위원장의 제안 설명이 기가 막혔다. 민주노총이 주축이 돼 만든 민주노동당 조직적지지 건에 대해 학생 등 다른 단위에서도 일반안건으로 처리했다, 우리도 일반안건으로 처리하는 것이 맞다, 는 주장을 폈다”고 17년 전 상황을 전했다.

‘민주노동당 조직적지지’ 안건은 대의원들의 62.7%라는 높은 찬성표로 확정됐다.

전농, 2003년 11월 임시대대서 ‘민주노동당’ 조직적지지 확정

전농 정치위원회는 2003년 봄부터 임시대의원대회까지 5차례 회의를 열면서 ‘민주노동당을 통한 농민정치세력화’를 모색했다. 당시 전농 부의장이면서 정치위원장이었던 이승렬 전 전농 강원도연맹 의장은 “지역별로 정치위원들이 있었고 시군에서의 토론, 중앙단위 토론은 물론 민주노동당과의 협상까지 단계를 밟아나갔다. 그해 10월에 전농과 민주노동당 간의 정치협상 합의문이 작성됐다”고 말하면서 “처음 전농 회원들의 논의는 특정 정당 배타적지지 문제가 아니라 농민정치세력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출발했다. 찬성측은, 우리가 투쟁만 해서는 농업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다,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어렵다, 이런 주장들을 했고 공감도 많이 얻었다. 물론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고 특히 농민운동의 순수성을 해칠 수 있다는 비판도 컸다. 이후 그럼 누구랑 할 것인가 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오래 토론했다”고 설명했다.

전농의 농민정치세력화 방침을 확정짓던 해, 부의장이자 정치위원장을 맡아 활동했었던 이승렬 전 전농 강원도연맹 의장.
전농의 농민정치세력화 방침을 확정짓던 해, 부의장이자 정치위원장을 맡아 활동했었던 이승렬 전 전농 강원도연맹 의장.

 

당시 진보정당은 ‘민주노동당’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농민들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는 정당과의 조율도 풀어야 할 숙제였다. 농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이 친숙하지 않아 당명개정까지 가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이뤄지진 않았다. 전농과 민주노동당이 ‘한 배’를 타기로 하면서 수차례 논의를 거쳤다. 당시 전농 사무총장이었던 박흥식 전농 의장이 역할을 맡았다. 고인이 된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과 전농의 요구안을 놓고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박 의장은 “협상과정에서 때론 감정이 상하기도 할 만큼 밀고 당기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전농이 주장했던 몇 가지 핵심 주장은 비례후보에 대한 농민 몫, 당의 대의기구와 각급 기관에 농민부문의 대표성 반영, 농민위원회 신설 등이다. 아마 당 입장에서 노동자 중심의 당 구도가 전국단위 농민조직이 결합하면서 바뀔 판세 등에 불안감도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2003년 10월 15일 전농과 민주노동당의 ‘정치협상 합의문’이 완성돼 다음달 11월에 전농이 임시대의원대회를 치르게 됐다.

이승렬 전 의장은 “농민정치세력화 결정 전에는 찬반이 팽팽했지만 대의원대회에서 결정이 끝나자 분위기는 전환됐다. 대의원들이 당원으로 가입하자는 결의가 대단했다”면서 “2004년 선거에 민주노동당 농민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 똘똘 뭉쳤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영농발대식이 곧 선거유세장

민주노동당을 통한 농민정치세력화는 2004년 국회의원선거에서부터 불이 붙었다. 민주노동당은 △식량자급 목표 법제화 △공적자금을 조성해 농가부채 근원적 해결 △농축산물의 가격보장과 직접지불제 확대·도입해 농가소득 보장 △통일농업 추진 등 ‘농업분야 10대 공약’을 내걸었다. 농민비례대표로 강기갑 후보(기호 8번)와 현애자 후보(기호 11번)를 선정했다.

농업정책이 경제논리에 밀려 농민을 살리지 못하는 현실과 ‘농민의 아들’이라고 표를 호소하던 정치인들은 정작 당선 뒤 ‘아스팔트 농사’를 지어야 하는 농민을 외면하는 작태까지 농민후보를 통해 바꿔보자는 전국의 열기는 더없이 뜨거웠다.

농민후보들은 선거유세도 전국의 영농발대식 현장에서 했다.

이승렬 전 의장은 “우리가 직접 정치하자, 는 마음들이 농민후보한테 집중됐다. 우선 민주노동당 가입부터 열심히 참여했다. 총선이 4월이고, 영농발대식이 3월에 있었는데, 농민후보들이 영농발대식에 오면 몇백 명이 모여서 당선을 기원하고, 강기갑 후보는 장터에서 쩌렁쩌렁 속 후련한 발언들을 해 주니 환호가 대단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거를 해 왔지만, 당시엔 축제처럼 흥이 넘쳤다. 춘천에선 돼지도 두 마리 잡았을 정도니. 전국 어디나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이라고 기억을 꺼냈다.

농민후보에 대한 기대는 지역 편차를 가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조병옥 함안군농민회장도 “영농발대식에 오면 보통 기념품을 나눠준다. 촌 어르신들이 밥도 같이 먹지만 기념품인 삽 한 자루도 받을 겸 나왔다가 강기갑 후보 연설을 듣고 그렇게 좋아들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동네 유지 할 것 없이 환영분위기야 말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강기갑을 당선시키려면 민주노동당에 표를 찍어야 한다, 고 참 많이도 알리고 다녔다. 지지율이 그대로 반영됐을 뿐 아니라, 영농발대식을 한 곳과 하지 않은 곳의 표 차이도 분명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농민이 정치하니 다르네”

처음부터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에 염증을 느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또렷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농민회원들이 부추겼다고 그냥 한 표 찍어줄 리도 없다.

농민들이 그동안 겪었던 고충, 정책에 대한 부당함들을 정치하겠다고 나선 농민이 연단에서 ‘내 속에 들어온 것처럼’ 말을 해 주는 것에 대한 응원, 그 마음들이 표로 바뀐 결과다.

지난 2005년 10월 강기갑 의원은 국회 본청 앞에서 대책없는 쌀수입국회비준을 반대하는 단식농성을 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지난 2005년 10월 강기갑 의원은 국회 본청 앞에서 대책없는 쌀수입국회비준을 반대하는 단식농성을 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조병옥 함안군농민회장은 “강기갑 의원이 의정활동도 잘 했고, 조직적 위상을 세우는 큰 성과를 남겼다”고 의미를 더하면서 실제 ‘민정당’ 평생회원이었던 한 지인은 “농민회가 하는 것이 맞다”고 적극 지지하더니 결국 당적을 바꾸는 일도 있었다고 사례를 소개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선거와 2008년 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농민후보자가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고, 2006년 5.31 지방선거에는 농민후보가 대거 출마했다.

<전농 20년사>에 따르면 ‘5.31 지방선거는 농민운동진영과 진보정당이 조직적 결합을 이루어 대규모 후보(102명)를 출마시킨 첫 선거’라고 규모와 의미를 밝히고 있다. 농민선거대책본부를 구성해 조직적으로 선거운동을 했고, 102명의 농민후보 중 12명이 당선되는 결과를 얻었다. 노동자가 많은 지역과 농촌지역의 당 지지율이 인근 타 지역보다 높았다는 것은 여러 가능성을 내포했다.

농민회가 툭하면 데모만 한다고 삐딱하게 봤던 사람들도 전에는 무시되던 농업의제를 사회에 던지고, 지방선거 이후 지역의회에도 진출해 농민에게 필요한 일꾼으로 나서니 마음을 열었다. 농민회 위상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혼란, 그리고 정체

물론 민주노동당에 대한 조직적지지를 논의할 초기, 농민들의 정치적 성향이 각각 다른 상황에서 자칫 전농 조직이 와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상당했다. 농민운동도 벅찬데 정당운동까지 합쳐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표출됐다.

시·군 농민회는 지역적 정치성향과 조직적지지의 간극이 벌어지는 일도 생겼다. 예컨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각 지역별로 활동을 오래한 농민회 간부가 자주민주연합(자민련)이나 열린우리당 후보로 선거에 나갈 계획을 세우는 경우 같은 지역구에서 농민회장이 민주노동당 소속 상대후보로 나올 수도 있으니 갈등소지가 다분했다.

전농 규약에는 ‘군농민회 회원은 선거권, 피선거권 및 의결권을 가지며 조직 내외에서 사상, 정치, 종교활동의 자유를 가진다. 단, 본회 중앙위원급 이상의 임원 및 실무책임자는 본회 결의 없이 정당활동을 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농민회 책임자의 경우 민주노동당 단일정당 활동만 가능하다는 지침이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조직적으로 지지하며 활동에 매진한 것에 비해 기대만큼 성과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도 쌓였다. 당의 변화도 많았다. 민주노동당은 분당 등 혼란기를 거쳐 2011년 진보대통합 추진으로 통합진보당이 결성됐다. 2012년 총선 때에는 통합진보당 내에서 당내 선거를 둘러싼 ‘부정선거’ 논란으로 큰 홍역도 치렀다. 이윽고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로부터 ‘당 해산’ 결정까지 나면서 사회적 논란으로 비화됐다. 농민과 노동자가 만든 당이 ‘해산’ 판결을 받은 뒤 농민출신 지방의원들도 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여타의 당 사태를 지켜보는 농민들도 마음을 닫거나 거리를 두는가 하면, 전농 역시 ‘내상’을 입었다.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다.

농민정치세력화, 농민이 사는 길

이근혁 전 전농 충남도연맹 사무처장은 “농민들은 예나지금이나 대안이 되는 정치세력화는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를 돌파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면서 “지역에서 요구하는 대안세력에 부응하도록 우리 실력을 키우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조병옥 함안군농민회장도 “함안군에서 민주노동당 득표율이 20%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5명 중 1명은 우릴 밀어줬다는 뜻이다. 이 엄청난 저력을 다 까먹은 부분은 정말 안타깝다”고 평가와 성찰의 필요성을 얘기했다.

박흥식 전농 의장은 “정치세력화에 대한 현재 입장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고 본다. 대중조직으로 역할을 다하면서 정치세력화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중앙조직이 정당운동에 편중한 활동을 했다는 비판적 입장과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분리돼 현재 정의당과 진보당으로 각각 나뉜 상황, 그리고 정치세력화 자체를 거부하는 면 등이다”면서 “중요한 것은 지난 4월 총선에서 김영호 전 의장을 국회에 진출시키기 위해 전농 전 조직이 앞장섰던 것처럼 농민 국회의원이 간절하다는 사실은 정치방침 결정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고 단언했다.

농민수당이 도입되고 정착되는 성과도 농민들이 직접 일군 알찬 열매다. ‘원 외’ 농민운동을 ‘원 안’으로 들여놓는 ‘농민정치세력화’, 고단하지만 중단할 수 없는 여정이라는 것 또한 농촌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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